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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선택지형)그와 좀비와 당신. 16
게시물ID : panic_891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어떤것
추천 : 19
조회수 : 822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6/07/09 21:5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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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일은 이곳을 떠나자. 물론 따듯한 물, 따듯한 음식 좋지. 하지만 여긴 지방으로 가는 고속도로 한 가운데이고 앞으로 얼마나 가야 다음 마을이나 휴게소가 있을지는 아무도 몰라. 가능한 한 체력을 회복하되 여기에 묶여선 안된다.(3번 9표, 2번 1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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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나마 뜨거운 물과 온반을 먹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을 맛보았다. 여기에 더 머무르는 동안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는 알수 없지. 그날 점심을 먹으며 든 생각이다. 운이 좋게도, 편의점 창고 내에서 소형 카트렉을 발견했다. 같이 있던 노끈으로 가방을 묶고 카트렉을 유모차처럼 밀어서 이동을 시작했다. 짐 무게가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어깨와 허리가 편해진 건 사실이다. 덜걱덜걱 소리가 나면 어쩌나 싶었는데 관리는 잘되었는지 다행히 별다른 소음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의 사태로부터 5일. 나는 도로위에서 생활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조그마한 마을에도 가봤고 제법 도시라는 테가 나는 읍에도 가보았다. 물론 멀쩡한 곳은 없었다. 지방 소규모 마을 구제책인지 새것으로 보이는 비슷비슷한 간판들이 그득했고, 그 와중에 대규모로 도장을 새로 했는지 오히려 도심지보다 더 큰 냄새를 풍기는 곳도 있었다.

근근히 슈퍼마켓이나 마트를 들리며 식량을 충원할 때 혹시 나라가 복구 되었을까 하는 마음에 수색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좀비들이 서서히 경직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잠시 들린 읍내 마트에서 실수로 가방을 떨어트리는 바람에 제법 큰 소리가 났음에도 반응이 없기에 찾아보니, 좀비들의 움직임이 엄청나게 느려진 것이다.

분명 아직 반응은 하고 있지만 전에 비해 움직임은 둔해지고 반응 속도도 떨어져있었다. 심지어 읍내 외곽쪽, 그 읍내에서 좀비가 가장 처음 발생한 걸로 보이는 지점 근처의 좀비들 중에는 바닥에 쓰러진 좀비들도 보였다. 일종의 사후경직 같은건가? 나는 씁쓸해졌다. 그렇다면 "좀비"는 적어도 생명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식량은 인간의 몸이지만 꾸준히 보급될리는 만무했고 자신들끼리 잡아먹지도 않았으며 식수를 따로 챙겨마시는 모습은 발견한 적이 없으니 생물로써 최소한의 영양보급따위 없었다는 소리다. 사실 그동안 움직였던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구나.

생각해보니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은 전염되어 좀비가 된걸 본적이 없다. 가끔 짖거나 돌아다니는 개를 본적은 있지만. 그렇다면 사람에게만 전염되는 병? 하지만 어떤 병이 사람을 죽은 뒤에도 움직이게 만드는가. 마치 연가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연가시조차 죽은 곤충을 움직이게 하지는 않는다지만, 생물로써 자의를 떠나 자멸하게 만든다는 점에선 비슷하지 않을까. 그걸 발견한 날은 좀 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짐을 마을 외곽에 숨겨놓고 야구배트와 A의 목공칼을 들고 쓰러져있는 좀비 하나를 끌어냈다. 반항은 없었다. 혹시 모르는 마음에 장갑을 끼고 긴팔 면옷을 입었지만 그저 고개를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정도의 반응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다음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양손에 든 야구배트를 들고 한참 고민하던 나는 결국 있는 힘껏 좀비의 다리를 내리쳤다. 퍼적, 하는 기묘한 소리가 났다. 악취를 풍기는 검은 피가 아주 조금 흘렀으나 의미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좀비의 근육은 마치 아주 오랫동안 해당부위를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얇고 메말라 있었다. 시체가 썩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모양의 나무로 만든 모조품처럼 버석버석 말라있었다. 피부는 슬쩍 쓸어내기만 해도 가루가 날릴 정도였다. 유기분해 따위의 일도 일어나지 않는걸까. 생물의 죽음이라기보다 인간이었던 것이 무기물로 변한 것 같다. 파리가 꼬이지도 않고 가까이서 맡아보니 냄새도 거의 날아가있다. 칼로 - 솔직히 말해 그저 손에 힘만 줬어도 갈라질 수준의 피부였다. - 복부를 갈라보자 내장도 거의 꽈리처럼 딱딱하게 오그라들어서 하복부쪽에 몰려있다. 만져보자 파스스 하고 숯이 무너지듯이 부서진다.

내가 다리를 부수고 배를 가른 늙은 여자 좀비는 이젠 좀비가 아니라 모형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조금의 반응도 없고 생명체로써는 합격점 미달이다. 바닥에 쓰러진 좀비들 중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것은 이젠 피부가 바람에도 날려갈 수준이 되어있다. 후- 하고 불자 안그래도 얇아진 피부가 바스라졌는지 눈에서 시작되었던 각질화가 얼굴까지 내려와 허공에 흩어졌다. 나는 조용히 먹을 것을 챙겨서 마을을 떠났다.

끔찍한 마음은 없다. 정말 기이할 정도로 동정심도 공포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확신한다. 단지 페인트로만 이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굳이 한국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 것임을, 그리고 대부분의 인류가 저런 방식으로 사멸했을 것임을. A의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운명. 그래 운명이다. 페인트를 개발한 사람도 이런 사태 예상 못했겠지. 아주 초월적인 무언가가 이제 인간종을 실증낸 것만 같은 아주 깨끗한 형태의 종말. 자연의 순리라는 말에 저토록 어울리지 않고 또 어울리는 모습이 또 있을까.

그러나 또 신기한 일이다. 당장 죽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몇번이나 식량을 구하고 또 그 냄새와 마주하고 나면 언젠가 나도 좀비가 되고 저렇게 변해서 사라지겠지만 그래도 당장은 싫다. 마트에서 구해온 육포를 씹고 물에 불려 목 뒤로 넘기면서 새삼스럽게 삶에대한 의지가 불타는 게 느껴졌다. 어찌됬든 살고, 또 살아서 나 말고 다른 생존자를 만나고 싶다. 나처럼 병의 원인을 알아내 대피해있는 사람들과 만나서 죽을때까지 죽지않고 살고싶다. 그날부터 하루에 걷는 거리가 길어졌다.

지나온 마을의 읍사무소를 뒤질때 찾아본 관공서 지도에는 여기서 가장 가까운 방공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하루이틀 걸어서 도착할만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카트렉은 바퀴가 닳아 거칠게 드륵드륵 소리를 내었지만 이젠 별 상관없다. 느릿하다 못해 거의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아보인다. 내 주변에 아주 천천히 몰려드는 좀비들에게 이젠 인사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제는 아예 스마트폰 하나를 켜서 음악도 틀었다. 소유자의 취향이 다소 독특했는지 클래식이나 재즈따위의 음악이 나왔지만 그정도야 상관 없다.

내 자신의 목소리도 들은지 오래된 상황에 음악의 종류를 가릴리가 없지. 첼로의 묵직한 현음이 끝없이 울려퍼지고 느릿한 움직임의 좀비들도 끝없이 내게 몰려온다. 온 세상이 천천히 움직이는데 나 혼자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기분이다. 휘파람으로 바이올린 음계를 따라부르며 걸었다. 덜그럭 덜그럭 하는 카트렉을 끌고 휘파람을 불며 국도를 걸어나가는 기분은 상쾌했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런 일, 이런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나. 음식도 그렇지. 생물류는 못먹지만 어쨌든 평소같으면 백원 이백원이 아까워 고르지 못했을 식품도 마음껏 골라 실었다.

식량도 아끼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나 이외의 사람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주 가끔은 누군가가 뒤진듯한 매대도 있었지만 소리쳐 불러도 나타나는건 좀비 뿐이었다. 그래,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유랑하고 살려나.

그리고 오늘에서야, 챙겨온 지도의 가장 가까운 대피소가 위치한 도시가 보였다. 수건에 물을 적셔 종아리를 마사지하며 다시한번 위치를 확인한다. 이제 어떻게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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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품 : 의류 두벌, 양말 두켤레, 식료품 1인기준 2일치, 설탕/소금 0.5kg, 후추 2/3통, 각종 생활용품 약간, 과도 및 포크수저 한자루, 알콜 소독젤(5/9), 비상약품 일습, 각종 부식류 2끼분, 물 1.5L 두통.

1. 바로 대피소로 가본다. 분명 먹을거나 침구류도 구비 되어있다고 하니 한동안 머무르며 재정비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겠어.

2. 일단 읍내를 좀 둘러볼까... 먹을 것도 좀 충당하고 생존자도 찾아보자. 혼자 걷는길은 너무 외로워.

3. 지방치곤 제법 눈에 띄게 큰 병원이 있네? 혹시 모르니까 찾아가 볼까.쓸만한 약들이라도 좀 챙기면... 지금까지야 건강하지만 감기라도 걸리면 힘들어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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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세가지 선택지 중 한가지는 데드 엔딩, 한가지는 배드 엔딩, 나머지 하나는 연명루트로 이어집니다. 본래 좀비 발생의 원인을 찾는 루트는 지난번에 끊어졌고, 현재는 주인공이 어느 방향으로 끝을 맞이하느냐가 남았네요. 본래는 조금 즉흥적으로 썼었는데 이제쯤오니 대강 가닥이 잡히는군요!

A의 이야기는 J를 만나기 전인가요, 후인가요? 어쩌면 이 시즌1이 끝나면 A의 이야기를 쓸 것 같긴 합니다.

정말 많은 성원을 받으며 글을 쓰고 있어 행복합니다. 많은 참여와 추천에 늘 감사드립니다. 오탈자나 이상한 부분은 바로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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