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유서 [스포일러 주의: 안토니아스 라인, 타이타닉, 파리의 연인]
게시물ID : panic_886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매릴린맨슨
추천 : 12
조회수 : 1845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6/06/22 08:21:25
옵션
  • 창작글
  • 외부펌금지
자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이라고 들어봤나?” 과장님께서 입을 열었다.
아뇨. 요즘 영화관에 잘 안 가서......”
아니, 이거 꽤 오래된 영화야 90년대 영화지. 2차 대전 이후 네덜란드 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얘기인데 크 명작이지.”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웬 영화 얘기에요?”
아 사람 얘기하는데 말 좀 끊지 마.”
아 흐흐 네, .”
이번 자살 사건 말이야. 사망인이 유서에 무슨 세상을 비관한다고 말하며 죽었잖아. 영화에서도 어떤 늙은 철학자 한 명이 자살하거든? 그 사람이 무슨 쇼펜하우어 사상에 빠져가지고 세상사는 의미를 못 찾고 자살이 정답이라고 느껴서 자기 목숨을 끊지. 게다가 똑같이 목 메달아 죽고. 또 이번 사건 사망인도 철학과 박사 과정을 밟는, 어떻게 보면 철학자라고 할 수 있지.”
아 왜 스포하고 그러세요!” 나는 깐죽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 이씨! 언제 적 영화인데!! ! ‘타이타닉에서 잭 결국 죽어! 드라마 파리의 연인은 결국 여주인공이 쓴 소설이고! 이런 거 안 보고 어렸을 때 공부만 주구장창 했냐? 그래서 경찰학교 나오니 좋디??”
아 진짜!” 짜증을 내다가 선배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지 말입니다.” 장난스럽게 엄숙한 척 근엄한 목소리로 대들자 확 그냥하고 과장님께서 때리는 시늉을 했다.
말 그래도 오 과장님과 나는 경찰대학 선후배 사이다. 물론 나이 차이가 조금 있어서 절대 학교를 같이 다니지는 않았지만 나름 선배랍시고 잘 챙겨주고 서로 거리낌 없이 지낸다.
그나저나 확실히 이 사건 이상하네요.”
, 뭐가?”
자살인데 유서를 녹음기에 녹음 했다고 했죠? 보통은 글로써 남기는데 왜 굳이 녹음을 했을까요?”
자신의 생생한 목소리가 세상에 알려지길 원한 게 아닐까? 나름 철학을 공부한 사람답게!”
아 과장님 장난치지 말고요.” 우리 둘은 천장에 매달린 밧줄이 있는 방을 배회하며 사건의 단서를 찾아가려고 하였다. 깨끗한 방이었다. 연필, 종이, 컴퓨터.... 유서를 쓴다면 충분히 쓸 수 있었을텐데 그게 더 편하지 않았을까? “제 말은 자살 사건들 중 녹음을 통해 유서를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거죠.”
주변에는 순경들이 사진찍고 지문 채취하고 바깥에는 경찰차가 폴리스라인 옆에 대기하는 중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부근을 지나면서 웅성거리고.
음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분위기가 침울하니 한 번 농 던진거야.” 과장님은 다시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어제 당직 서고 오늘 집에서 자는 동안 호출을 받아서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보고 받은 것은 없다만 내용인 즉 어떤 30대 남성이 밧줄에 목 매달아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낮에. 고시원에 살던 이 남성을 발견한 것은 돈을 받으러 온 건물주. 문 두드려도, 전화를 해도 답이 없어서 발견했다고 한다. 남긴 것은 녹음된 유서 파일 하나. 그리고 하필 사망한 남성의 동생은 하필 우리 서에서 일하던 한 순경.
이 얘기를 듣고 밖에서 오열하고 폴리스 라인을 뚫고 헤집을 기세로 달려든 한 순경이었으나 주변 동료들이 그를 말려 진정 시키고 서장님께서 하루 동안 집에서 쉬라고 격려해주셨다.
평소 한 순경하고 그의 형은 어떤 사이였나요?”
여기 고시원 사람들 말로는 형제간 우애가 좋아보였대. 박사 공부하느라 돈도 잘 못 버는 형을 위해 가끔 반찬을 들고 왔다더군. 부모님은 몇 년 전 돌아가시고 형제가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었어.”
그런데 저 한 순경이 형이 있는 줄 몰랐네요.”
뭐 가족 얘기는 잘 안 하지. 부모님도 둘 다 새파란 나이에 돌아가셨으니까.”
그런데 왜 둘이 또 따로 살아요? 뭐 나이가 차서 각자 독립해 사는 거는 이해한다만, 한 순경은 결혼도 안 했잖아요? 사망인도 그렇고.”
사망인은 자기 학교 근처 고시원에 졸업하기 전까지만 살게 돼있어. 그리고 형제는 다시 살 계획이었대, 한 순경 말로는.”
, 고시원 CCTV는 볼 수 없나요?”
공교롭게도 여기는 CCTV가 없는 고시원이야. 건물주가 돈 아끼려고 법을 어긴 것이지.”
어휴 그 놈의 돈...... 그렇다면 유서 파일이라도...... 자살한 이유가 적혀 있을 것 아니에요.”
서에 가면 있을 거야. 홍 순경에게 부탁해봐, 오늘 뭐 바쁘다니까 아직 있을 거야. 아 이참에 서에 갔다 그냥 집에 들어가라. 어제 당직도 섰고 쉬어야지.”
서장님께서 사망 사건이라고 출근하라고 하셨는데......”
괜찮아. 어차피 서장님도 방금 퇴근하셨을 거야. 지금 몇 시냐. 벌써 저녁 6시다. 혹시 서에 서장님 계시면 음 뭐 크크 너 알아서 하고.”
......” 나는 피곤한 몸을 견디며 발걸음을 서로 옮겼다.
사무실에 있는 홍 순경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거의 모든 잡다한 사무를 두루두루 알고 있었다.
혹시 서장님 계셔요?”
? 퇴근한지 한참 됐는데......”
아 그럼 됐어요. 혹시 오늘 그 자살 사건에 녹음기 증거품 좀 볼 수 있을까요?”
“XX동 자살 사건 말인가요? 그거 증거물 창고에 보관했는데 이 시각에는 서장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열람할 수 없는데......”
짜증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서장님께 전화하면 무언가 또 일 시킬 거고.
음 그렇다면 혹시 녹음기 녹음한 거 파일 복사한 거 있어요?”
온 지 얼마 안돼서 아직......”
아 되는 게 없네!” 그냥 퇴근할까. 과장님께 퇴근인사 깨톡이나 보내야겠다.
! 대신에 그건 있어요!”
“?”
유서를 저희가 아까 녹음기 틀고 문서로 옮겨서 작성했어요. 그거라도 드릴까요?”
아 네 그럼 그거라도 주세요.” 좋았다가 말았다. 그냥 괜찮다고 할 걸 그랬나, .
홍 순경으로부터 유서 문서 작성본을 받고 나는 데스크에 앉아 천천히 읽어내렸다.
다음은 그 유서의 전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숱한 고민을 해 온 사람이다. 철학,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양 근대 철학을 공부하면서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데카르트,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들의 고뇌를 느끼며 그들과 어느 정도 소통할 수도 있었다. 내가 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은 쇼펜하우어였다. 그의 사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상처받은 영혼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 굳이 살아있을 이유가 있을까.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을 탐하기보다 소멸한다는 것이 더 아름답지는 않을까. 인간은 결국 사라지는 것을. 무엇을 그리 고민하랴. 사랑했다. 모두를. 그러나 다 없어질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을 다만 좀 더 빨리 이행하고자 한다.
 

뭐야.
보통 유서들을 읽고 나면 비록 나와 관련이 없어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인해 심장이 조여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자살하는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가련할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것을 읽고 나서 나의 첫 반응은 이거다. 뭐야.
문장도 매끄럽지 못하고 그냥 이상한 문자 쓰는 것 같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너무나도 시적으로 표현하려고 하고 있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뭐지? 세상 개 같으니 죽을래요가 아니라 죽는 게 아름다우니 죽을래요 인가? 내가 철학은 깊이 공부하지 않아서 그런가? 뭐 이런 유서가 다 있어.
홍 순경은 이미 퇴근하고 없고 나도 짐 챙기고 나갔다. 집에 자러 가야겠다.
 

다음 날 서에 출근하면서 오 과장을 만났다.
그래, 어제 뭐 느낀 게 있든?”
철학자들이란 참 이상한 부류라고 느꼈습니다.”
그래? 뭐 아무튼 부검 결과 나왔다. 사인은 목이 조여 경추 골절 및 호흡곤란으로 인한 사망. 약물이나 외부 충격 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자살한 것 같아. 다만......”
다만?”
부검의 말로는 죽기 직전 엄청 울었다 하던데. 뭐 그런 경우는 종종 있다만. 유서는 자기가 무슨 좋아서 죽는 것처럼 써놓더니만.”
? ! 과장님? 혹시 유서 음성 녹음 파일은 들어보셨나요?”
아직. 문서로 보고 받았어. 녹음기 아직도 증거 창고에 있으려나.”
그거, 파일 추출했습니다!” 옆에 지나던 홍 순경이 발랄하게 끼어들었다.
오 그거 한 번 내 인트라넷 메일 주소로 보내줘봐.”
과장님 컴퓨터로 이어폰 꽂고 우리 둘은 이제는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들을 참이라 침을 꿀꺽 삼켰다.
 

목소리는 굉장히 침울했다. 중간중간에 훌쩍 거리는 소리도 들었고. 확실히 울고 있는 사람 목소리였다.
과장님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살짝 쳐다보았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절대 죽고 싶어 죽는 사람 목소리 같지는 않았다. 확실히 이상했다.
유서를 읽었을 때하고 들었을 때는 확연히 달랐다.
 

홍 순경! 이거 유서 카피 작성한 사람 누구야!”
... 저인데요.”
아 이렇게 하면 안되지! 고등학교 국어 시간 때 희곡 공부 안 했어? 이 정도면 대사 말고 해설과 지문도 들어가야지!”
아 죄송합니다.” 홍 순경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 됐어, 야 윤 경위 자네가 해! 이거 지금 다시 작성해.”
? 저 이 사건 말고도 해야 할 일 있어요.” 나는 날벼락 맞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아 어차피 너 오늘 당직이야! 그 때 일처리 해!”
???? 저 그저께도 당직이었는데!”
아씨 다들 휴가 가고 인원 부족해서 그래. 내가 다음 주 너 다 빼달라고 할게.” 죽어도 자기가 하겠다는 말은 안 한다. 우이씨.
그렇게 해서 내가 다시 작성한 유서 카피.
 

(침울한 목소리로 울먹이면서, 느리게) 나는...... 오랫 (콧물 훌쩍) ...안 숱한 고민...을 해 온 사람이다. (가파른 숨소리) 철학,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양 근대 철학을 공부하면서 (콧물 훌쩍)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데카르트......,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들의 (기침 콜록) 고뇌를...(울먹이며) 느끼며...(울먹이며) 그들과 어느 정도 소통할 수도 있었다. 내가 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은 (콧물 훌쩍) 쇼펜하우어였다. 그의 사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콧물 훌쩍, 심호흡) ...상처받은 영혼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 (한 숨) ...굳이 살아있을 이유가 있을까.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을... ......하기보다 소멸한다는... 것이 더... 아름답......지는 않을까. (콧물 훌쩍) ...인간은 결국 사라...지는 것을. (심호흡, 정적) 무엇을 그리 고민하랴. 사랑했다. 모두를. 그러나 다 없어질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을 다만 좀 더 빨리 이행하고자 한다.
 

뭐 계속 울먹이다가 마지막에 심호흡과 정적 이후 매끄럽게 목소리를 이어갔다는 점만 빼면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는 유서였다.
그렇게 현장과 서를 다시 오 과장과 왕복하면서 하루는 끝났다. 수사는 아마 자살로 결론지을 예정이다. 한 순경에게는 안됐지만 이제 가족 없이 홀로 살아가야 하겠지.
나는 당직을 설 준비를 하며 데스크에서 밀린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새벽이 되기 전에서야 그 일을 다 끝내서 진짜 할 일이 없어 이제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닥칠 예정인 일들을 미리 처리할까? 아니야, 그건 너무 싫어. 야간 순찰 간 애들이랑 무전기로 농담 따먹기 할까? , 그것도 이제 질린다. 그냥 텔레비전 보면서 핸드폰 게임도 하고 해 뜰 때까지 멍하니 있어야겠다.
새벽 2시쯤, 아주 조용해질 때 한 순경이 찾아왔다.
? 한 순경님 웬일이세요?”
아 그냥 윤 경위님 고생하시는 것 같아 컵라면하고 과자 좀 사왔죠.”
아 정말 고맙네요. 여기 앉아서 같이 드세요.”
안 그래도 형이 죽어서 많이 심란할 터인데 이렇게까지 남을 챙기는 것을 보면 그는 분명 좋은 사람 같다. 평소 행실도 바른 사람이고.
나는 컵라면을 까고 안 먹겠다는 한 순경을 굳이 꼬드기지 않고 혼자 물 부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초연한 표정으로 내가 컵라면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가 신경 쓰여서 말을 걸었다.
저 집에서 쉬시지. 왜 나오시고 그래요. 이럴 땐 푹 쉬는 게 좋아요.”
, 이번 수사에서 도와드릴 게 없나 해서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주저 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먹다가 눈치 보면서 말을 텄다.
, 혹시 평소 형님 분께서는 뭐 어떤 분이셨어요?”
, 아까 수사관들이 묻던 거군요. 뭐 심심할 테니 그래도 말씀 드리죠. 평소 형은 성실하고 밝은 사람이었어요. 가끔 뭐 사람이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릴까 이런 얘기는 했어도 절대 자살할 사람은 아니에요. 우울증이나 정신과 치료 경력 이런 것도 없어요. 저로써도 충격이에요.”
.....” 나는 말문이 막혔다. 한 순경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망한 사람의 유족은 말을 계속 시켜야 슬픔을 빠르게 극복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말을 계속 걸기로 한다. “혹시 형님 분께서는 평소 말투가 어땠나요?”
?”
나는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아차 싶어 괜히 이 얘기 꺼낸 것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이어나갔다. “, 제 말은 유서 녹음한 거 들어보시면 형님 분께서 말을 자꾸 끊어먹어요. 그리고 중간에 말을 좀 버벅대요.”
나는 그리고선 내가 아까 작성한 카피를 보여줬다.
여기 보세요. 여기 점찍은 부분들은 말을 갑자기 길게 늘어놓잖아요.”
, 아마 죽기 직전 엄청난 심경을 느껴서 그런 게 아닐지...”
뭐 그럴 수도 있죠. 철학자들 이름 나열할 때 길게 늘어놓고, 중간에 상처받은 영혼 머시기 할 때 상...상 버벅거리고.”
아 그렇네요.”
내가 작성한 카피를 한 순경은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가 감정 추스를 시간을 주어야겠다 싶어 소리 없이 라면을 계속 먹었다.
윤 경위님! 혹시 이 작성본 이게 유일한 것인가요?”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한 순경이 나를 쳐다본다.
아니요, 오 과장님께도 보고 드렸고 인트라넷에 여러 개 사본이 있을 거예요.”
한 순경의 표정은 굳어졌다.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갑자기 집에 뭐 안 한 일이 생각나서.” 한 순경은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나는 뭔 일 있나 싶었지만 뭔가 생각난 것이라도 있나 싶어서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인사하고 그는 재빠르게 서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렇게 새벽의 만남을 뒤로하고 심심해져 다시 유서를 살펴봤다.
버벅대는 말투...” 혼자 중얼거리면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그렇게 해서 그 부분들을 동그라미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유서는 어떤 상황에서 녹음되었는지 상상이 갔다.
 

그리고 한 순경의 본명은 한상구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