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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질문(責叱文) / 부제: 오유에 글 쓰려 앉았는데...
게시물ID : readers_263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스파게티조아
추천 : 4
조회수 : 37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9/14 0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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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전략-

 그리하여 산중 호군이 날랜 바람처럼 와 앞에 앉았다. 눈빛을 보매 샛노란 눈동자가 궁궐의 청홍등 같이 밝고, 아궁이 타는 듯 새빨간 주둥이 사이로는 혀가 넘실대는데, 거기서 내뿜는 입김이 유황불을 뗀 연기처럼 자욱해 차마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었다.

호군이 말하길,

 "너는 무엇하는 놈이냐? 내 인간을 싫어해 보는 족족 물어 삼켰으나, 오늘은 배가 부른 관계로 너의 답을 듣고 죽고 사는 것을 결정해 보리라."

 하니 간장이 들썩 올랐다 내려앉을만치 소리가 우렁우렁했다.

 선비는 이미 호군이 나타났을 적부터 바짝 엎드려 있는 것을 차마, 더 낮게 기지 못해 한이라는 듯 이마를 바닥에 비벼댔다. 그러면서 화톳불을 쐰 모기같은 소리로 비실비실 답을 하였다.

 "저는 작자(作者)입니다요."
 "작이면 지을 작인데 밥을 짓는 것이냐? 다리를 짓는 것이냐? 또는 땅의 지혜를 알아 오곡과 밤, 대추, 감, 사과, 배를 지어내는 것이냐?"
 "저는 글을 짓습니다요."
 "글? 글을 짓는다면 어떤 글을 짓느냐? 내 너의 오늘 지어놓은 글을 듣고 판단하되, 글이 연암과 같이 표홀하고 교산과 같이 얽매이지 않으며 혜환과 같이 소박하여 미소를 자아낸다면 너를 살려보내겠으나, 글이 난삽하여 뱀이 얽힌 것과 같거나, 남의 묵은 글에 취하여 사람을 외면하는 글월이나 지었을 양이면 뼈째 씹어 삼키리라. 자, 무슨 글을 지었느냐?"

 하면서 포효를 하니 오솔길에 솔잎이 일어나고, 두 골짜기 너머의 새들도 놀라 날아갔다.

 "실은 오늘 연암 선생의 소품문을 읽고, '좋다, 참 좋다. 고리타분한 고문이 아닌 것이 격식이 있고, 감정으로 뻗어놓은 작문이 아닌데도 비유가 생생하구나. 누이에 대한 이별의 회한과 어렸을 적 추억을 함께 얘기하고, 읽는 이로 하여 눈물을 자아내니 참으로 아름다운 글이다. 나도 이와 같은 글을 써 보리라.'하여 저자에 나가 붓을 들었사옵니다. 헌데, 저자에는 책에 대해 글을 쓰는 이도 있고, 골계나 옷매무새, 병가(兵家)의 일에 대해 생각을 밝히는 글과 그림도 있어 이에 현혹되니, 처음엔 조그만 소품문 하나를 읽는다는 것이 차차 이 글, 저 글을 서서 읽게 되었습니다. 읽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 아래에 참새만한 종이쪽을 붙여 달리하는 의견을 얘기하다가, 정신을 차리니 그만 날은 저물어 갈아놓은 먹은 말라버렸고 더군다나, 의관을 정제하며 이렇게 써야지, 저렇게 써야지, 하며 생각해 놓았던 것들이 커다란 깔때기에 빨려들어가듯 사라져 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리 되고 나니, 눈은 따갑고 목은 칼칼하여 그만 집에 돌아가 침수에 드려는 길이었습니다. 그 와중 이렇게, 필생의 영광으로 산중대호군을 뵙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호군은 눈꼬리가 치켜올라가고 입이 더할 수 없이 벌어져 한 입에라도 선비의 머리를 씹을 모양새가 되었다.

 "작자가 짓지 아니하면 어찌 작자라 할 양인가? 그 와중에도 한 점 아부로 살 길을 도모하니 인물 또한 졸렬하구나.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내 달을 벗 삼고 계곡물을 술로 삼되, 그 안주로는 너를 가져다 한입에 꿀꺽 삼키리라."

 하니 선비는 망연하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만을 연이어 말할 뿐이었다.

 그 때에 문득, 호군의 귀 뒤에서 홀연히 창귀가 하나 나오는데, 이 창귀는 호군의 뱃속으로 사라진 지도 어언 사십 년이라, 나름 공력도 재주도 있어 호군의 집사 노릇을 하는 귀신이었다.

 "호군이여, 기다리소서."
 "무슨 일이냐?"
 "제가 창귀가 된 지도 벌써 사십 해라 한 가지 재주가 있사오니, 고을을 담당하는 저승사자의 명부를 훔쳐보고 베껴놓은 바가 있나이다. 하여 명부를 보고 이 작자를 살펴보니, 이는 실로 호군께서 잡수실 바가 아닙니다."
 "적당히 살이 쪄 기름져 보이고, 골방에서 붓만 놀리던 인간이라 살도 야들야들 할 것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예, 산중호군이여. 이 자는 멀리 남만에서 온 홍시로 만든 면을 좋아하여 '남만시면호자(南蠻枾麵好者)'라 불리는 자로, 한 때는 글줄 께나 장시에 걸어 놓기도 한 자이올시다."
 "그래, 그래. 글을 쓰는 작자라니 잡아먹어 세상에 티도 안 날 것이고, 뼈가 부드러워 씹기에도 좋을 것이 아니냐?"

 호군이 말을 하며 콧잔등을 찡긋하는데, 작은 산을 붙잡아 구겨놓은 듯 했다. 창귀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답을 하였다.

 "허나 작자라 하여도 여러 작자가 있은 즉, 이 작자는 제 스스로 한양의 큰 세책점의 작자가 되리라 마음먹었으나, 독서를 하는데 게을러 진척이 없고, 글을 쓰는 데 단초가 잡히지 않는다며 책상 앞에 앉아 허송세월하기를 일삼았나이다. 하루가 이레가 되고 이레가 세월이 되어, 그리 글을 쓰기에 게으르면서도 매번 먹을 갈고 버리기만을 반복하니 이제는 손가락 사이로 그을은 먹 냄새가 지독합니다."
 "그럼 손만 잘라놓고 삼키면 되지 않느냐?"

 호군이 입맛을 다셨다.

 "거기에 더해, 쓴 술도 달다, 단 술은 더 달다 하며 입맛을 다시기 일쑤이니, 따로 삯일이라도 많이 한 날이면 먹는 술이 한 되, 글이 안 써진다는 날은 두 되인지라. 술을 먹고 게으르니 간장은 썩어 구린내가 나고, 더군다나 제 기분을 주체 못해 때때로 끊었던 연초를 다시 태우니, 살은 질기고 골수엔 담뱃진이 들어차, 도저히 호군께서 드실 음식이 아닙니다."
 "정말 그러하더냐?"

 호군은 코를 킁킁거려 남만시면호자의 옷깃이며 갓, 손등과 정수리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가까이 다가오니 호군의 머리는 종로 거리의 청동으로 된 종보다도 커서, 선비는 달달 떨며 흙을 쥐었다 폈다 할 뿐이었다.

 이윽고 호군이 말하였다.

 "에잉, 구리구나!"

 그러면서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이 제삿상 트집을 잡는 꼬장꼬장한 노인 같았다.

 "대체 이리 구리고 역해서 어떻게 먹는단 말이냐. 뼈는 제멋대로 뻗어 목구멍에 걸리겠고, 살은 역하고 질기니 살을 발라 도토리와 다래로 간을 하여도 먹지 못할 물건이로다."

 선비는 이에 감격하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를 연발하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호군이 말하였다.

 "내 너를 먹지 않는 것은 세상에 너의 쓸모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네 살이 역하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의 살려두는 것을 네 복으로 생각하여, 작자로 자처함에 걸맞게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내 다시 너를 마주쳐도 살려주되, 혹여나 세상의 쓸모없는 부지깽이로 남는다면 내 너를 먹지는 않더라도 앞 발로 쳐 한 호흡에 죽이리라."
 "예, 예. 열심히 공부하고 글도 써서 저자에 걸겠습니다."

 선비는 한참을 조아리며 절을 하였다. 그러다 문득, 손등에 비친 달빛이 환하고 고개 넘은 밤바람이 귓가에 닿았다. 얼굴을 들어보니 호군은 보이지 않았다.

 선비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 거리기도 하고, 작은 목소리로 '호군님, 산중호군님. 가셨습니까?'하고 묻기도 하다가, 이내 호군이 영 사라진 것을 알게 되자 허리를 곧게 세웠다. 그러고는 갓끈을 똑바로 메고 소매를 탈탈 털며,

 "허, 한낱 짐승이 사람의 뜻을 알겠는가."

 하고 똥 지린 바지를 붙잡고 어기적거리며 제 가던 길을 다시 걸어갔다.
출처 호질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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