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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신의 한 수
게시물ID : panic_902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묻어가자
추천 : 15
조회수 : 1928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6/08/23 07: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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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아...! 정말 묘수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생각해낼 수 없는 수에요"
"정말... 제가 프로 바둑기사로 20년 넘게 살아왔지만 이런 대국은 처음입니다."
 
바둑 해설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바둑 세계랭킹 1위의 정영채가 컴퓨터를 상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컴퓨터의 이름은 핸드 오브 갓. 줄여서 호그[HOG]. 신이 바둑을 두고 있다는 뜻의 아주 오만한 이름이다.
하지만 근거 없는 오만은 아니었다.
호그가 개발된 때부터 1년 동안 50번의 대국이 있었는데 호그는 세계 최정상의 바둑 기사를 상대로 무패행진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아직 인간의 잠재력에 대해 포기하지는 않았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천재, 아니 그 어느 역사나 그 어느 미래를 통틀더라도 단연 최고의 바둑기사라고 말할 수 있는
정영채라는 인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의 바둑은 이미 인간의 수준을 넘어섰다.
컨디션이 나쁠 때는 가끔 패하기도 했지만, 그의 승률은 전무후무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영채의 명성은 다른 데 있었다. 그는 정석을 벗어난 이상한 수를 두곤 했는데 그것이 몇 수 후에 보면 엄청난 묘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 어떤 바둑기사라도 정영채의 수를 대면하게 되면 동요하고 만다.
어떤 기사는 굳게 다문 입을 쩍 벌리며 놀라는가 하면
어떤 바둑 장인은 그 수를 보며 너무 좋아서 어린아이처럼 방방 들썩여 웃기도 하였다.
정영채라는 걸출한 천재로 인해 바둑 시장은 보기 드문 순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호그가 내로라하는 바둑 고수들을 처참하게 꺾을 때도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정영채가 아직 호그와 대국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호그와 정영채의 다섯 번째 대국이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까지 스코어 4-0.
사람들의 예상과 다르게 정영채는 호그에게 손도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러나 다섯 번째 대국은 달랐다. 정영채는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만족스럽고 아름다운 수를 생각해 낸 것이다.
어찌나 만족스러운가 하면 돌을 바둑판에 놓았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아 찌릿찌릿할 정도의 그런 수였다.
자신의 인생, 영혼마저 담겨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의 수...
 
"대단합니다!! 드디어... 드디어 호그가 무너지는 걸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제가 감정이 북받쳐서 목소리가 잠길 정도인데요"
해설자는 이미 감정에 휩싸인 상태였다. 해설자이기에 그럴 수 있었다.
정영채는 아직 그럴 수 없었다. 4번의 패배 끝에 간신히 잡은 승기. 절대 안일한 기분으로 대국에 임할 수는 없다.
철저히 이겨 준다. 그 어떤 자비도 없을 것이다.
 
 
...
...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대국에서 왜 호그에게 졌는지 도무지 분석할 수 없었다.
돌아보면 다른 49개의 대국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대국.
그 엄청난 수를 두고서도 왜 졌는지를 기존의 바둑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영채는 혼자 골몰하며 칩거생활을 계속하였다.
어떤 때에는 미친 것처럼 그 수를 복기하면서도, 몇 주 동안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말 그대로 폐인이었다. 그런 허송세월하는 동안 인공지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도 인공지능 발전에 공로가 있었다. 정영채의 패배 이후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믿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믿음은 자본으로 이어진다. 상당한 투자가 A.I 산업으로 쏠렸고 이것이 압도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을 앞세워 모든 정보를 모았고 그 정보들은 재조합되어 미래를 예측하였다. 예측이 틀리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사람들은 잠시 착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태초부터 자연이란 존재에 두려움만 느끼던 인간이 드디어 도달했다고.
신의 영역이란 것에.
그런데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오만함을 어떻게 생각할까. 싫증난 모래성을 흩트리듯이 인간이 쌓은 바벨탑을 사뿐히 눕혀놓지 않을까.
아이같은 천진난만함으로 말이다.
 
 
 
 
 
...
...
 
 
 
정영채는 평소처럼 누웠다. 자신의 목에 맞는 베개를 베고. 더운 여름 밤이지만 습관처럼 이불로 배는 꼭 덮었다.
누워서 보는 창너머 별들이 마치 반짝이는 바둑알 같았다. 그리고 별을 품은 우주는 울렁이는 바둑판 같았고.
그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울렁거리는 우주를 생각하며... 영채는 그 후로 꿈을 꿨지만 기억을 할 수는 없었다.
단지 어떤 울렁이는 느낌만이 내장 어딘가를 맴돌 뿐.
정신을 차리니 신전과도 같은 이상한 공간에 자신이 서 있었다. 바닥은 가로 세로로 정확히 금이 그어져 있어서 마치 바둑판 같았다.
영채는 단지 꿈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정말 미쳐가는가 보군...'
 
"들어라"
하늘에서 갑자기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누구?"
 
"나는 너를 창조한 신이다."
 
"...아?"
 
"너는 죄를 지어 여기 오게 되었다."
 
"죄라니요?"
 
"너는 뛰어난 능력을 갖췄음에도 인간이 만든 도구에 패하였다."
무거운 연기처럼 목소리가 영채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도구? 호그를 말하는 겁니까?"
 
"너는 지금부터 호그와 싸워 완벽히 이길 때까지 이곳에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증명해라. 내가 만든 도구가, 인간의 도구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영채가 당황한 사이 주변을 짓누르는 공기가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신이 사라진 것이다.
다만 수천 개의 CPU가 연결된 호그가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실제 영채의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규모.
 
"아니... 패배한 게 죄라니? 무슨 억지를..."
 
영채는 억울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일단 꿈이라고 생각했고, 만에 하나 꿈이 아니라도 호그를 이기기만 한다면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그는 그래 봤자 자기보다 한 수나 두 수 앞.
오히려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든 뭐든 간에 호그와 다시 겨뤄서 허점을 찾게 된다면
자신이 왜 다섯 번째 대국에서 졌는지 깨닫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신이 사라져버린 하늘을 향해 더 따지거나 고함치지도 않았다.
그냥 이기면 되니까.
 
 
 
 
...
 
 
 
 
"젠장!!!! 젠장!!!!!!!!! 나가게 해줘!!!!! 나가게 해 달란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10년? 25년? 어쩌면 몇 달 밖에 안됐을지도 모르겠다.
머리카락만은 계속 자랐다. 가위가 있기에 스스로 이발을 하였다. 누가 보지도 않을 건데 처음엔 단정하게 자르려 하였다.
지금은 아무렇게나 듬성듬성 자른다. 등 뒤에 머리카락이 수북이 있다. 머리카락의 부피로 지난 시간을 알 수 있을지도...
그렇지만 머리카락이 현실과 같은 속도로 자라는지 알 길이 없다.
대국은 1200번대 까지만 세고는 그만 세었다.
나는 호그가 조금 뛰어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국을 하면 할수록 호그의 무서움을 알게 된다.
어째서 지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처참한 패배.
미쳐버릴 것 같다. 호그를 이길 수 없으리란 사실. 그걸 인정했을 때 여기 영원히 갇히게 된 사실도 인정해야만 했다.
죽지도 않는다. 배가 고프지도 않고 잠도 오지 않는다.
정신이 멀쩡하다. 아직도 두뇌 회전이 너무 빠르다. "최고의 컨디션"... 신이 내려준 농담 같은 저주였다.
 
 
 
 
 
 
 
 
 
 
...
...
 
 
 
 
 
 
 
 
 
 
 
 
 
 
 
 
"3...a...k....17...c...dd.....26........끄욱...."
 
 
 
 
 
 
 
 
 
 
 
 
내가 지금 뭘 그리고 있는 거지?  내가 뭘 말하고 있지?
 
 
 
 
 
 
 
 
 
 
 
 
 
아 그래... 바둑을 푸는 공식을 만들었지... 저 문자와 숫자에는 15수 앞까지 내다보는 조합들이 있어...
 
 
 
 
 
 
 
 
 
 
 
 
저 조합들을 알아내는 데 얼마나 시간을 썼더라... 내가 호그를 이겼었나?
 
 
 
 
 
 
 
 
 
 
 
 
아 ... 이겼던 것 같기도 하고 ... 내 이름이 뭐였지 ... 뭐였더라.....
 
 
 
 
 
 
 
 
 
 
 
 
 
 
 
 
 
뭐였더라...
 
 
 
 
 
 
 
 
 
 
 
 
 
 
 
 
 
 
 
뭐~~~~~였~~~~~~더~~~~~~라~~~~~~~~~~~
 
 
 
 
 
 
 
 
 
 
 
 
 
 
 
 
 
 
 
 
캌....으......우.......
k....dk..... 아.... 62.... 3.... 그래...
여기다 두자... p...p2....9.... 여기다 두면.... 호그.... 2yy.... 6.... 6&....
그렇게 나온다라 ... 크......7...***....28....81.......777....... 후.....
그렇게 나오겠지....그럴거야.... 아....... 으...
으?....으....앞이 잘 안보여.... 뭐야... 이거...... 아...머리카락.....
가위.....가위......근데.... 이상하다....분명.......3 ........a.....k......17......바로..전에.....
머리카락을......k...c...3........62.....잘라서..... .대머리로.....잘라서.....
그리곤......아직.......돌을 ....안둔거같은데......... .... k20...d07..s6....dhh.t..2..1.1.78......a..z...........u.j...........으우.....
 
 
 
 
 
 
...
 
....
 
 
 
 
 
안보여............
 
 
 
 
 
 
 
 
 
 
 
 
 
 
 
 
 
 
 
 
 
 
 
 
 
 
 
 
 
....
....
 
 
 
 
 
 
 
 
 
 
 
 
 
 
 
 
 
 
 
 
 
 
 
 
 
 
 
 
 
 
 
 
 
...
...
 
 
 
 
 
 
 
 
 
 
 
 
 
 
 
 
 
 
 
 
 
 
 
 
 
"......*#$#%$&......"
 
 
 
 
 
 
 
 
 
 
 
 
 
 
 
 
 
 
 
 
 
 
 
 
 
 
 
 
 
 
 
 
 
 
 
 
 
 
 
 
 
 
 
 
 
 
 
 
 
 
 
 
 
 
 
 
 
목에 느껴지는 베개, 배를 살짝 덮은 이불, 팔에 닿는 순면 이불의 감촉
"음........."
상쾌하다. 난 서서히 눈을 떴다....
"음~~~ 잘 잤다...."
 
 
 
영채는 긴- 긴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어떤 꿈을 꿨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늘이 호그와의 마지막 대국이로군. 네 번은 완패였지만 이번은 이길 수 있어. 좋아...!"
영채로서는 기억이 나지 않기에 알 길이 없었다.
호그가 어떤 압도적인 패배를 경험한 후에 실력이 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공지능은 자신을 하나 더 복제하여 무한히 자신과 대결하며 실력을 늘린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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