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이성애자 남성이 <아가씨>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것. (스포)
게시물ID : movie_591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Promet
추천 : 13
조회수 : 2496회
댓글수 : 28개
등록시간 : 2016/06/23 03:52:58

그래도 자지는 지키고 죽어서 다행이야.”

 

<아가씨>가 개봉된 후로 영화에서 비판 받은 부분은, 이야기 상으론 남성 권력에서 자유로운 레즈비언 연인을 설명하면서 카메라로는 그녀들의 육체를 탐미적으로 전시하는 데서 오는 내용-형식 간의 불일치였다.

물론 박찬욱 감독이 반여성주의자라는 소리를 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는 그저 장르 영화의 선봉장이자 지독한 탐미주의자로서, 그녀들의 육체 관계를 아름답게 묘사해야 하는 의무를 성실히 한 것뿐이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실 박찬욱의 영화만큼 한국 주류 영화계에서 여성 인물들의 위치가 두드러지는 영화가 또 있던가. 물론 그의 영화 속에서 여성은 많은 폭력에 노출되지만, 그래도 수두룩한 다른 한국 영화의 속없는 아녀자들보다야 천배 만배 당당한 그녀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을 달리해볼 수도 있겠다. 만약 박찬욱 감독이 자기 영화의 이러한 맹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오히려 그는 이러한 모순을 전경화시키고자 하려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아가씨>는 여성 주체들의 탈주극임과 동시에 분열하는 무력한 자지들의 자화상이기도 하지 않을까.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인물들은 여성을 자신들의 성적 판타지에 감금시키려는 압제자들이고, 코우즈키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인물이다. 그가 주최하는 낭독회는 사실 신사들의 변태 성욕을 채우는 음란서적 낭독회였고, 그의 서재는 온갖 기이한 종류의 성벽을 묘사한 서적과 춘화로 넘쳐난다. 그에게 있어 여성은 자신만의 춘화를 완성시키기 위한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

백작은 코우즈키보다야 온건해 보이나 어쩔 수 없는 억압적 남성이다. 그는 히데코 앞에서 자신을 이성적으로 욕구를 조절할 줄 알며 신분상승과 성공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코우즈키에게서 해방시켜주겠다는 명목으로 그녀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그도 코우즈키의 낭독회에 연루된 남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통제를 꿈꾸며, 결국 히데코가 던진 미끼에 여성은 사실 강제로 하는 성교에 극상의 쾌락을 느낀다는 헛소리와 함께 그 욕망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만다.

백작은 히데코와의 수 싸움에서 패하고 지하실에서 코우즈키에게 고문을 당한다. 여기서 백작은 코우즈키에게 히데코와의 성관계를 묘사하라는 요구를 받는데 이는 떠나버린 히데코를 자신의 성적 판타지 속에서라도 종속시키려는 코우즈키의 마지막 발악이다. 백작은 꾀를 내어 첫날밤 이야기를 하는 척하다 수은 담배로 동반 자살을 한다. 그는 히데코와의 성교를 묘사하기를 거부하고 함께 죽음으로써 그녀를 코우즈키의 음험한 세계에서 최종적으로 해방시킨다. (여기서 그가 실제로 히데코와 성교를 나누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고문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야기를 함으로써 히데코를 코우즈키의 섹스 판타지에 종속시키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이 때 그는 그래도 자지는 지키고 죽어 다행이야.”라고 독백한다.

이 대사는 실제로 코우즈키가 실제로 백작의 자지를 자르려고 한 상황에서 한 말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는 다른 자지를 경멸하면서도,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한 애기 장난감같은 자기 자지는 끝까지 간직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는 다소 이중적인 태도다. 그는 이성적으론 코우즈키를 혐오하며 히데코를 그의 손에서 해방시킨다 했지만, 한편으론 그 역시도 그녀를 자신의 성적 판타지에 종속시키려 했다. (‘자지대사 이전에 그가 내뱉은 대사는 히데코는 나의 아내다.”였음을 명심하자) 일종의 내로남불이라고 해야 할까, 백작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히데코, 숙희와 같은 여성을 마주한 대다수의 무심한 남성들을 대변한다. 성 상품화와 억압적 질서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의식적으론 여성 해방에 동의하면서도 무의식 저변엔 여성을 향한 통제에 동참하는 우리. 이 무리에는 퀴어 영화에서 여성 육체를 보기 좋게 전시하는데 공을 들인 박찬욱 감독이 속할 수도 있고, 퓨리오사나 숙희-히데코 커플의 탈주극에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길가의 설현 입간판에 감탄하거나 프로듀스 101은 꼭 챙겨보던 내가 속할 수도 있다.

 

비겁하지만, 나는 남성들의 이러한 이중성 앞에서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심지어 내 깜냥으로는 여성을 향한 남성의 통제욕구가 윤리학의 문제인지, 생물학의 문제인지도 단정지을 수가 없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우리들의 애기 장난감 같은 물건으로는 어떤 여성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 사실을 백작처럼 수은 연기와 함께 깨닫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