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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라드 애담
게시물ID : dungeon_6308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Fathance
추천 : 1
조회수 : 22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8/05 18: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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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여름철 한낮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었다. 하늘 높이 뜬 태양은 이글거리며 열기를 뿜어댔고, 사람들은 위에서 내리쬐는 열과 땅에서 올라오는 열을 동시에 받으며 마치 녹아내릴 듯 곧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다녔다.

 아예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으로 놀러 가는 사람도 있었다. 바다, 산, 계곡, 그 외 이런저런 시원한 곳으로 인파가 몰리고 있었다.

 슈시아의 달빛 주점 역시 더위를 피하기에 제법 괜찮은 장소였는지 사람이 꽤 몰리고 있었다. 때아닌 호황에 슈시아 역시 손님들의 요구에 맞춰 바삐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북적이는 달빛 주점에서 한가로이 더위를 피하는 이들이 있었다.

 평소였으면 더위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늘 그랬듯 소문들을 늘어놓으며 놀았겠지만, 오늘은 축 처져있는 것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도 기운이 빠질 법한 꼴들을 보이고 있었다.

 항상 먼저 운을 떼던 지니위즈가 없는 것도 이유였지만, 일단은 입을 떼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무더위가 그들이 조용히 늘어져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아아, 더워어."

 "덥다고 하지 마라. 더 더워진다. 더우면 얼음물이나 마시던가"

 "얼음물도 그다지…효과가 별로지 않나요?"


 그들이 있는 곳이 달빛 주점이었음에도 상 위에 있는 것은 술잔이 아닌 물방울이 흘러내릴 정도로 잔뜩 맺힌 얼음물이 담긴 잔이었다. 그 잔에 담긴 얼음도 이미 반 정도는 녹아 없어진 상태였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더 더워."

 "아, 덥다고 하지 말라고. 귓구녕 막혔냐?"

 "괜히 화내지 말고…다른 시원한 거라도 주문할까요?"

 "덥다고 일이고 뭐고 다 내팽개쳐서 돈 없잖아. 아저씨도, 나도, 얘도, 그년도."

 "…솔직히 쫓겨나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죠."


 이모탈은 그대로 상에 고개를 처박으며 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더 버티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축 늘어져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들의 상태를 조금 환기시켜주는 목소리가 그들의 정신을 깨우며 들려왔다.


 "저기, 모두 다 죽은 거야?"


 이런 더위 속에서도 꿋꿋하게 가면을 쓴 채 다니는 전사도였다. 그는 약간의 걱정이 담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하나씩 (전사도가 사준) 샤베트를 떠먹으며 더위를 조금씩 물리치고 있었다.


 "아하하하, 더워서 죽어가던 거였어? 너희들 다 더위에 약하구나?"

 "아니, 이 정도 더위면 죄다 죽어가. 멀쩡한 건 얼음 쓰는, 그, 빙결사 정도지."

 "그래서,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아아, 싫어. 싫어, 싫어. 움직이기 싫어. 더울 땐 가만히 있는 게 최고야."


 그의 물음에 조금은 살았다는 표정을 짓던 레이븐이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 정도냐는 반문에 레이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희들 너무 조용해서 보는 맛이 없는 걸.

 "…이야기가 저희 파티의 정체성이긴 한데…설마 너무 조용해서 건너온 건가요?"

 "아니, 자리 없어서."


 전사도가 가리키는 곳은 그가 전세라도 낸 양 매일같이 눌러앉아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몇몇 사람이 둘러앉아 시원한 먹거리를 늘어놓은 채 더위를 나는 자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같이 시간 좀 보내자. 내가 시원한 것도 사줬잖아. 응? 밖으로 나가는 건 곧 죽는대도 싫을테니까…실내에서도 할 수 있는…그래, 이야기나 하자. 너희가 만날 하는 거잖아."

 "이야기 좋죠. 덕분에 조금 기운도 났으니까요."

 "더우니까 괴담 어때? 괴담 하자, 괴담. 전사형님은 어때?"

 "괴담은 아는 게 없는 걸?"

 "어, 너도 하게? 뭐, 그럼 처음 끊어봐. 거기 맞춰서 얘기하면 되니까."


 검신의 말에 전사도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잠시 생각에 빠졌다. 무슨 얘기를 할지 정하는 모양이었다.


——


 으음…주제가 없다니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네. 주제는 뭐가 되도 상관없는 거지? 응, 알겠어. 그럼…그래, 생각났다.

 내가 달빛 주점을 거점으로 삼고 움직이잖아. 여기가 대전이로 가게 상황이 안 좋아졌다지만, 그래도 오는 사람은 오는데고. 그러다 보니까 너희들 같은 이야기꾼들도 만나고, 제법 많은 사람을 본다는 말이지. 사람들 성향이 다양하니까 보다 보면 재밌어.

 음, 예를 들면…최근에는 대련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데, 적당히 하는 말도 다 믿어버려서 엄청 재밌어. '곧 있으면 바쁠 예정이야, 미안해.' 라고 하면 되게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가버리고…그런 식이야. 재밌는 사람이지?

 어떤 사람은 혼자 오면 엄청 조용한데, 동료랑 같이 오기만 하면 온갖 거짓말 같은 말을 늘어놓고 그래. 여러 말도 안 될법한 일들을 직접 겪었다고. 그래서 허풍선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야. 그 사람 얘기도 재밌어.


 음, 하려던 얘기가 이게 아닌데.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자주 보는데, 그중 제법 인상 깊었던 커플이 있어. …커플이라서 기억하는 그런 건 아냐. 난 내 거든, 남의 거든 일단 연애 자체에 별로 관심 없으니까.

 왜 인상이 깊었냐고? 음…성직자와 암살자 커플인 것도 인상깊었지만…보고있자니 재밌어서? 그게, 여자가 되게 열심히 들러붙는데 남자는 일정 선 이상은 넘기지 않으려고 했었거든. 그럼 여자는 툴툴대면서 거기에 맞춰줬고. 그 툴툴대는 게 재밌었어. 전혀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래서 귀여운 느낌?

 그날은 좀 한가하기도 해서 슈시아 씨의 일을 돕고 있었던 참이었거든. 그래서 알바생인 척 말 좀 붙여봤었어. 일단은 둘이 사귀냐고 돌직구부터 날려줬고. 여자는 엄청 당황하면서 얼굴도 붉히고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의외로 남자가 즉답으로 그렇다고 하더라고.

 하하, 그때 그 여자 표정을 못 잊겠어. 벙쪄서 남자한테 몇 번이고 묻는데 남자는 아무 말도 안 한 척 고개 돌리고. 계속 그러니까 팔꿈치로 때리더라. …엄청 아파 보였어.


 그다음에는 둘이 어쩌다 만났는지 물어봤는데, 꼭 신이 만나라고 이어준 것처럼 우연히 만나고, 헤어져도 또 만나고 그랬대. 그런데 그렇게 만날 때마다 상황이 급박했다던데, 그럴 때마다 남자가 여자를 도와주고 그랬었다고 했어.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남자는 여자에게 잘 대해줬대. 걱정도 해주고, 무사하길 기원하고, 거기까진 뭐, 남들도 다 해주는 정도인데, 그 남자는 그 이상의 일들도 군말 없이, 아주 적극적으로 여자를 도왔었대.

 예를 들면, 도피 수단을 제안해주거나, 피난처를 제안한다거나, 그런 것들. 아, 그때 그 여자는 무슨 암살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나 봐.


 아무튼, 여자는 대가 없이 주어지는 그 선의에 조금씩 끌리고 있었다고, 머뭇거리면서 말했어. 그러다가 무슨 죽을 위기가 있었다는데 그것도 남자의 도움으로 살아나고. 이걸 말할 땐 얼굴이 완전히 붉어져서 흑요정이 아니라 적요정인줄 알았다니까? 하하하.

 남자는, 제 얘기는 거의 안 했었어. 그래도 확실히 남자도 여자를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그 왜,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빛 있잖아. 그런 눈빛으로 여자를 보고 있었거든. 그래서 '아, 그냥 표현이 적을뿐이구나 하고 생각했어.


 그 둘은 지금도 열심히 연애하면서 아라드를 돌아다니겠지? 굉장히 평화롭고 소소하고 달달하게. 사랑이 넘쳐 보였으니까.


——


 "…그래서 주제가 뭐야? 인상 깊었던 사람?"


 전사도의 이야기가 끝나고 가장 먼저 들린 말은 질문이었다.


 "음…사랑이 넘치는 커플얘기니까…사랑얘기?"

 "사랑 좋지! 관능적인 분위기와 순수한 분위기를 오가는 그런 거 좋은데. 아예 찐득한 쪽으로 넘어가도 좋지만."

 "으, 난 그런 쪽으로 아는 게 적어서…그러니까 내 차례는 그냥 넘어가는…뭐야?"


 검신은 그 자리에서 은근슬쩍 빠지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렇게 놔둘 다른 이들이 아니었다. 말도 없이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들에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려대던 검신은 곧 한숨을 내쉬었다.


——


 알았어, 알았어. 하면 되잖아. 뭔 눈깔로 압박을 주고 그래? …뭐, 나라도 그랬을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난 이런 얘기는 아는 거 한 개도 없으니까 기대는 하지 마.

 허, 그래서…흠…아, 최근에 봤던 재밌는 커플? 뭐 그런 게 있기는 있었다.


 내가 요전에 진짜 팝콘이라도 뜯으면서 봐도 좋은 일을 매일같이 봤었거든? 언더풋 광장 쪽에서 봤던 건데, 거기서 어떤 남자가 여자한테 당당하게 고백을 한 거야. 주변 사람들은 다 남자답다고 호응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여자는 그 뜬금없는 고백에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히죽대면서 바로 승낙했고. 좀 시끌벅적했으니까 확실히 기억해.


 그 다음날부터 그 둘은 매일같이 그 고백하고 받았던 그 자리에서 만났어. 어떻게 아냐고? 그거 봤을 때 그 주변에 일이 있었거든. 그래서 매일같이 그쪽을 지나야 했는데 내가 그 앞을 지나는 시간쯤에 그 둘이 만나고 있더라고.

 처음엔 뭐 '그 둘이 자주 보이네'하고 넘겼는데, 자세히 보니까 둘이 매일같이 뭔갈 주고받더라고. 그래서 멀리서 구경이나 좀 해봤지.


 거기서 남자가 주는 선물은, 소소하더라도 정성스레 포장된 그런 선물이었어. 대충 눈에 보이던 것들은…들꽃을 꺾어 만든 꽃다발, 소박하게 보이는, 그, 거시기, 머리띠 같은 것들? 작은 건 거리상 잘 안 보였는데, 포장만큼은 진짜 끝내주게 정성스럽더라.

 여기서 여자가 주는 선물들이 골 때리는데, 일단 상자는 그냥 상자야. 종이상자를 적당히 리본으로 묶은 거. 남자가 한 포장이랑은 비교가 안 될 만큼 초라했어. 그럼 그 안의 선물은 뭐였을 것 같아?

 …진짜 골 때리는데, 선물하면 쉽게 떠오르는 그런 것들이 아냐.


 상자가 통째로 흙더미로 꽉꽉 들어차있다거나. 돌멩이, 뭐, 겉모습이 이쁘면 말이라도 안 하지. 진짜 대충 주워온 것으로 보이는 마구잡이로 생긴 것들. 잡초 뜯어온 거, 나뭇잎 뜯어온 거, 떨어진 나뭇잎 주워온 거, 나뭇가지 꺾은 거, 나무껍질 벗겨온 거.

 야, 이게 선물이냐? 뭐, 내가 그 선물을 받는 입장은 아니니까 멀찍이서 구경만 했지만. 그래도 내가 그 선물 받는 입장이었으면 당장 여자 면상에 집어던졌겠다.

 언제는 상자가 요동을 친 적도 있었…하…. 아니, 상자가 요동을 치는데 그 안에 뭐가 있을지 상상이 가? 그게, 상자를 열자마자 토끼 한 마리가 뛰쳐나가서 쌩하고 도망을 치더라니까? 진짜 '미친'하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오더라.

 또 몇 번은 남자가 기겁을 하면서 상자를 떨어뜨린 적이 있었어. 진짜…하, 그년은 정신 나간 년일 거야. 어떻게 남한테 주는 선물상자에 동물 시체나 벌레 같은 걸 넣어서 줄 수 있냐? 남자가 이게 뭐냐고 물으면 발랄하게 '주운거야!' 라고 하는데…미친….

 진짜 남자가 보살인 거지. 나 같으면 당장 집어던지고 헤어지자고 했을 텐데. 아니면 그 남자 취향이 그런 정신 나간 년이었거나.


 뭐, 그래도 남자 인내심이 무한인 건 아니더라. 당연하겠지. 그딴 뭣 같은 선물 계속 받으면 그 어떤 성자, 성녀도 쌍소리 내뱉으면서 뺨따구에 더킹 스트레이트를 꽂을 테니까.

 하여튼, 그날도 어김없이 선물을 주고받는데 남자가 진짜 우울한 표정으로 뭐라 뭐라 하더라. 뭐, '자기가 좋아서 고백을 들어준 게 맞나요?' 뭐 그런 말이었나? 대충 그랬을 거다.

 여자는 답이 없었고, 그날의 선물은…뭐더라? 그, 그래, 지푸라기. 지푸라기였어. 선물상자를 열고 진짜 상자째 힘없이 떨어뜨렸거든. 그리고 남자는 울 거 같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돌아섰어.

 그런데 여자가 대뜸 그 남자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더라. 그리고 뭐, 그게 진짜 선물? 뭐 그렇게 말하더라. 진짜 얼척없게. 근데 남자는 거기에 얼굴이 또 환해지고. 참나….


 그 둘이 지금도 사귀냐고? 아니, 여자가 차버려서 더 이상 안 만나.


——


 "진짜 내 살다 살다 그런 정신 나간 년은 처음 봤었다. 그래도 결말은 감동적인 해피엔딩이지."


 검신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진짜 이상한 여자네. 이뻤어?"

 "옷차림이 이상하긴 했어도 이쁘긴 했는데, 왜? 사귀게?"

 "…아니, 그런 사람은 아무래도…."

 "아무리 행동이 이상해도 그런 식으로 남에 대해 말하는 건 안 좋은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아, 그, 미안."


 이모탈의 조곤조곤한 타박에 머쓱해진 듯 뒤통수를 긁적이던 검신은 얼른 다음 차례를 찾았다. 그 말에 레이븐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나 저번에 제국 쪽에 갔다가 끝내주는 얘기를 들었거든? …이것도 사랑 얘기겠지, 뭐."

 "커플 얘기가 아니야?"

 "사랑이 꼭 커플이어야만 성립하는 건 아니잖아."


 레이븐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내쉬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귀족 이름은 모르지만, 아무튼 귀족 사병이라는 사람이 있어. 제 말로는 대장이랬나? 그랬거든? 그리고 그 사람을 죽이려 드는 여자가 있어. 그 둘이 싸웠다 하면 서로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듯이 싸우기 시작한대. 그리고 그 싸움은 둘이 같은 곳에 큰 상처를 입으면서 끝난대."


 레이븐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느릿느릿 담배를 빨아들였다.


 "…야, 설마 그게 끝이냐?"

 "저, 주제는 사랑이잖아요."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엷게 미소를 지은 레이븐은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


 사랑 얘기가 아니라고 보채지는 마. 이건 아주 확실하게 사랑 얘기거든. 뭐, 너나 전사형님이 했던 것 같은 건 아니지만.


 이 얘기에 등장하는 남자는, 마창사야. 그래, 그 인권유린의 끝자락을 달린다는 소문의 그거. 그 소문이 진짜라면 귀족을 찢어서 죽이고 싶겠지? 그 사람도 그랬대. 당장에 다 태워 없애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어서 하루하루 죽어가는 듯한 기분으로 살고 있었대.

 그러다가 어떤 여자를 만난 거야. 그 여자도 그 사람만큼 제국을 찢고 태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대. 그 여자는 꼭 불과 같은 사람이었다는데 설명을 들으니까 알겠더라.

 대충 말하자면, 앞뒤 안 가리고 행동하는 과격함에 제국에 관련된 거라면 뭐든 일단 덤비고 보는 끝을 모르는 복수심, 그리고 그런 행동력을 만들어주는 열정. 그야말로 불꽃 그 자체.

 남자는 그 여자와 함께 행동하면서 제국에 반하는 일들을 저질렀대. 그러니까…몇 년? 2, 3년? 대충 그만큼 함께 있었댔어.


 남자랑 여자가 오래 같이 지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가거나, 성별을 무시하고 그냥 친해지거나 그렇게 되잖아. 여기서 남자는 마음이 가게 되는 쪽이었어.

 맨 처음엔 여자의 지칠 줄 모르는 끊임없는 열정에 관심이 갔대. 그러다가 그걸 존경하게 되었고, 부러워하게 되었대. 동경하고. 그러다 보니 계속 눈길이 가고, 좋아지고, 또 눈길이 가고…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마음속 깊숙이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있었대.

 남자는 여자의 끊임없는 열정이 자기에게 향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는데, 그 바람이 너무 부질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괴로웠대. 그게, 아무리 바라도 그 감정이 절대 자기에게 향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서…라고 했어.

 그래서, 남자가 어떻게 했게? 고백? 그러고 보니 그걸 안 물어봤네. 왜 고백을 안 했을까? 거절당하기 무서워서 그랬나? 그건 모르겠네. 하여튼, 고백은 아냐.


 …남자는 여자를 버렸어. 작별 인사를 건네고 곧장 여자의 곁을 떠났대. 다시 보게 될 때까지 못 본다는 것보다,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제 감정을 이해받지 못한다는 게 더 슬퍼서 떠난 거랬어.

 그렇게 여자 곁을 떠난 남자가 향한 곳은, 제국의 투기장이었대. 투기장에서 자유를 찾아 떠난 사람이 자기가 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 거야.

 남자는 그곳에서 이름조차 모르는 몬스터를, 돈이나 명예를 노리고 몰려온 사람들을, 그리고 인권유린 지옥에서 빠져나오길 바라던 마창사들을, 죽였대. 가장 눈에 띄게, 잔인하게, 화려하게.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욱더 커지도록,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귀족의 눈에 띄기 위해. 결과적으로 귀족의 밑에 들어가기 위해.


 우월할 정도로 강한 힘을 과시한 뒤, 당당하게 승리를 거머쥔 남자에게 수많은 제안이 몰려들었대. 자신의 사병으로 들어오라고, 좋게 대우해주겠다고.

 남자는 그 모든 손 중에서 딱 하나의 손을 골랐어. 자신이 아는 한 가장 탐욕스러운 귀족의 손을. 언젠가 여자가 그 귀족을 치러 오는 것만을 기대하면서.


 그래서 그 둘이 다시 만났냐고? 시작하기 전에 말했잖아. 남자랑 여자가 치열하게 싸워서, 같은 곳에 큰 상처를 가진 채 끝난다고. 그 사람 말에 따르면 일부러 같은 곳에 상처를 입히는 거라고 하던데…뭐, 그 사람 나름의 '사랑'의 증거 아니겠어?


——


 레이븐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이어진 것은 불만이 들어찬 말였다.


 "야, 그게 어디가 사랑 얘기냐?

 "사랑이 풋풋한 사랑, 기분 좋은 사랑, 뭐 그런 것만 있는 건 아니잖아? 이런 미친 사랑도 일단은 사랑이지! 그치, 아저씨?" 

 "네? 아…그러니까…그, 올바르진 않다고…생각해요."


 레이븐은 그러냐고 말하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꺼져가는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손바람으로 흩어내던 전사도는 생각나는 것이 있었는지 말을 꺼냈다.


 "사랑은 확실히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내가 건너건너 들은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너무 좋아서 죽여서라도 가지고 싶어 했대. 

 "거 참 토나오는 녀석이네. 그런 거랑은 평생토록 얽히기 싫다."

 "하하,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니까. 그래서 다음은 당신이었지? 아, 샤베트 또 사줄까?"


 전사도는 분명히 이모탈을 보며 물었지만, 매우 강한 긍정의 답들은 다른 쪽에서 튀어나왔다. 물론 질문을 받은 당사자의 답은 괜찮다는 정중한 사양이었다.


 "그럼 주문하고 올 테니까 먼저 시작하고 있어. 금방 올게."


——


 …음, 뭘 해야 할까요? …그게, 사실 아직 못 정했거든요. 죄송해요. 금방 생각할게요.

 이건 원래 할 얘기랑은 상관없지만, 전 사실 이런 얘기를 좋아해요. 사랑 얘기는 일단 훈훈한 것을 밑에 깔고 들어가잖아요. …아까 그 얘기는 전혀 훈훈하지 않았지만요. 그래도 이야기는 좋았다고 생각해요.

 …지금 기다리는 거냐고요? 어…조금은요? 처음부터 못 들으면 찝찝하잖아요. 아, 오셨네요.


 그러니까, 이제 할 이야기를 정했어요. 모험가를 동경하던 어느 혈기 넘치는 귀족 청년의 이야기에요.

 청년은 늘 모험가를 꿈꿨지만, 그 청년의 아버지는 모험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청년은 아버지 몰래 다른 모험가들을 후원하는 정도로만 대리만족을 하며 지냈대요.

 그렇게 날만이 지나는데, 어느덧 혼사를 치러야 할 때가 와버린 거였어요. 하지만 청년은 그걸 원하지 않았어요. 가문에 완전히 얽매일 것만 같아서, 그렇게 되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자유로운 모험가가 되어보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청년은, 약간의 돈과 검술 수업 때 쓰는 검을 들고 도망쳤다고 해요.


 급히 마차를 타고 다른 지역에 도착한 청년은 가명을 정한 뒤 새내기 모험가가 된 기분을 만끽했어요. 기껏 자유로운 모험가가 된 만큼 한껏 들떠있던 청년은 그만 큰 실수를 하고 말았어요. 제 역량에 맞지도 않는 일을 첫 의뢰로 골라버린 거예요.

 그 뒤는 눈에 훤하죠? 아주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위험에, 그것도 죽을 위험에 처한 청년은 이제 죽었구나 싶었을 거예요. 다행히 지나가던 모험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나긴 했지만요.


 그 이후, 청년은 자신을 구해준 모험가를 쫓아다녔어요. 그 사람은 청년이 그토록 동경하던 모험가, 그것도 강한 모험가였고, 무엇보다 아름다웠거든요. 아마 그것도 좀 큰 이유였겠죠.

 분명 청년의 그런 행동이 모험가에게 있어서 폐가 되었을 덴데, 모험가는 그런 청년을 매몰차게 내치지는 않았대요. 청년에게 있어선 다행인 일이었죠.

 오히려 모험가는 청년에게 모험가로서의 마음가짐, 해도 괜찮은 일, 하면 좋은 일, 해서는 안 되는 일 등을 가르쳐주었어요. 청년은 그 말들을 마음에 새기며 모험가로서의 자신을 키워나갔어요.

 그러면서 마음에 간직했던 동경은 시간이 지나면서…어떻게 되었을지는 눈에 선하죠?


 하지만 청년은 가출한 귀족 자제잖아요. 그게 아무리 모험가로서의 경력이 쌓인다고 해도 절대 바뀌지 않는 사실이잖아요. 즉, 그런 도피가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청년의 가출은 청년을 찾으러 온 아버지의 시종들에 의해 끝나게 되었어요. 그렇게 되면 아무리 돌아가기 싫어도 돌아갈 수밖에 없잖아요. 청년은 이젠 모험가가 아니라는 아쉬운 마음보단 자신을 이끌어준 모험가를 못 본다는 게 더 슬펐어요. 그래서 청년은 모험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어요.

 강함에 대한 존경을, 자유로움에 대한 동경을,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의 모든 진심을.


 …아무리 그래도 신분의 벽은 뛰어넘기 힘든 거죠. 그 고백은 모험가가 아주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해요. 그래도 둘은 친한 친구 사이로 남아 간간이 만나곤 한다고 해요.

 이 정도면 충분히 해피엔딩이네요.


——


 "나같으면 바로 승낙했을 텐데. 아아, 그랬으면 돈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질 텐데.


 레이븐은 불을 댕기지 않은 담배를 잘근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퍽 아쉽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너 같은 폐암열차를 누가 좋아하냐?"

 "적어도 너보단 인기 많거든? 봐봐! 잘생기고, 훤칠하고, 멋지잖아. 안 그래?"


 그러한 레이븐의 자아도취성 발언에 대한 답은 어색한 침묵과 한 쌍의 경멸의 눈길이었다.


 "와, 얼굴이 두꺼운 게 꼭 철판을 깐 거 같아. …하하하, 농담이야!"

 "아니, 전사형님, 갑자기 나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졌어. 그러지 마."

 "아냐, 네 말이 맞아. 객관적으로 봤을 때 넌 충분히 잘생기고, 훤칠하고, 멋져. 진짜야."

 "아니, 하지 말래도."


 한 여름, 달빛 주점 안 작은 테이블. 더위는 아직도 물러갈 줄을 몰랐지만, 더위도 잠시 잊을 즐거운 일들이 소소히 퍼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흔한 아라드의 글 쓰는 속도가 느린 글쟁이입니다.


아라드 이야기 시리즈의 아라드 애담, 사랑 이야기입니다.

...사전에 있는 말은 연애담이지만...

연애 이야기보단 사랑 이야기가 더 쓸 거리가 많잖아요

...참고로 전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가 취향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어떤 이야기는 아라드 팬픽 중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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