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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禁)야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 여섯 번째 밤, 몽중화(夢中花).
게시물ID : panic_909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윈스턴
추천 : 33
조회수 : 413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6/09/28 18: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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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날의 여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전히 신하들은 듣기 싫은 목소리를 높일 뿐이고, 임금의 편을 들어주는 이는 없으니.

그 외로움이 사무쳐오는 시름은 야심한 시각이 되어서야 겨우 풀어질 뿐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흐르는 물에 돌아가는 물레방아 바퀴마냥 모든 것은 제자리일 뿐.

 

과거시험에 관한 방이 전국에 붙었으나, 이미 벌인 일인데도 신하들의 반발이 거세다.

 

 

임금 된 이가 어찌 전국에 선포한 어명을 쉽게 물릴 수 있단 말인가.”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며 재차 반발하고 나선다.

도대체 어디가 바른 길이란 말인지 모를 일이었고, 그들에게 이익이 될 만한 일만이 바른 길이라 이야기 할 게 뻔한지라 그저 실소만 나올 뿐이었다. 더욱 가열하게 반발이 거세졌고, 무례하게 쥐떼의 이야기를 거론하며 과거시험에 대해 엮어다 반발하는 신하가 나와 크게 노성을 지르니 그제야 대전이 조용해졌다.

 

 

 

 

 

 

 

 

 

 

 

 

 

 

 

 

 

중전마마께오서 와병(臥病)중이시라, 전하를 뵐 수 없다 전하라 하시었사옵니다.”

 

 

 

중궁전에 임금이 행차하였건만 그 옥체를 들이지 못하니 어찌된 일인가. 어찌 한 나라의 임금이 중궁전에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한다는 것인가.

임금은 재차 길을 열라 하였으나, 그 길을 막은 중궁전상궁은 요지부동이다.

이에 기가 차니 임금은 중궁전별감(中宮殿別監)을 바라보았다.

그는 난색을 표하며 그저 고개만 푹 숙일 뿐이다.

 

 

중전! 이 무슨 일이오! 어찌된 게요!”

 

 

목소리를 높이며 중궁전의 주인을 찾는 임금. 어찌 한 나라의 나라님이자 궁궐의 주인인 자신이 한낱 중궁전에 출입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중궁전별감! 그대의 일이 무엇인가! 당장 길을 열게 하라! 어명 이니라!!”

 

 

어찌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하던 중궁전별감은 어명이라는 말에 그제야 몸을 앞서며 상궁과 나인들을 물리려 하였다. 그의 모습에 그를 따르던 호위무사들이 같이 반응하여 앞으로 뛰어나왔다.

 

 

전하!! 신첩 행여 전하께 병마를 옮길까 두려워 그렇사옵니다! 부디 신첩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다급한 중전의 목소리가 그들의 걸음을 막는다.

허나 어명이 더 귀한 것이니, 그들 마음속의 저울질은 곧바로 결말이 났고 다시 발걸음을 뗀다. 결국 그 걸음을 막은 것은 어명을 내렸던 임금 본인이었다.

임금은 손짓 하나로 호위무사들을 제지했고, 그들은 그 손짓 하나를 기다렸다는 듯 임금의 뒤로 재빠르게 물러나 부복하였다.

 

 

어디가 그토록 아픈 것이오! 어의는 불렀소!?”

 

어의가 다녀가고 탕약도 올렸으니 괘념치 말아주시옵소서!”

 

 

그저 목소리만 멀찍이 들려온다.

임금이라는 자리는 중전이 뭐라고 하던 그냥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자리다. 그러나 임금은 중전을 존중하고자 조용히 자리를 떴다. 총애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중전이 임금의 방문을 거절한다는 것은 몹시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별일 없이 임금은 자신의 침전으로 향할 뿐이다.

 

임금이 떠나고 난 뒤의 중궁전은 그저 고요함만이 어둠과 함께 주변을 짓누를 뿐이다.

그것이 매우 무겁다.

 

 

 

 

 

 

 

 

 

 

 

 

 

인경(人定)이 스물여덟 번 울리고 세상은 그와 함께 적막이 찾아온다.

 

전각(殿閣)의 주인이 내쉬는 숨소리와 타들어가는 등잔불의 소리만이 그 안을 채운다.

임금은 그저 포근한 이불 위에 앉아 손님을 기다린다. 길고 길었던 하루 사이 쌓인 피로가 어깨를 짓누르고 머리를 온통 죄는 듯 하였건만, 오히려 그 힘겨운 삶의 무게를 씻으려 잠을 쫓고 밤손님을 기다리니 우스운 일이다.

 

 

치지직

 

 

어디서인가 날아 들어온 혜계(醯鷄) 하나가 올곧게 타오르던 등잔불에 몸을 던져 타버린다. 제 몸 불살라질 줄 모르고 그저 불이 좋아 날아드는 꼬락서니가 어찌도 처량한지. 그러나 그 작은 혜계 따위에 올곧던 불이 어지러이 일렁이니 그것은 임금의 마음과 같지 않은가 싶어 실소만 나온다.

 

 

수심(愁心)이 깊으신 모양입니다.”

 

 

문득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임금은 슥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생글생글한 미소가 어찌나 반가웠던지.

 

 

 

어제의 홍량거부에 관한 이야기는 잘 들었다. 허나 느닷없이 나타난 쥐떼에 관해서도 과거시험에 관해서도 도통 답을 낼 수 없었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이냐.”

 

 

 

선문답을 하며 도통 명확한 답을 알려주지 않는 여인에게 의문을 가장하여 작은 투정을 해 본다. 스스로도 임금이라는 자가 알아서 행동하지 못하고 여인에게 기대는 모습이 마음속으로 불편하였지만, 그런 것을 무릅쓰고서라도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피식 잔웃음을 흘리며 여인은 그 고운 손으로 입을 살며시 가린다.

 

 

과거시험보다 중요한 문제는 쥐떼가 아니겠사옵니까.”

 

 

전날에는 그 요사스러운 쥐떼에 관해서보다 과거시험에 대해 더욱 물었었다.

자신의 안위보다 백성들을 더 위함이 드러나는 모양이니 임금 자신은 몰라도 퍽 애잔한 모양새였다.

 

 

그 쥐떼가 전하께 좋은 뜻으로 몰려들지는 않았겠지요.”

 

 

입을 가리던 손을 눈앞에 내밀고는 그 손가락을 까딱이자,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하얗고 작은 잔 하나가 여인의 손에 날아들었다. 날랜 제비가 날아들 듯 빠르게 날아들었건만 그 잔에 담긴 무언가는 하나도 넘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쥐떼는 왜 전하의 침소에 나타났을까요.”

 

 

잔을 살며시 임금에게 내민다.

새벽에 맺힌 이슬마냥 이를 데 없이 맑은 물이 들어있었고, 그 잔에서는 은은하게 알싸하면서도 청량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잔에 든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여인은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고 잔을 든 손 또한 묵묵부답인 모습이었다.

 

그 무언의 권유에 임금은 슬며시 잔을 받아 들었다.

자신의 앞에 잔을 가져가니 그 청아한 향기가 더욱 짙게 느껴진다.

 

 

전하께오서는 방금 전 중궁전에 발걸음 하셨지요?”

 

 

일당백의 호위무사들이 삼엄히 지키는 와중의 모습을 두 눈에 새긴 듯 분명히 이야기한다.

임금은 문득 이 여인이라면 본 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다 보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전히 그 심계(心界)를 들여다 볼 수 없는 깊은 눈동자.

 

 

어찌 단 한 번의 승은(承恩)조차 주지 않으시면서 그토록 정성스레 보살피시는 것인지요.”

 

허어, 그 이야기는 되었다.”

 

()를 품지 아니하시고, 승은상궁을 두시는 것도 아니하시니 그 이유가 무엇이신지요.”

 

 

다른 이가 이러한 이야기를 선뜻 하였다면 그 무례함을 꾸짖으며 태형(笞刑)이라도 내릴 일이었으나 임금은 그저 묵묵히 여인의 물음을 듣기만 할 뿐이었다. 그 물음에 노기는 자리하지 않고 의문만이 남을 뿐이었다. 어찌하여 이러한 이야기를 재차 묻는 것인가.

에둘러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인 그 물음은 왠지 모르게 날이 서 있었다.

 

몹시도 곤란한 이야기에 임금은 좌불안석으로 고민을 할 뿐이라.

그저 말하기 위해 입을 떼기가 곤란하니, 잔을 들어 마시는 것에 입을 열 뿐이라.

시원하고 향기로운 술이 메마르고 갈라진 땅에 젖어 들 듯, 피로에 찌든 옥체를 싱그럽게 적셔가며 몸에 활기를 북돋는다.

 

 

모든 것은 오늘의 이야기를 마친 후에 끝맺음을 하겠사옵니다.”

 

 

 

 

 

 

 

 

 

 

 

 

 

 

 

 

 

 

열심히 밭을 매고 날이 저물 무렵, 길산은 미나리를 간장에 무쳐 낸 것을 반찬삼아 저녁 끼니를 때우며 막걸리를 한 사발 마셨다.

지금까지처럼 먹을 것이 모자라 아쉬워하며 사는 것이 사양인지라 올 해에는 밭을 더 개간하고 작물도 더 많이 심은 것이 문제였다. 화근까지는 아니었으나, 그것으로 골치를 썩는 것은 매일같이 쉬지 않고 일해도 끝이 안 보이는 농사 때문이었다. 기왕 심은 작물이 죽지 않고 잘 자라게 매일같이 일을 하는데, 심어 놓은 것은 워낙에 많고 몸은 하나이니 과로사 할 판국인 것이었다. 나이 들어 걷는 일도 순탄치 않은 노모(老母)에게 일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결혼도 하지 못한 노총각인지라 가족이 없어 오롯이 밭일은 길산의 몫이었던 것이다.

이번 해에 농사만 잘 마무리 지으면 들어올 돈이 그래도 꽤나 짭짤한지라 그것이 눈에 아른거려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그 돈으로 땅을 더 사서 소작(小作)을 주고 살면 앞으로는 더욱 편히 지낼 수 있겠다 싶으니 이토록 열심히 농사를 짓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밭도 아닌 황무지 자갈밭을 헐값에 사서, 개간하느라 춘한(春寒)으로 칼바람이 몰아치는 날부터 손이 터지도록 고생했더랬다.

 

그 피로와 시름을 막걸리로 간신히 풀고 나니, 취기가 오르고 노곤한 몸이 그만 넋을 놓고 곯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장군! 일어나시어요 장군!”

 

 

 

불현듯 들려오는 급한 부름에 길산은 화들짝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자신을 깨운 이는 분홍색의 저고리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분명 자신의 집에서 잠에 빠진 중이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당혹감에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 길산.

 

 

어서 요물들을 막아주시어요!”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맑은 빗방울을 보는 듯, 반짝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뺨을 타고 가련하게 떨어진다. 그 눈물에 혼이 빠지는 듯하다 자신을 바라본 길산은 이것이 생시인지 싶어 괜히 손을 꿈지럭거려 본다.

자신은 보기에도 황송할 만치 멋진 청색의 무복을 입고 있었고, 그는 비단 솜이불이 깔린 침상 위에 누워 있었는데 금장으로 한껏 치장된 화려한 검이 함께 놓여 있었다.

 

어째서인지 급히 나가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검을 챙겨들고 어디인지도 모를 처음보는 방을 나섰다.

 

침상에서 일어서는 순간, 처음 맡아보는 꽃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 이게 무슨!!”

 

 

 

난생 처음 보는 큰 마을이 맨 처음 눈에 들어왔고, 온갖 사람들이 길산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 쏙 빼며 겁에 질린 채 애원하는 모습이 불쌍하고 딱해 보였다.

 

 

장군님! 살려주십시오!”

 

우리 아이를 구해주세요!!”

 

 

거동이 불편해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목소리를 높이며 달려오는 노인. 겁에 질려 앙앙 우는 어린아이. 갓난아이를 안고 와서는 다리가 풀려 풀썩 주저앉아 구명(救命)을 구하는 아낙네. 머리와 다리에 피를 철철 흘리며 허겁지겁 달려와 쓰러져 손을 뻗는 사내까지. 온갖 인사들이 몰려 길산에게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애타는 모습에 길산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마을의 어귀에서 크고 작은 요물들이 마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 한 둘은 집어삼킬 만큼 큰 아가리가 가슴에 달린 괴물, 손톱이 길게 자란 시체, 머리만 떠다니는 요괴, 다리 없이 날아오는 귀신까지.

그 무시무시한 요물들의 행렬이 마을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길산은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으로 겁에 질렸으나 마을사람들이 에워싸고 있는 까닭에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때, 길산이 들고 나온 그 화려한 검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으로 비춰지는 광명에 요물들은 제각기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가려 그 빛을 피하고자 했다. 무엇에인가 홀린 듯 길산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요물들을 향해 검을 치켜들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다리가 몹시 가볍고 몸도 날래다.

자유로운 그 기분에 발을 굴러 훌쩍 뛰어보았다. 삼 장()은 될 법한 거리로 몸이 날아간다. 길산은 그대로 삽시간에 요물들의 목전까지 당도하여 검을 휘둘렀다. 평생 휘둘러 본 것이라고는 괭이나 쇠스랑 따위의 농기구들 뿐이었으나, 이 순간에는 마치 백전노장(百戰老將)마냥 그 칼부림이 거침없고 대범했다.

거대한 머리통에 눈구멍을 쑤셔 장님을 만들고, 쩍 벌어진 아가리의 날카로운 독니를 베어 잘라 그 혓바닥에 꽂아버린다. 뿔을 베어 피의 안개를 만들고, 사람 키보다 더 큰 쇠몽둥이도 단칼에 동강을 내어 버린다.

 

한 번 휘두를 적마다 요물들의 머리가 하나씩 필시 떨어지니, 요물들은 길산을 두려워하여 그저 줄행랑을 놓았다.

 

 

비명을 지르며 멀리 사라져가는 요물들의 뒷모습을 보며 길산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넋을 놓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뒤에서는 환희에 벅차 흐느끼는 여인이 길산을 장군이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장군님, 저희가 차린 것이 마뜩치 않으나 정성을 다 하였으니 부디 들어주시옵소서.”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한 음식상이 세 번이나 나와 그 몸을 횡으로 이어 붙이고 있었다. 서른 첩이 훌쩍 넘을 듯, 가득한 음식들. 어안이 막혀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길산의 옆자리에서는 그가 맨 처음 보았던 분홍 저고리의 여인이 정성껏 음식들을 집어 길산에게 가져다주었다.

 

고기면 고기요 생선이면 생선.

길산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도 그렇게 잘 알아채는지, 길산은 손가락 한 번 까딱하지 않고 원하는 음식들을 편하게 받아먹을 수 있었다. 앞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길산의 용맹함을 칭송하니 어찌 극락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자신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정성껏 예를 다 하는 여인.

 

댕기 머리에 윤기가 몹시도 고운 여인이다.

그 여인이 길산에게 사뭇 연정이라도 품은 듯 미소가 애틋하다.

 

아리따운 여인의 수발을 받아들고 온갖 진수성찬이 그득하니 길산은 그제야 행복에 젖어 만복의 웃음을 터뜨렸다.

 

 

 

 

 

 

 

 

 

허어, 여기가 대체 어디지.”

 

 

진미의 음식들을 가득 맛보고, 향기가 좋은 술마저 원 없이 마신 길산은 푸근한 침상의 이불에 누워 고민을 했다. 이토록 호강한 것은 몹시도 좋은 일이었으나, 자신의 집은 온데간데없고 난생 처음 보는 이들과 모르는 집들만 가득했으니 기가 차는 일이었다. 집에 계신 어머니는 어찌 하고 있을 것인가 생각을 하니, 하루 바삐 집에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영 마음이 불편했다.

 

은은한 꽃향기.

 

처음 이 곳에서 눈을 뜨고 맡은 그 꽃향기가 은근히 코를 자극해오고 있었다.

침상 바로 옆에 놓인 화병(花甁)에서 나는 향기다.

붉디붉은 꽃 한 송이가 꽂혀진 화병.

 

그 꽃잎이 몹시 길게 뻗어 있었고, 붉고 가느다란 꽃줄기가 꽃잎보다도 길게 늘어져 자라 있는 희한한 꽃이었다.

 

 

 

장군님, 주무시옵니까?”

 

 

 

문득 문 밖에서 들려오는 고운 목소리에 길산은 고개를 돌린다.

낯이 익은 목소리는, 아무래도 그 분홍 저고리 처녀의 목소리인 모양이었다.

 

 

아직 잠에 들지 않았소.”

 

 

당황하여 선뜻 내뱉은 길산의 말에, 창호문이 조용히 열린다.

두 뺨에 홍조를 띤 분홍 저고리의 여인이 길산의 방으로 들어선다.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 안으로 그 몸을 들인다.

 

야심한 시각에 이 무슨 일인가 싶어 입을 막 떼던 길산은 그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도 꺼내지 못하게 되었다.

 

몹시 부끄러운 모양새로 그 섶을 풀어 헤쳤다.

고운 태의 저고리를 벗으니, 하얀 속곳이 드러났다.

머지않아 그 하얀 속곳도 사라지니, 보얗고 매끄러운 젖가슴이 길산의 눈에 맺혔다.

 

청순한 그 나신이 달빛을 받아 싱그럽게 은은한 빛을 띠고, 여인은 길산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를 끌어안았다. 포근하고 부드러운 그 살결이 길산의 피부를 타고 아찔하게 자극해오니 길산의 양물(陽物)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길산아, 일어날 때가 다 됐구나.”

 

 

집 밖에서 들려오는 늙으신 어머니의 목소리.

 

문득 눈을 뜬 길산은 자신의 방 안에 누워있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핀다.

언제나와 같은 자신의 집이 맞다.

 

길산은 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 생각하니, 퍽 아쉬워져 한숨을 푹 쉰다. 조금만 더 늦게 깼더라면 좋았을까 싶어, 오늘 하루는 더 잠을 청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다시 잠들면 그 꿈을 이어서 꾸기도 하지 않는가. 하지만 나이든 어머니가 힘겹게 일어나 집안일을 시작하시는 것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하루 빨리 돈을 벌어 땅도 사고 편하게 재물을 모으며, 곱고 고운 새색시를 데려오자고 위안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밖에 나가 덮었던 이불을 털며, 꿈에 얽힌 미련 또한 같이 털어버린다.

 

 

 

그날 하루도 몹시 힘겨웠다.

 

고구마 밭에 나가 일하다 살벌하게 생긴 살모사 하나를 보고 내쫓으려 쇠스랑을 휘두르다 결국 내쫓지 못하고 줄행랑을 쳤다. 새참을 먹을 즈음에는 밭이 붙어있는 주씨네와 서로 자기 땅이라고 싸우다가 땅문서를 대조해보고 나서야 결판이 났고, 다시는 남이 자기 땅에 해코지 못하게 하려고 작게나마 돌담을 쌓았다. 그러고 나서 날이 저물 무렵에서야 돌아다니며 잡초를 뽑는 일을 겨우 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고구마 밭에도 물을 길어다 줬어야 했는데 살모사가 여태 있을까봐 가지 못한 것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길산아, 그리 마시다 몸 상한다.”

 

 

자신의 방 안에서 늦은 끼니를 먹으며 막걸리를 들이키는 길산은 어머니의 걱정 어린 말을 듣는다. 매일같이 일만 하고 쉴 틈도 없는 삶이 도통 재미난 것이 없는지라 그저 술로만 시름을 달랠 뿐이었다. 다 포기하고 평소와 같이 한 해 먹을 농사만 지을까 싶었지만, 헐값으로나마 땅을 사는데 쓴 돈도 아른거리고 그 땅을 개간하고자 들였던 노력들이 아까워서 애써 약한 마음을 털어버린다.

저녁상을 다 치우고, 소금으로 이를 대충 닦은 뒤 바로 잠자리에 누워버린다.

 

 

 

 

 

 

 

 

 

 

 

 

 

 

 

 

장군, 기침 하시었사옵니까?”

 

 

다시금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뜬 길산은 주변을 둘러본다.

 

전날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길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화려하고 깨끗한 이불이 그의 몸을 덮고 있었고, 따스한 햇살이 기분 좋게 주변을 덥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깨끗하고 고운 나신이 떠오르자 길산은 얼굴이 붉어지고 눈 둘 곳을 모르게 되었다.

 

연두 빛의 저고리에 붉은 치마가 몹시 청순하게 느껴진다.

 

 

 

어어, 이제 일어났소.”

 

세숫물과 조두(澡豆)를 가져다 놓았으니, 아침상은 세수가 끝나시는 대로 올리겠사옵니다.”

 

 

간략한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는 그녀를 불러 세운다.

 

 

여기는 대체 어디요. 보아하니 내가 살던 곳이 아닌데.”

 

 

급작스러운 길산의 이야기에 여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영 모르겠다는 눈치다. 그 순박한 눈초리를 해서는 그저 길산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장군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천군(天軍)이 아니시옵니까?”

 

 

의문이 가득한 여인의 이야기에 길산은 그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에 눈치를 보던 여인은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는 슬그머니 방에서 나갔다. 길산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싶었지만, 그저 이것은 꿈일 뿐이고 생시가 아니니 마음 놓고 머무르자고 생각하며 세수를 시작했다.

 

꿈이다.

그저 꿈일 뿐이라면 이런 극진한 대접도, 한 번도 겪어본 일이 없었던 비범한 능력도 그저 만끽하면 될 뿐이지 않은가. 그리 생각하며 여지없이 호화로운 음식들을 받았다.

 

 

도와주세요 장군님!!!”

 

요물들이 몰려오고 있사옵니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 해가 중천에 떠 한창 밝아야 할 시간이나 먹구름이 온통 몰려와 하늘을 뒤덮어 마치 밤과 같은 날이 되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겁에 질린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길산은 거침없이 검을 빼어 들고는 요물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무시무시한 요물들의 피를 뒤집어쓰며 그것들을 물리치는 길산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새겨지고 있다.

 

몸은 깃털처럼 가볍고, 팔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별의 별 요물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간다. 소리라도 한 번 지른다 치면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고, 사람들은 자신을 향해 환호를 하며 은혜를 말한다. 이처럼 멋진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볼 수 없었던 희열이 계속되는 것이다.

 

마치 신령이라도 된 것처럼 모든 것이 충만했고, 마치 왕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의 대접에 없는 것이 없으니 이토록 좋은 세상이 어디에 있는가.

 

평생 늙으신 어머니 한 분 모시기도 힘겨웠던 인생인데, 이 많은 사람들을 지켜주고 목숨 구해주는 일을 하고 있으니 성취감 또한 충만하다.

자신은 선의의 수호신이었고, 사람들을 구명을 좌우하는 신선이 된 것이다.

 

저녁상에는 여지없이 산해진미가 올랐으나, 유독 눈에 띄는 것은 큼지막한 황소의 통구이.

고소하고 감칠맛 나는 육즙이 자르르 흐르는 고기를 부위 별로 한 조각씩만 맛보았는데도 벌써 그 행복한 만복감에 미소가 지어지니 신선놀음이라.

 

 

진정 장군님 덕에 저희가 목숨 부지하고 살 수 있습니다요!”

 

 

눈앞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길산의 선행에 감복하고 엎드려 절을 한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자리한 여인.

여전히 길산에게 착 달라붙어 호사스러운 수발을 들어주는 그 미모의 여인.

이 행복한 와중에도 여인에게 퍽 욕심이 나고 있으니, 사람의 마음이란 어찌나 덧없는가.

 

그러한 바람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었다.

 

온통 푸근하고 따스한 이불이 기분 좋게 몸을 감싸주니 절로 기분이 좋아지며 몹시도 녹신거린다. 그러나 길산은 결코 잠에 빠지지 않았다. 행여나 하는 마음이 있어서였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이대로 잠이 들어서야 곤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들어맞았다.

 

 

혹여 주무시고 계시옵니까?”

 

 

너무나도 청초하고 아름다운 그 여인이 길산의 대답을 듣고 방으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어제와 달리 옷을 벗지 않는다.

이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 순수한 나신을 이끌고 방에 들어선 여인은 공손한 자태를 하고서 길산의 이불 속으로 나긋나긋하게 들어선다. 이때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부드럽고 포근한 여인의 젖가슴이 길산의 몸 위로 포개졌다.

몹시도 흥분한 나머지 거친 숨을 몰아쉬던 길산은 그대로 손을 올려 여인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너무나 황홀했다. 길산은 더 이상 욕정을 참지 못하고 여인을 냅다 끌어안았다.

아련하고도 순수한 그 작은 신음이 여인의 입가에서 새어나왔다.

더는 거칠 것이 없던 길산은 그대로 여인의 그 보드라운 신체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마음 가는 데로 쓰다듬고 주무른다. 입을 갖다 대어 여인과 입을 맞추고 그 탐스러운 젖가슴 또한 입을 맞춘다.

 

 

 

 

 

길산아! 일어났니?”

 

 

그리고 눈을 떴다.

 

평생을 보고 자란 낯익은 천장이 그의 눈에 처음 들어온다.

너무나도 허탈하고 허망했다. 한 식경이라도 더 늦게 깨웠더라면 싶고, 아직까지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 여인의 달콤한 몸이 온 마음을 진탕시키고 애타게 만들었다.

 

두 손을 천장을 향해 뻗어본다.

지금 마음대로 놀릴 수 있는 이 두 손으로 그 탐스러운 몸을 마음대로 움켜쥘 수 있었건만.

 

어째서인지 오늘만큼은 더 잠을 청하고 싶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몸이 평소보다 더 피곤한 것 같았고 아픈 것 같았다.

하지만 길산은 애써 그 마음을 죽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날 고구마 밭에 물을 주지 못했으니 오늘은 반드시 줘야 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길산은 아침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일을 하러 밭으로 나갔다.

 

반찬들이 영 맛이 없었다.

 

 

 

 

 

 

 

 

 

 

 

 

 

 

 

 

 

 

 

 

 

 

밭일은 끝내는 둥 마는 둥 하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날이 저물려면 한 시진은 더 있어야 하건만, 길산은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와 의아해하는 어머니를 뒷전에 두고는 저녁상도 마다하고 자리에 눕는 것이었다.

 

눕고 나면 바로 그 곳이 신천지(新天地)이니 어찌 욕심이 나지 않겠는가.

그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품을 수 없는 그 아리따운 여인.

여인의 속살 내음이 떠올라 견딜 수 없으니, 오늘은 반드시 그 밤을 끝까지 즐기고야 말겠다 하는 심정으로 잠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리고 여인이 길산을 깨운다.

 

온통 몸이 달아오른 길산은 여인을 향해 뛰어들지만, 날이 저물지 않으면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니 겁탈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저 침만 삼켜야 할 뿐이었다. 그리고 임금이나 먹을 것 같은 호화스러운 음식들이 나오고, 비명을 지르는 마을 사람들을 요물들에게서 지켜준다. 훨훨 날아오르는 것 같은 그 몸이 어찌나 신명나는지.

 

그리고 날이 저물 무렵에는 역시나 호사스러운 축하연이 열린다.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즐거워지는 노래를 들으며, 마을 사람들의 칭송에 몸이 행복하게 젖어든다.

 

야심한 시각에 잠자리에 들면, 아름다운 나신의 여인이 침상 안으로 들어선다.

그 몸을 맛보고 느껴보며 욕망을 분출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허망하게도.

 

 

 

 

 

 

 

 

 

 

 

 

 

 

 

 

 

 

 

 

 

 

 

스님! 여기예요!”

 

 

길산의 어머니는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마을의 뒷산에 올라가 절을 찾았다.

이미 의원의 손을 빌어보기도 세 번째였으나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어떠한 병이 생긴 일이 아니라 귀신이라도 들린 것이라면 싶어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스님을 찾은 것이다.

 

 

허어, 집에 왜 이리도 음기가 많은지요.”

 

 

보통의 스님이라기엔 그 기골이 장대하여 길산의 집이 작아 보인다. 살생을 금하여 주로 나물이나 시주받은 농작물을 먹고 지낼진대 그 덩치가 웬 말인지 싶다. 마치 갑주를 입고 전장을 누빌 것 같은 장수의 모습과도 같으니 오히려 어머니는 스님이 퍽 듬직하여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다.

 

 

이보게, 길산이. 일어나 보시게. 길산이.”

 

 

스님은 냉큼 방으로 들어가, 자고 있는 길산을 흔들어 깨웠다. 만사의 일들을 다 제쳐두고 그저 밤낮으로 잠만 자는 것이, 필시 문제가 있기는 있는 것이렷다.

 

 

엿새 전에 고구마 밭에서 살모사 한 마리를 봤다고 기겁을 하더니그래서 혼쭐이 나가버렸는지그저 잠만 자는 통에 어흐흐……. 이 늙은이가 겨우겨우 밭일을 해 나가고 있기는 한데, 밭일이고 뭐고 다 망해도 좋으니 우리 아들만은 살려주시우어흐흐흐…….”

 

 

그 자글자글한 눈주름을 타고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진다.

행여나 아들이 죽거나 바보라도 될까 싶어 그 자식걱정에 어머니의 속이 바짝 타들어가 숯덩이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몸이 나이에 맞지 않는 힘겨운 밭일로 망가져가는 것보다도 그저 아들의 걱정에 그 근심이 마음을 썩힌다.

 

 

이보게! 길산이! 일어나시게!”

 

깨우지 말라고 했잖아!!!!!”

 

 

벌떡 일어나 소리를 버럭 지르는 길산.

그 눈은 벌겋게 충혈(充血) 되어 있었고, 그 희번덕이는 눈알은 살기마저 띠고 자신의 잠을 방해한 인간을 찾는다.

 

길산은 너무나 아쉬워 죽을 판이었다.

 

이번에도 그 여인과 끝을 볼 수 없었다. 어떻게 그 여인을 더듬고 만지고는 하고 있으나 정작 중요한 그 음사(淫事)를 치르려 하면 잠에서 깨어버리니 환장할 노릇인 것이다. 자나 깨나 그 여인이 머릿속에 들어차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고,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여인과 좋은 일을 하고 나면 이제 미련을 버릴 수 있겠다 싶은데 그러지를 못하니 해소되지 않는 그 욕망에 더더욱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일이다.

 

 

허어, 정신 차리게! 자네 어머니께서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시는 게 안 보이는가!!!”

 

 

그제야 길산은 그 무시무시한 눈을 거두고 스님 뒤의 마당에 서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어머니를 보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길산은 무엇인가 잘못 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겠으니 스님을 바라보는 길산. 스님은 마을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귀한 정신적인 지주였다. 사람들은 풀지 못할 것 같은 일이 있을 적마다 스님을 찾았으니 스님은 곧잘 그 일들을 해결하고는 했다.

 

 

이보게, 요새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 생시같이 요란한 꿈 말일세.”

 

 

미처 길산이 입을 떼지도 않았는데, 들여다 본 것처럼 콕 집어서 이야기를 명확히 하니 길산은 그만 넋이 빠져 버린다. 그러한 길산의 태도에 스님은 길산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잇는다.

 

 

음사(淫事)를 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음사(淫祀)가 되어 버렸구만 자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스님!”

 

 

무엇에인가 홀려있는 사람은 다 그러한 눈을 하고 있다. 지금 그토록 잠을 자기만을 원하니 꿈속에서 홀린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에 홀려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며 스님은 길산의 앞에서 불경을 읊어주기 시작했다. 그 경을 외는 소리에 늙으신 어머니는 마당에서 하염없이 절을 하며 자식의 안녕을 빈다. 길산은 그 모습에 억장이 무너지며 후회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경은 길고 길었으나 그 시간은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어찌하면 좋은가 길산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꿈이라는 놈이 매일같이 같은 꿈을 꾸니, 사람이 잠을 청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니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만약 그 꿈이 요망한 귀신의 짓이라면 그 피할 수 없는 꿈속에서 해코지를 하려 들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자네 지금부터 정신 바로 차리고 듣게. 꿈속에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느껴지겠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 바라보면 허술한 것이 느껴질게야. 음식도 맛있다 느꼈을 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맛본다면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모든 것이 헛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거라네.”

 

 

 

나직이 들려주는 스님의 주의는 역시나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한 곳을 짚었다. 길산은 꿈에서 보았던 것을 되짚어보며 스님의 말을 경청한다.

 

 

하지만 그 중에 하나 진짜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있을 터인데. 그것을 부숴버려야 그 헛꿈에서 벗어날 수 있다네. 그것이 현실을 바로 볼 수 없게 자네를 미혹(迷惑)하는 것이야.”

 

, 그게 무엇입니까?”

 

나도 모르지. 자네 꿈속 이야기는 자네만 알지 않겠나. 내 경을 외워 안녕을 빌었으나 그 꿈이 사라지지는 않을 터이니 다시 한 번 그 꿈을 꾸게 된다면 잘 찾아보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스님은 거듭 당부를 하며 길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큼지막한 손이 몹시도 따뜻하다. 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너무나도 감사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왠지 모를 용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어떠한 요망한 것이 자네를 해코지 하더라도, 바로 듣게. 자네 꿈속에서 자네보다 강한 이는 없네. 자네가 하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자네 꿈속이니 결코 겁을 먹거나 진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네. 그 곳에서는 자네가 부처일세.”

 

 

 

 

 

 

 

 

 

 

 

 

 

 

 

 

스님이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간 뒤, 길산은 그길로 밭으로 뛰어나갔다. 도대체 며칠 동안 밭일을 내팽개쳐 둔 것인지, 도무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길산은 자신의 밭을 이곳저곳 뛰어다녀 보다가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자신이 그토록 힘겨워 했던 밭일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잘 되어있는 것이었다.

 

필시 자신의 어머니가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겨우겨우 해낸 일일 것이었다.

불효도 이러한 불효가 어디 있겠나 싶어, 그 죄스러운 마음에 머리를 흙바닥에 처박고는 쉽사리 들지 못하는 것이었다. 올해는 욕심을 부려 경작지를 더욱 늘렸으니 그 고생이 오죽 심했겠는가. 한 식경이 지나서야 길산은 고개를 들고, 밭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밭일을 끝내고 나니 몸이 몹시도 노곤하다.

 

개울가에서 멱을 깨끗이 감고는 티 없이 하얀 새 옷을 챙겨 입고 잠자리에 들었다. 요와 이불 또한 낮에 깨끗이 빨래를 해 두어 햇볕에 널어 말렸으니 그 모양이 퍽 정갈하다. 방도 먼지를 다 쓸어내고 물걸레질까지 마쳤으니, 이보다 깨끗할 수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깨끗이 하고 잠자리에 드니, 전장 전에 목욕재계를 하는 장수와 같지 않은가.

 

길산 장군은 그렇게 잠에 빠져든다.

 

 

 

장군님, 기침하셨는지요.”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온다.

 

잠에 들어야지 싶어 눈을 감았는데, 어느새 벌써 꿈속인 모양이었다. 잠은 정말 삽시간에 찾아든다. 길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핀다. 은은한 꽃향기. 가늘고 긴 꽃줄기가 인상적인 붉은 꽃의 향기.

 

길산은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아침을 맞이하며 비질을 하기도 하고, 분주히 지게를 짊어지고 괭이 따위의 농기구를 들고 가기도 한다. 그러다 길산을 바라본다.

 

 

아이고! 장군님 아니십니까!”

 

밤새 별고 없으셨는지요!”

 

얘들아, 장군님께 어서 인사 올리거라!”

 

 

그들은 길산에게 몰려들어 반가운 인사를 한다. 그러나 길산은 정신을 바로 차리고 수상한 것이 없는지 훑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인사를 받는 것도 건성으로 하고, 그저 바로 보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러자 의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대목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 뚜렷한 이질감의 뿌리를 찾기 위해 부단히 집중하여 모습들을 살핀다.

 

 

오늘은 장군님께 진상하고자 먼 바다에서 횟감을 가져왔습니다요!”

 

장군께서 살려주신 덕에 제 자식 놈이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이질감.

 

생생하였으되 무엇인가 결여된 것 같은 그 기분 나쁜 느낌.

머지않아 그 문제의 근원은 길산의 머릿속에서 하나로 정립되었다.

 

사람들이 동시에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서로 입이라도 맞춘 듯, 맞물려 이야기 하거나 동시에 이야기 하는 이가 단 한명도 없는 것이었다. 그 괴상함에 머리털이 쭈뼛 선다.

 

 

여러분들! 오늘 하루도 제가 요물들을 잘 물리칠 터이니! 걱정일랑 하지 마십시오!!”

 

 

하나의 꾀를 내었다.

이로써 더 명확해지지 않겠는가.

 

 

저와 함께 함성을 질러 주십시오!!! 와아아아아!!!!”

 

 

전장에서 군사들을 이끄는 장군들은 으레 함성을 지르게 하며 사기진작(士氣振作)을 한다고 들은 바 있다. 이는 전장을 앞두고 불안에 떠는 백성들에게도 똑같이 한다 들었다.

지금 그 장군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상은 여지없이 들어맞는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와아아아!!”

 

와아아아!!”

 

와아아아!!”

 

와아아아!!”

 

와아아아!!”

 

와아아아!!”

 

와아아아!!”

 

 

 

그 많은 사람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소리를 지른다.

서로 순서라도 짜 맞춘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서대로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 자들은 그저 말없이 미소만 띠고 있다.

 

그러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두 팔을 하늘로 뻗고는 냅다 소리를 지른다.

그러한 일들이 무수히 반복되고 있었다.

 

눈물이 날 듯 무서워져 길산은 뒤도 돌아보질 않고 자신의 거처로 뛰어 들어갔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하는 걱정에 안절부절 못하며 방 안을 빙글빙글 도는 것이다.

꿈속으로 들어서려고만 했지, 도중에 깨어나는 법은 결코 알지 못했기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일 자체가 너무도 두려운 일이었다. 거기까지 의식이 닿으니 이제는 그토록 원했던 여인도 소름이 끼쳐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져 그 두려움이 길산을 애처롭게 만든다.

 

 

그때, 코를 간질이는 어떠한 향기.

침상의 옆에 놓인 화병에서 나는 꽃향기.

 

길산은 그것에 다가가 그 모양새를 낱낱이 살폈다.

가장자리가 주름진 모양의 긴 꽃잎을 가졌고, 그 꽃잎보다 더 긴 꽃줄기들이 바늘처럼 가늘게 돋아있다.

그 붉은 빛깔은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핏빛.

 

아무리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바로하고 다시 살펴도 그 꽃향기는 진실이었다.

지체 없이 길산은 그 꽃을 화병에서 뽑아다 거꾸로 꽂았다.

화병의 물에 꽃이 잠기니 향기가 멎는다.

 

그러자 주변의 모습들은 그 모든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날은 밤이라도 된 듯, 그 따스했던 햇볕이 사라지고 온통 시커먼 하늘만이 남았다.

다 허물어져가는 벽과 썩어빠져 언제 무너질 지도 모를 대들보.

그 포근하고 따스하던 이불은 온통 헤지고 찢어져 거무튀튀한 곰팡이가 온통 슬어 있었다.

그 토악질이 나오는 광경 속에서 길산은 날카로운 바늘들 따위가 등줄기를 찌르는 듯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여태 이러한 폐허 속에서 호사를 누린다 생각하며 지내온 것인가.

 

그때, 등 뒤의 문 너머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내었다.

 

 

 

장군, 아침상을 내어왔사옵니다.”

 

 

 

언제나 듣던 그 아리따운 여인의 목소리.

항상 반가웠던 그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결코 방에 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내색을 할 수 없어, 온통 떨리는 목소리를 사력을 다해 바로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며 여인을 불렀다.

 

 

들어오시오.”

 

 

길산은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온통 주름지고 늘어져 마치 썩어버린 홍시같은 가죽을 하고 있는 요물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빈 그릇들만이 늘어놓아져 있는 밥상을 들고서.

 

늘어지는 가죽들을 제외하고는 살도 없이 앙상한 모양새였고, 허옇게 산발한 그 머리칼은 마치 다 썩어가는 시체의 머리털과 다르지 않았다. 이는 다 빠져 몇 개 남은 것도 없었고, 눈알은 시커먼 것이 어느 것이 흰자이고 검은자인지 모를 판국이었다.

 

그 흉측하고 요사스러운 모습이 끔찍할 지경인데, 그 아가리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아리따운 여인의 목소리.

 

 

아침상을 내왔습니다. 어서 드시어요.”

 

 

자신이 이제 현실을 보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 공포감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놀렸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 그릇들은 온통 찌그러지거나 이가 나가 있었다. 허공에 숟가락질을 하며 먹는 시늉을 한다.

짐짓 맛있는 음식을 먹는 척을 하며 미소를 띠는데 눈시울이 몹시도 붉어져, 행여나 들킬까 염려되니 다른 짓을 한다.

 

 

거기 영감 있는가?”

 

 

평소 밥상을 받을 적에는 마을의 중요한 인사들이 모두 모여 길산을 향해 칭송의 말들을 하고는 했다. 지금은 이 자리에 저 요물 하나만이 보이나, 분명 다른 인사들이 보이는 것처럼 굴어야 하는 것이었다.

 

 

네에, 장군. 하명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그 요물이 턱을 쩍 벌려 덜걱이자 이번에는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흉물스러운 모습에 다시 한 번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 숟가락만을 놀린다.

 

 

지난번에 다친 아낙네는 어찌 되었소?”

 

여기 있사옵니다, 장군. 그 높으신 은혜 덕에 여태 목숨 부지하며 행복히 살고 있나이다.”

 

 

이번에는 아낙네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그 아가리에서 흘러나온다.

노인이나 아낙네가 어디에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판국이니, 자칫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가 허튼 곳을 바라보면 들켜 버릴 일이라 그저 열심히 그릇에 고개만 처박고 먹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잠시 후, 요물의 그 벌어진 턱주가리.

온통 썩어 뼈가 훤히 드러난 그 턱뼈가 덜걱거리며 온갖 사람들의 목소리가 주변을 메우는 것이었다. 온통 길산을 칭송하는 말들과 감사의 말들이 각기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로 화하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좋겠다 싶어, 국을 벌컥 들이키는 시늉을 한다.

 

 

그때, 모든 목소리들이 일제히 멎어버렸다.

 

 

길산은 무언가 잘못되었나 싶어 그 고요 속에서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눈만 몰래 치켜떠서 요물을 살핀다.

여전히 요물은 길산의 맞은편에 앉아,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길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인의 목소리로 길산을 향해 묻는다.

 

 

 

어찌하여 밥그릇을 들고 들이키는 시늉을 하시는지요.”

 

 

 

그 한마디에 온 몸이 오스스해지며 온 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이었다.

들켜버렸다는 생각에 눈앞이 새까맣게 변한다. 요물은 순간 침상의 옆에 놓인 화병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거꾸로 꽂혀 있는 꽃.

 

그것을 본 요물은 그 턱뼈를 떨어져나갈 듯이 벌리는 것이었다.

 

 

 

끄어어어어어어어억!!!!!”

 

 

 

목 줄기에 구멍이 뚫린 늑대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기이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요물. 지긋한 나이의 노파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모양 같기도 한 소름끼치는 소리. 길산은 침상위에 놓인 검을 냅다 들고는 몸을 던져 창호를 뚫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집 밖으로 나서자 사방은 어두컴컴하고 안개가 가득해져 있었다.

 

온 마을의 집들은 앙상한 뼈대나 겨우 남거나, 다 허물어져가는 돌담들만이 을씨년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인적이라고는 단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인적 뿐 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의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그 흔한 거미줄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등 뒤에서 찌르는 듯이 울려 퍼지는 흉악한 괴성(怪聲)에 길산은 급히 아무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끼이이이이 끼이이이이 끼이이이이

 

 

 

 

낡고 삭아진 경첩 따위가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내는 듯, 그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결코 살아있는 것의 소리가 아니었다.

 

발자국 소리가 몹시도 둔중하여, 고개를 내밀어 본다.

 

어느새 요물은 산이나 거암(巨巖)만큼 그 덩치가 커져 주변의 집들을 살피고 다니는 것이었다.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으려 애쓰며 입을 틀어막는다.

 

요물의 손톱은 날카롭고 길쭉한 것이 거대한 작두 따위 같았고, 그 시커멓고 흘러내리는 듯 늘어지는 가죽은 오래된 고목의 거죽과 같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벌벌 떨고만 있던 길산은 그저 몸이 굳어 다 허물어져가는 벽 하나에만 의존해 몸을 숨길 뿐이었다.

 

그리고 그 괴상한 울음소리들 사이로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씩 들려오고 있었다.

 

 

장군님! 요물이 나타났습니다!!”

 

 

끼이이이이

 

 

살려주시어요 장군!!”

 

 

끼이이이이

 

 

으아아악!! 요물이다!! 요물이 나타났다!!!”

 

 

끼이이이이

 

 

자신이 항상 들어왔던 그 목소리들이 이토록 소름끼치는 요물의 음성인 줄 알았더라면 이 진절머리 나는 꿈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애를 썼을 것이었다.

 

그때, 바로 옆에서 큰 무쇠 솥이 자갈밭에 끌리는 듯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님, 기침하셨사옵니까?”

 

 

 

소스라치게 놀란 길산이 바라본 옆의 모습은, 길산의 두 배는 될 듯 거대한 요물의 머리통이 벽 뒤에서 내밀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 요물은 입이 찢어질 듯 웃고 있었다.

데굴거리는 거대한 눈알은 빙글빙글 돌면서도 길산을 향해 자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길산은 비명을 지르며 열심히 다리를 놀린다.

 

그러나 무거운 바위가 몸을 짓누르거나 땅에 고정된 족쇄가 그의 발을 얽는 것 같이 몸은 쉽사리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다리가 너무 무거웠고, 요물은 등 뒤에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깔깔깔깔깔깔깔

 

 

요사스러운 웃음이 메아리친다.

겁에 질려 죽을 것만 같았다.

집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어머니가 떠올랐고,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바라고 생각한 와중에 늙으신 어머니가 제일 먼저 떠오르니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했다.

 

그러다 문득 스님이 자신을 걱정하며 일러준 그 절절한 충고가 떠올랐다.

 

 

 

자네 꿈속에서 자네보다 강한 이는 없네.

 

그 곳에서는 자네가 부처일세.

 

 

 

그 말이 떠오르자 길산은 도망가기를 멈추었다.

두려움에 몸을 떨며 눈앞에 놓인 것만을 보고 있던 것이, 마치 찬물을 뒤집어 쓴 듯 그 정신이 온전해진다. 요물은 이미 태산만큼 거대해져 있었고, 그 머리가 구름에 닿을 듯 했다.

 

그러나 길산은 그 요물을 목전에 두고도 결코 도망가지 않았다.

요물을 바로 서서 노려보았다.

 

그 요물은 온 세상이 쩌렁쩌렁 울리는 듯한 괴성을 지르며 그 거대한 손아귀를 길산을 향해 내리쳤다. 땅이 쩍 하고 갈라지며 흙먼지가 짙은 안개와 같이 뿜어져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 손은 길산을 누르지 못했다.

 

길산을 가운데에 두고 그 거대한 손바닥으로 연거푸 길산을 내리치나, 번번이 그 손바닥은 길산의 주변을 때릴 뿐 길산 본인은 건드리지 못했다.

 

 

겁주는 거 외에는 할 수 없는 거로구나.”

 

 

나직한 길산의 한마디.

 

그 말을 들은 요물은 세상이 떠나가라 괴성을 지른다.

 

시커멓던 하늘에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을 향해 환한 빛이 들어온다.

그 구멍을 통해 환히 빛나는 태양이 보이고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세상은 점점 환하게 밝아져가고, 그 요물의 모습은 마치 한 여름의 아지랑이 모양으로 사라져가는 것이었다.

그 소름끼치는 괴성도 희미해져가고 끝내는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길산은 자신이 도망쳤던 거처로 돌아갔다.

 

그 곳에는 자신이 거꾸로 꽂아 두었던 꽃이 남아 있었다.

 

그 꽃을 뽑아 드니, 주변은 다시 호화로운 집으로 변했고 그가 두고 도망 나갔던 아침상은 온갖 산해진미가 놓인 진수성찬으로 화했다. 길산의 손바닥에서 불길이 일어났고, 그 꽃은 삽시간에 타들어갔다. 그 붉은 꽃이 다 타들어가 새하얀 잿개비가 되어 흩날려 사라지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길산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 후, 이듬해 길산은 그토록 정성들여 지은 농사로 돈을 많이 벌었고 마을에서 제일가는 도요시절(桃夭時節)의 미인과 혼인을 올렸다.

그의 슬하에 아들이 셋, 딸이 넷이나 되었으며 모두가 효자 효녀라 일생을 즐거이 살았다.

 

길산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평생을 살며 사람들에게 이야기 했고, 그의 귀여운 손주들에게도 즐겨 이야기 하였다.

일흔의 나이에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그 지긋한 나이까지 사람들에게 쌓은 은덕들로 그의 장례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후에 그를 기리며 길산 장군이라고 높여 불렀다 한다.

 

 

 

 

 

 

 

 

 

 

 

 

 

 

 

 

 

 

 

 

 

 

그저 꿈속의 이야기일 뿐인데 참으로 기묘하구나.”

 

 

임금은 그 몽환적인 이야기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것에서 끝이 났을 뿐, 임금이 현재 처한 일들에 관해서는 연관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들 뿐 이었다.

 

 

아직 본질을 찾지 못하시는 모양입니다.”

 

 

의문하여 이야기를 스스로 곱씹는 임금을 바라보며 여인이 말한다.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 임금의 속내의 생각을 읽어내고 있다.

 

 

전하께서 보고 계시는 것이 사실과 다를 수도, 혹은 믿고 계시는 것이 그른 것일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게 또 무슨 말인가.”

 

 

그저 의문만이 눈에 비치는 임금의 용안을 보고 있던 여인은, 그 살가운 미소를 띠어 보인다. 자신의 주변을 의심하라는 의미인 것인지, 혹은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일들이 있다는 것인지 그저 생각만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이 크나큰 궁궐 안에 임금의 편이 없는데 누구를 믿고 있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보이는 그대로는 아닐 것이옵니다. 그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그저 여인에게서 답이 나오기만을 바라며 기다린다.

그 붉은 입술에서 이야기의 해답이 나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이해하시고 답을 찾으시길 바라며 한 이야기가 아니니 고민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그러하다면 내가 그토록 묻던 쥐떼와 과거시험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 줄 수 없다는 뜻인가?”

 

저는 전하에게 있어 그저 허깨비와 같은 이 이옵니다.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은 전하의 뜻이지요.”

 

 

어째서인지 여인의 미소는 더욱 짙어진다.

그러나 그 미소에 왠지 모르게 쓸쓸함이 담겨 있는 것이 임금의 눈으로도 확연히 보이니, 어떠한 까닭인지 거듭되는 의문만을 남길 뿐이다.

 

그때, 궐의 밖에서 낯익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보신각종(普信閣鐘)의 맑은 울림이 세상에 퍼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동이 터 오는 것을 알리는 그 울림이 여인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와중에 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가 도움이 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옵니다. 우선 쥐떼의 정체를 알아보러 가셔야겠지요.”

 

 

여태 여인과 함께 하던 심야의 시간은 그 흐름이 멎어 있었건만, 어찌하여 지금 시간이 올곧게 지나가 아침이 밝는 것인가. 임금은 창호를 바라본다. 진정으로 동이 터 오는 모양인지 밖에서 비춰오는 그 푸르스름한 빛이 퍽 밝아져 있었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전하께서 드신 도화주(桃花酒)는 영험한 것이니, 주무시지 않으셨더라도 그 옥체 또한 피로 없이 활기가 돋을 것이옵니다.”

 

전하, 기침하실 시각이옵니다.”

 

 

밖에서 정성스레 들려오는 알림의 말과 함께 지밀상궁(至密尙宮)들의 분주한 인기척이 진정으로 동이 터 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변화 속에서 약간의 당혹감이 찾아든 임금을 향해, 여인은 그 찰나의 쓸쓸함을 지우고 평소의 살갑고 생그레한 미소를 애틋하게 보여주었다.

 

 

 

지금부터 쥐떼에 관하여 저와 함께 찾으러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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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우리나라 이야기에는 항상 정해진 해결사들이 있지요.
지나가던 선비나 산신령, 혹은 스님들 ㅋㅋㅋㅋ
정말 이 분들은 만능이 아닐 수 없습니다 ㅋㅋㅋㅋ


얼마 전 어떤 분께서 네이버 웹소설 같은데에 업로드 안하는지에 대해 물으셨었는데.
네, 네이버 웹소설 공모전 중이라서 업로드 하고 있답니다 ㅎㅎ

네이버에서도 야화는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단지 잘 될런지는 모르겠네요.



그리고, 야화 속 임금이 순조가 아니냐고 물으셨던 예리하고 예리하신 분도 계셨는데.
순조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많이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ㅜㅠ
어쨌든 창작 소설인지라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들과는 무관합니다 ㅎㅎ
그래도 매우 잘 눈여겨 봐 주신 것이니 매우매우 감사드려요 ㅠㅠ



ㅎㅎ



지금이야 일 때문에 바빠서 소설은 취미활동으로 하고 있고, 그 탓에 연재가 자주 늦어지곤 하는데.
소설로 돈이 벌린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ㅋㅋㅋ


그나저나 조금 야해서 걱정이네요.
19 딱지를 붙이긴 했는데, 그래도 걱정입니다.
야화를 처음 계획했을 때, 결말을 정해두고 진행했는데.

결말도 19금이예요.
제가 전에 썼었던 ‘삼류 포르노 작가는 창조물을 죽인다.’ 만큼 야한 데...



ㅎㅎㅎㅎㅎㅎ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나저나 이번 편은 판타지 같은 느낌이 물씬 나는 것이 평소와는 조금 다른 듯 싶습니다.
언젠가 영화 나이트메어를 보고 꿈에 대해 영감 받았던 것도 있고.
제가 평소에 가위나 악몽도 자주 겪지만 꿈에서 잘 깨기도 하고 가위도 잘 풀기도 하고 그런 사람이라서 좀 꿈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성향이 많이 드러나네요 ㅎㅎ
언젠가 야화가 끝이 나면 판타지 소설도 한 번 써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야화보다도 먼저 계획했던 건데, 자리만 잡히면 쓰지 않을까 싶습니다.




ㅎㅎ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라구요.

오늘 밤에는 부디 좋은 꿈 꾸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출처 작성자, 본인, 윈스턴

야화(野話)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 첫 번째 밤, 광대패 속의 여인. : http://todayhumor.com/?bestofbest_258683

야화(野話)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 두 번째 밤, 절지당(絶指堂). : http://todayhumor.com/?bestofbest_260495

야화(野話)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 세 번째 밤, 원귀의 저주. : http://todayhumor.com/?humorbest_1294072

야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 네 번째 밤, 개천에서 태어난 괴물(上) : http://todayhumor.com/?humorbest_1296198

야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 네 번째 밤, 개천에서 태어난 괴물(下) : http://todayhumor.com/?humorbest_1299037

야화(野話)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 다섯 번째 낮, 쥐떼. : http://todayhumor.com/?humorbest_130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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