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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에 태극기를 달고 싶은 날
게시물ID : gomin_16557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멘붕의시간
추천 : 0
조회수 : 131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8/29 03:37:01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방금 막 바뀐 새벽에는 늘 침대에 누워 두 시간전 방영했던 김제동의 톡투유를 본다.
쉬는 날 없이 매일 같은 시간을 일하는 엄마,아빠와 나.
일주일, 매일이 똑같은 생활에 한 주가 가고 오는걸 톡투유나 봐야지 느낄 수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노란리본을 달랑이며 이야기를 하는 제동아저씨을 보며
이런 삶 저런 삶이 있구나를 들으며 이불을 뒤척이며 잘준비를 하다가
정재찬교수님이 읽어주는 시에 눈물이 차올라 잘밤에 꺽꺽 울어버렸다.


대문에 태극기를 달고 싶은 날 
                                 - 강인한

포켓이 많이 달린 옷을 
처음 입었을 때
나는 행복했지.
포켓에 가득가득 채울 만큼의
딱지도 보물도 없으면서
그때 나는 일곱 살이었네.

서랍이 많이 달린 책상을
내 것으로 물려받았을 때
나는 행복했지.
감춰야 할 비밀도 애인도 
별로 없으면서
그때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네.

그리고 다시 십 년도 지나
방이 많은 집을 한 채
우리 집으로 처음 가졌을 때
나는 행복했지.
그 첫 번째의 집들이 날을 나는 지금도 기억해
태극기를 대문에 달고 싶을 만큼
철없이 행복했지.
그때 나는 쓸쓸히 중년을 넘고 있었네.


첫 문단을 들으니 
자기만의 보물들로 잔뜩 부푼 주머니 바지를 입고
친구들과 동네를 뛰어다니며 세상 행복했을 아빠의 어린시절이 그려졌고

둘 째 문단을 들으니
대학 막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고, 또 막 결혼해서 첫 째 아이까지 낳고
스물일곱 즈음에 대리로 승진하며 윗선배에게 물려받은 서랍많은 책상에 앉아
세상의 청사진만을 그리고 있었을 아빠의 청년시절이 그려졌다.

셋 째 문단을 들으며
서러운 일 부당한 일 다 견뎌가며 사놓은 방 많은 집 한 채를
나이 오십이 넘어서 시작한 사업의 부진으로 부동산에 되팔며
우리 아빠는 그 순간 어떤 심정이였을까 싶어 한차례 왈칵.

쓸쓸한 중년이라도 좋으니 쓸쓸하기만 했음 좋겠는데
삼 년 사이 부쩍 늘어버린 주름과 흰머리가
시커멓게 타버린 마음을 대신 보여주는 것 같아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아빠의 중년은 참 많이 외롭고 힘들겠구나 싶어
다시 한번 왈칵. 

마지막으로 엄마 아빠의 오래된 장롱이야기를 들으니
그 뒷이야기는 들리지도 않고
얼마 전 아빠의 부탁으로 내가 들고 가서 팔아버린 
엄마 아빠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귀금속들이 그리고
내가 다시 들고 온 말로 다 표현못할 감정들만 넣어둔 텅 빈 귀금속함이 떠올라
잘밤에 엉엉 울어버렸다 아주아주 엉엉.


가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치거나 고될 때면
엄마 아빠의 짐을 왜 나만 함께 나눠지고 가는건가 싶어
막연한 원망감에 혼자 짜증도 내곤 했지만

내 이십 대쯤이야 나 하고싶은대로 못살아도 
난 부모님의 육칠십 대보다는 자유롭고 찬란할 삼십 대가 있으니 
인생의 모든 고비가 오십 대에 몰아쳐오는 부모님을 위해 좀 희생하면 어때 
하며 마음을 다잡지만 
사실 말처럼 행동이 쉽지만은 않다.


며칠 전 일 끝나 널부러져 있고싶은 시간에 불러 앉혀두고선 
사업에 관한 이야기중에 서로 감정싸움하는 모습이 보기싫어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이후 데면데면해진 부모님과
아직 화해에 대한 운도 못띄워본 채 이틀이 지났다.

항상 잘도 해오던 중재자역할을
그 날따라 왜그리도 하기 싫던지
어른들 말씀하시는 자리고 어쩌고 다 집어치우고 
그저 나한테 너무들한다 싶어 그랬는데
그 화가 채 가시기도 전인데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이런 시를 알게된걸까.
난 아직 화가 나고 억울한데.

이런 감성적인 타이밍에 아빠는 왜
거실 소파에 누워 주무시는건가. 
더 짠해 보이게.


내일은 내가 먼저 웃으면서 농담이라도 던져 봐야지 싶다.
나는 엄마 아빠의 딸이니까.
엄마가 좋아하는 진한 커피도 한잔 드리고
아빠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빵과 우유도 한상 차려드리고.
이런 일은 딸이 해야지 누가 하겠어.

안그래도 바쁜 하룬데
내일은 할 일이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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