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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문장들
게시물ID : readers_261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께소
추천 : 9
조회수 : 688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6/08/28 23: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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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있는데, 끝을 거의 볼 것 같더니 또 한 번 막혀서 혼자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네요. 그러다 오랜만에 흑역사...라기 보단 막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호기롭게 써 온 장편 몇 편을 꺼내 읽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것까지 합해서 총 네 편이에요. 첫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장편은 완전히 끝내지 못했고 두 번째 장편은 끝냈지만 어쩌다 보니 너무 자서전적인 소설이 돼서 그대로 덮어뒀고 네 번째 장편은 이제 곧 끝낼 수 있겠지요. 아마, 일이 주 안에 (제발).

아무튼, 그 장편들의 첫 문장들을 가져왔어요. 다 일인칭 형식이고 (이인칭, 삼인칭이 섞인 소설도 있지만), 다 화자가 남자예요.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소설은 첫 문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어요. 아마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의 영향이 클 거예요.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과 후안 룰포의 <페드로 파라모> 속 첫 문장을 몇 번이고 저희 앞에서 읊어 주셨던 기억이 있어요. 가끔 좋아하는 소설 첫 문장을 다시 읽어 보기도 해요.

첫 번째, <열다섯>

그 해엔 이제 모두 열다섯 살이 된다며 좋아했었지. 열다섯이었다. 어리석은 나이였다. 문란 속으로 뛰어드는 자세는 우리만의 윤리였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에 취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자신을 해치는 법을 깨쳤다. 원래 선천적으로 모두 겁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크고 나니 모두 겁쟁이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무서운 공통점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우리는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무겁기만 했다. 우리는 서로의 차이점만이 위로가 되는 사이였다. 나에겐 어머니가 없었고 홍두에게는 아버지가 없었고 연우에게는 형제가 없었다.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보다는 각자의 비워진 공간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이런 관계를 친구가 아니라면 다른 무슨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겠는가.

두 번째, <나에게 남겨진 너의 의미>

나는 태어날 때부터 욕심이 많았다. 어머니의 두 젖을 몽땅 빨아 마신 걸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태어난 지 이 년 만에, 안 그래도 작기만 한 어머니의 가슴을 말려버렸다. 몇 해 뒤 태어난 동생에게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직도 안타까워하신다. 동생이 당신의 젖을 먹고 자랐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똑똑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키라도 더 크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걱정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나는 그렇게 똑똑하지도 키가 크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이제 막 태어난 나를 보고 놀라셨다. 내 눈이 너무 커서였다. 눈이 커서 멍청하면 어떡하지 엄마? 어머니가 나의 외할머니께 걱정스레 물으셨다. 외할머니께서는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이제 막 어머니의 품에 안긴 나에겐 심각한 문제였다.
 
세 번째, <유진 그리고 유진>

나는 슬픈 결말이 싫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마다 가장 먼저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고 그곳의 마지막 문장들을 확인하고는 한다. 아주 작은 슬픔이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구름, 이방인, 생쥐, 여자, 책, 주름, 성냥개비, 비닐 봉투. 나는 그런 단어들을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어머니의 기침 소리를 견딜 수 없어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짧든 길든, 내가 여태껏 써온 모든 글의 마지막은 슬펐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나의 이 모순과 관련해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이란 어머니의 기침 소리를 세상의 그 어떠한 소음보다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그녀와 함께 살고 있다는 점이다. 미리 말하는데, 이 글 또한 슬프게 끝날 것이다.

네 번째, <사물의 방>

My father was a nonbeliever, something I knew since the day I began to use the word 'father' instead of 'dad'. My mother was different though. She believed in certain things that were visible to her, maybe only to her. I just could see it in her eyes; a kind of love that did not make me jealous, but put me in silence and awe. I'm sure father saw it as well.

아버지는 그 무엇도 믿지 않는 분이셨고 나는 이러한 사실을 '아빠'가 아닌 '아버지'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날 알아차렸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르셨다. 어머니는 당신에게 보이는 무언가를--어쩌면 당신에게만 보이는 무언가를--믿으셨다. 그녀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속엔 나의 질투심을 끓게 하는 게 아닌, 나를 침묵과 감동에 젖게 하는 어떤 사랑이 보였다. 분명 아버지도 나와 마찬가지였으리라.    

마지막은 짧네요 (실은 영어 실력이 부끄러워서). 소설을 전부 영어로 쓴 건 아니고, 어떤 부분은 한국어로 쓰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스페인어로 쓰기도 했어요 (세 번째 장편은 대부분을 영어랑 스페인어로만 썼어요). 번역 때문에 시간이 배가 든다는 점만 빼고는 글을 쓸 때 좋아서 나름 머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 쓰는 수법입니다. 아, 가끔 화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바뀌는 듯한 기분이 들어 묘하기도 해요. 아무튼, 첫 단락은 원래 한국어로 썼다가 소설을 거의 다 쓴 후에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지우고 영어로 다시 쓰게 됐어요. 쓰고 나니 전보다 훨씬 마음에 드는데, 이걸 또 어찌 한국어로 번역해야 할지 걱정이네요. 위에 있는 한국어 번역은 지금 잠깐 한 건데, 딱딱 끊어지는 게 매끄럽지 않은 것 같아요. ㅠ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중에 하나 골라서 책게에 연재라도 해볼까 합니다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예 고쳐서 다시 쓰는 게 되겠지만).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저는 다시 글 쓰러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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