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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 - 1
게시물ID : panic_885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adTaste
추천 : 6
조회수 : 1191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6/06/17 0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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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일주일 전 금요일. 그 날은 더웠습니다.

산 속이 무슨 한증막 같았으니까요. 봉우리 하나를 오르니 만난 막걸리장사가 "더우시죠? 오늘은 바람 한 점 없네요." 합니다.

평소에 바람 많이 불어 종일 버틸 수 있는 자리를 잡으셨겠죠. 그 분이 연신 부채질하며 제 뒤통수에 몇마디 더 하신 듯 합니다.

이상할 정도로 많은 분이 제게 말 걸어온 날입니다. 지난 2,3주 동안 산 속에서 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여파인지 두세명 모인 여자등산객들,

평소엔 전혀 저랑 상관 없는 그런 분들이 말 걸어왔습니다. 길을 묻기도 하고 어느 봉우리 가세요? 종주 하세요?

저도 평소의 짧고 간결한 대답보다 말수가 늡니다. 네. 어느 봉우리 들러 어디까지 가려구요.

종주는 힘들고 중간에 내려가려고요. 그러게요. 많이 더우시죠? 세 분 같이 사진 찍어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경계의 대화..... 공격성 유무를 확신하지만 확인하는 듯한.

혼자 오신 어르신 두 분을 뵈었는데 제 앞을 걸으시며 경계가 역력합니다. 내 기분 좋아야 남 기분도 편하다 보다는 그 반대를 택하며 사는

제 기분 탓도 크겠지만 제 앞으로 걷는 그 분들의 불편함을 느끼며 걷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앞서 가는게 더 편하다싶어 나도 힘들지만 그 분들을 앞질러 버립니다.

두 번의 산 속 살인사건은 이렇게 불안의 전염병을 퍼뜨려놓았습니다.


산행 20킬로가 목표인데 오늘도 포기입니다. 16킬로를 찍어놓고 남은 체력과 저녁에 몰려올 피로를 가늠해봅니다.

산이 싫어질 정도로 피곤할 때까지 산에 있기는 싫습니다. 내려갑니다.

집에와서 씻고 티비 앞에서 여느 때처럼 GPS 앱으로 오늘 산행 궤적을 훑어봅니다.

여기서 이렇게 갔었지. 여기서 그 사진 찍었구나. 물 마시고 잠시 앉아서 쉬었었고....그런데 평소에 보지못한 낯선 선들이 보입니다.

그냥 지나쳤으면 아무일 아니었을 그 선들. 그게 왜 눈에 띄었을까요. 톱니모양의 선들을 확대해봅니다.


Screenshot_2016-06-16-18-58-46.png


이쯤이면 오늘 산행이 끝날 즈음인데.....14~15킬로정도. 그 즈음이면 내 기억에 그냥 흙길이었을텐데......

이렇게 어지러운 흔적은 뭐지? 쉼터라는 곳도 기억나는데 거긴 봉우리였고 잠깐 서서 물 마신 기억은 있는데 GPS가 저리 어지럽나?

뭐하느라 저리 돌아다녔지?

그것보다도 그 전 길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산에 다녀와서 기억이 전혀 나지 않을 정도라면 그 정도로 특징이 없는 길이란 뜻인데

저렇게 돌아다닐 수가 있는건가. 보통 오르막을 험하게 오르더라도 저렇게까지 헤맨 궤적으로...... 그렇게 험한 오르막이면 기억에 남게 마련인데.

바위가 있는 길이었나? 위성사진을 봅니다. 나무만 빽빽한 곳입니다.

너무 힘들었나. 그래서 비척비척 걸었나?? 16킬로면 힘들긴 해도 그정도까진 아닐텐데.

나만 이런게 아니겠지. 저 길은 그런가보다. 다른 사람들의 트립을 보자.

검색해봅니다. 트립 궤적이 적지않습니다. 3개, 4개 검색해봅니다. 모두 저 부분이 일직선입니다.


낯섬의 두려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보지못했던 삐뚤빼뚤한 내가 걸어온 길.

기억나지 않음의 두려움. 내가 걸었던 길인데, 다른 곳은 그래도 대충 어렴풋이 기억나는 듯 하는데 이 구간만은 온전히 통째로 들어낸 듯한.

이제는 정말 흙길이었는지, 바위길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무엇보다도 살펴본 다른 사람들의 트립들은 다 일직선인데 왜 내 발걸음은 저러한지.




저길 내일 다시 가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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