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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중에 김재규 재평가
게시물ID : sisa_7741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똥방구맛있어
추천 : 22
조회수 : 2460회
댓글수 : 78개
등록시간 : 2016/10/29 21:19:25

김재규는 조선 단종조의 충신 김문기의 13대손으로 3.1운동이 일어난지 7년 째인, 1926년 10월4일(음력)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경북 선산군 선산읍에 한 기업인이며 지주인 김형철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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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가난하지만 진취력이 있어 30대에 자수성가하여 정미소를 운영하고, 1년에 200백 석을 타작하는 지주가 되었으며, 선산면에 중고등학교가 없는 것을 한탄, 솔선해 모금운동을 펼쳐 선산중고등학교를 설립했었다.
 
부친은 설립한 학교를 사립학교로 소유하지 않으니 동리에서 진정한 선비라고 하였다. 그 후 이 학교는 공립학교로 되었다

김재규는 이러한 지방의 유지이며, 부유한 가정에 맏아들로 태어나 명랑하고 생기있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린시절 신동소리는 듣지 못하였으나 일찌기 천자문을 떼고 붓글씨를 즐겼으며, 운동에 소질이 있어 100m 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소학교와 안동농림학교를 졸업, 특별간부후보생으로 차출되어 일본군 제 52 비행사단에서 가미가제 (神風) 훈련을 받던 중, 임관 6개월전 일본의 패망으로 살아나게 된다.

해방을 맞아 돌아온 만 20세의 청년 김재규는 선산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가 1946년 12월 육사 2기생으로 임관하였다. 그의 동기생 193명 중에는 선산출신의 박정희도 끼어 있었다. 박정희 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의 첫 장교생활은 그리 순탄치 못하였다. 대전에 있는 2연대에서 근무할 때, 군경친선체육대회에서 패싸움이 발생하였다. 이때 미군 헌병이 2연대의 병사들를 총으로 위협하며 연행 하려고 하자 당직 사관이던 김 소위는, ‘왜 한국군을 미군이 연행하려는가’하면서 칼을 뽑아 들고 이를 저지했다고 한다. 
 
이사건의 책임으로 그는 47년 6월 건군이후 최초인 '명예 면관'을 당하게 되었다. 군문을 일시적으로 떠난 그는 그 후 김천 중학교와 대구 대륜 중학교에서 체육교사를 해야만 했다. 
 
이에 앞서 소위 였던 김재규는 소속부대의 연대장 김종석 중령이 좌익세포로 활동했지만 포섭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좌익활동에 제동을 걸자 이 패싸움 사건을 기화로 면관을 신청하였다는 것. 
 
그 후 연대장이 좌익활동으로 처형을 받자 이 같은 사실이 밝혀져 1년 4개월 만인 1948년 10월 소위로 다시 복직하게 되고, 1년 반 후인 1950년 3월에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3사단 22연대 2대 대대장 으로서 의정부에서 근무 중 한국동란을 맞게 된다.

백골부대라고 알려진 3사단은 낙동강 교두보의 동북방인 포항을 피로서 사수함으로 UN군의 반격의 발판을 제공 하였으며, 그 후 UN군과 함께 북진하여 원주, 고원을 거쳐 함경도 길주 명천까지 반격하게 된다. 
 
그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시 적의 포위망 속에서 헬리콥터에 의하여 극적으로 구출되었으나 거듭된 격전과 영양실조로 시력과 청력을 상실하였는데, 보좌하던 상사가 등에 업고 어떤 한의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은 덕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후 5사단 참모장과 36연대장을 거쳐. 3사단 부사단장으로 가게된다. 이때 사단장의 군인답지 못한 행동에 분개하여 전역을 하려고 결심하게 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육군대학총장 이종찬 소장과의 일화다 
 
이 장군은 그에게 ‘만일 그대가 모모 개인을 위한 군인이라면 군복을 벗되,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자처 한다면 개심(改心) 하고 내 예하로 오라’ 는 권유를 했다. 이 같은 권유를 받고, 진해에 있는 육군대학의 학생감독관으로 전임하게 된다. 
 
이것이 이종찬 장군과의 만남으로, 육군대학 부총장과 준장으로 진급의 계기가 될 뿐 아니라, ‘군의 정치적 중립’ 이라는 이종찬 장군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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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이후 새로운 삶을 걷게된 장군 김재규

자유당의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항쟁에 2만여명의 학생들이 데모에 참가하게 되자 경찰이 발포하여 142명의 학생이 사망하게 된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이 계엄사령관, 부사령관에는 김종오 장군을 임명한다. 데모가 계속되자 이들은 군대의 발포문제를 거론하게 되자 김종오 장군은 이를 이종찬 장군에게 알린다. 
 
진해에 있던 이종찬 장군은 ‘절대로 학생들에게 발포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라고 단연한 자세로 발포론을 배격함으로서 ‘대한민국 군대는 국민에게 발포하지 않는다’는 명예로운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군대의 명예는 전두환의 5.18 광주학살로 깨져 버리고 만다. 4.19직후 이종찬 장군,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을 하던 박정희 소장. 김재규 준장이 함께한 술자리에서 이들은 ‘총칼이 누구를 위한 것인데 선량한 학생들을 죽이는데 쓴단 말인가?’며 함께 통탄했는데, 19년 후인 1979년에 박정희는 왜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의문이다. 

1961년 5.16 군사쿠테타 발생시 김재규 준장은 국방부 총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국방부 장성들이 그렇듯이 그도 쿠테타에 가담하지 않았고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사실이 드러나지 않아 석방 되었다. 석방 직후 그는 호남비료사장으로 임명된다. 호남비료는 이문환이라는 광주의 갑부가 호남지역에 큰 공장이 없는 것을 개탄하여, 화순탄광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이용하여 질소비료공장을 만들려는 계획으로 자유당 때 부터 서독의 차관과 기술지원으로 시작했었다.
 
하지만 자금 동원 실패로 좌절상태에 있었던 것을 최고회의가 인수하여 완공시킴으로서 혁명정부의 성과를 나타내려는 야심찬 계획으로 현역장군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약 1년의 공사기간을 단축하여 공장을 완공하고 공장준공식을 마친 63년 9월 원대복귀를 희망하여, 6사단장으로 임명된다.

6사단장의 보직은 그로 하여금 학생데모를 진압하는 정치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첫 길을 걷게 하였다. 당시 정치적 상황은 2년간의 군정을 끝내고 63년초 민정이양을 하겠다고 선언한 상태에서 혁명정부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군사혁명후 1년여간의 경제적 불황, 인플레, 한비 사건등 4대 의혹사건 등을 겪은 군사정권은 62년 민정이양을 선언하고 63년에는 민정불참 선서까지 하였으나, 약속을 어기고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46대 45라는 표차로 당선, 한일협정 체결을 서두르고 있었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5천여명의 학생들의 데모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 2개 사단이라는 막대한 병력을 서울에 투입하는 6.3사태가 터지게 된다.

이때 서울에 진입한 부대가 바로 김재규 장군이 지휘하는 6사단이었다. 그는 학생들과의 유혈충돌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야간통행금지 위반자를 체포하는데 군이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고, 경찰이 담당토록 하였으며, 대학에 주둔한 병사들에게 환경정리 작업을 실시토록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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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개월간의 사단장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65년 1월 소장으로 진급, 6관구 사령관을 거쳐 68년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보안사령부는 알려진 바와 마찬가지로 박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심복기관으로 그 위력은 많은 군인들의 시기와 원한의 대상이 었음은 물론이다

그러한 보안사령관으로서의 김재규 장군은 71년 대통령선거에서 누구도 감히 직언할 수 없는 ‘3선이 마지막이다’ 라는 공약을 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박대통령이 장기집권의 욕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된다. 
 
또한 박 대통령이 육사8기 김종필을 견제하기 위하여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을 중심으로 육사11기 전두환, 노태우 등 하나회를 조직, 박대통령의 친위대를 만드는 것을 알고 ‘젊은 장교들을 능력껏 공평하게 양성해야지 사병화 (私兵化)를 해서는 안된다’고 반대했다.

그의 이 같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거 5개월 후인 71년 9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 주둔하고 있는 제3군단장으로 발령받게 된다. 2개월 후인 12월 6일 박대통령은 국가비상 사태를 선언하고, 72년 10월 17일에는 게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 휴교령과 함께 모든 정당활동을 금지시키면서 유신헌법을 발표한 후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의하여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2000여표 중, 단 한표의 반대도 없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다. 
 
김재규는 1973년 3군단장을 마지막으로 예비역 발령을 받고 25년간 몸담아 왔던 군대를 떠나, 위로직인 유정회 국회의원 9개월, 그리고 73년 12월에 중앙정보부 차장 9개월 등 한직으로 떠돌게 된다.

그러던중 1974년 4월 윤필용 사건이 터졌다. 수도경비사령관이라는 직책의 장군이 지은 죄는 업무상 횡령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이었다. 그러나 내막은 윤필용이 친위대를 이용, 군부와 대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김재규가 보안사령관 시절 올렸던 건의가 옳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그를 불러들여 74년 9월 건설부장관으로 임명한다

당시 한국경제는 유류파동으로 달러가 고갈된 상태여서 이 환자를 치료하려면 달러가 약이다 라고 생각한 김 장관은 중동건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 한국건설업체를 진출시켜 막대한 외화를 벌어 들임으로서 경제위기를 모면케 하고 '건설의 마술사'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2년3개월의 장수 장관이 된다.

76년 12월 운명의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된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심복 부하이며, 박정희가 키워 었다는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소령에서 대령 진급까지 3년인데 대령을 6년 달고 가장 힘들 때 도와준 사람은 이종찬 장군이었다. 
 
박정희는 김재규의 능력을 알고 그의 용인술에 따라 적재적소에 활용하였으며, 불필요할 때는 그의 방식대로 가차없이 멀리하였다. 김재규 역시 박정희가 시키는 대로 하는 심복이 아니라 소신껏 직무를 수행하며 잘못이 있으면 직언하는 견제자로서의 역할을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할 당시 국내외 정세는 유신헌법 발표 이후 정세는 더욱 악화되고, 언론을 통한 정부의 비판이 계속되자 74년 12월 부터 다음해 여름까지 중앙정보부는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광고주들에게 압박을 가함으로서 동아일보사로 하여금 박정권에 굴복하도록 하였다.
 
75년 5월에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여, 유신헌법의 비방과 반대를 금지하며, 학생의 정치관여와 집회를 금지하며, 이 명령에 위반하는 모든 언동을 보도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또 모든 위반자는 영장없이 체포되며, 1년 이상의 징역에 처벌하며, 소속단체나 기관은 휴업, 폐간, 또는 해체에 처한다는 엄령이 내려 진것이다.

76년에 들어서서, 박정권 비판세력의 중진이며, 정계및 종교계의 원로들이 3.1절을 기하여, 명동성당에 집합하여 민주구국 선언을 발표하여 민주주의의 회복, 정치범 석방과 박대통령의 사직을 요구하자, 정부는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등 야권 명사를 체포하여, 5년 내지 8년형에 처했다. 함으로서,  
 
과거 일제시대에 전국적으로 3.1운동을 조직하여 일제 총독부를 전율케 한 3.1 운동 지도자들도 3년의 징역형을 받았던 점을 생각한다면 박정권의 조치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대비케 한다. 여기서 한국기독교협의회 인권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1970년부터 1979년까지 양심수의 총계와 관련 법조항 그리고 직업별 분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관련법규와 구속(구류)자 수

국가보안법.반공법 261명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 72명 
공무집행방해및폭행 38명 국가보위법.노동법 46명 게엄포고령 53명 
내란죄 8명 방화죄 9명 경범죄처벌법 1,184명 
긴급조치 1호 48명 긴급조치 4호 142명 
긴급조치 9호 580명 소요죄 108명 
기타.미상 155명 
 
양심수의 직업

학생.청년 1,197명 노동.농업242명 성직자 82명 
종교단체종사자 50명 언론인.문인 84명 교직 52명 
정치인 70명 회사원.연구원 33명 군인.공무원 5명 
상업.사업 35명 무직 25명 기타 6명 
미상 805명 
 
그는 옥중수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76년 2월 4일 돌연 대통령께서 집무실로 부르셨다. 갔더니 중정부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순간 기분은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본인은 좋다 그러면 이제는 순리적 방법으로 대통령을 설득하여 유신체제를 고쳐보자, 절호의 찬스다 라고 생각하면서 처음에는 대통령의 의중을 탐색하는 데 노력했다"고 말하고 있다

김재규는 자신의 중정부장 임명을 박대통령을 설득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정보부장의 임명을 수락 하였으므로, 그의 과제는 유신체제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편에서 완화시키도록 하는 것이었다. 
 
중정부장으로서 김재규는 긴급조치9호의 해제 건의를 세번이나 하고, 긴급조치 9호를 완화시키는 10호를 선포토록 하였으며, 구속된 학생을 석방하는 등,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을 했다. 

긴급조치완화를 위하여 그가 조치한 특기할 만한 일들을 들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77년 1월15일: 김 지하 시인의 1년10개월만에 가족면회.
3월31일: 김 철 통일사회당 고문의 석방
5월 10일: 민주구국헌장 지지서명운동 관련자 석방
7월 17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복역중인 신부, 목사, 학생 등 14명의 석방
10월 29일: 같은 일로 구금되었던 고은 시인 등의 석방
12월 31일: 77년 3월22일 구국선언사건 관련자 11명의 석방
12월19일: 전주교도소에서 복역중이던 김 대중씨를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이송
1979년8월 15일: 재일교포 15명의 석방과 사형수 1명의 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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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유신체제가 들어선지 7년째,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지 4년을 들어서며 체제완화에 대한 건의는 묵살되고, 한미관계와 정국은 악화만 되어가고 국민들의 저항은 더욱 격렬해져, 8월에는 Y.H.여공사건 10월에는 부마사태가 일어난다. 
 
현지에 가서 파악한 결과 180명을 구속하였는데 학생은 불과 16명 밖에 안되며, 나머지는 모두 민간인이고, 소위 남민전이란 불순세력의 배후조종이란 증거도 없어 하나의 민중봉기, 민란으로 파악하였다. 수십대의 자동차와 10여개의 파출소가 파괴 되었으며, 데모대에게 주부들이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는 방법으로 격려하였다.
 
그의 옥중수기다. "이는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이며 물가고에 대한 반발과 조세저항이며, 정보판단에 의하면 곧 전국 5대도시로 확산될 것이라고, 보고해도 대통령은 믿지 않았다", "대통령은 부마사태는 신민당의 조작에 의하여 그런 것이며, 좀 더 정확히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명을 죽여도 까닥없는데, 데모대원 1-2백만 정도 죽여도 걱정없다’는 말에는 솔깃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국민들의 희생을 목전에 두고 더 이상 지체할 겨를이 없었읍니다."

1979년 10월 26일 유신의 심장을 쏘는 혁명거사는 실행되었고 핵을 잃은 유신체제는 붕괴되었다, 1980년 5월24일 54세였던 그의 마지막 말이다.
 
"나는 혁명은 결행하였으나 혁명과업은 다른사람의 손에 의하여 수행될것이며,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요" 
 

원본 기사 보기:서울의소리 



단순히 차지철과 권력싸움에서 밀려서 암살한 암살범이라는 오명을 벗기고 


이제 진짜 재평가 해야되지 않음?


최태민도 족칠라고 했다던데


출처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tock_new1&no=4264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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