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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스압]'X 생태 보고서' 10~11편
게시물ID : panic_914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야설왕짐보
추천 : 4
조회수 : 155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11/08 06: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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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X생태보고서_표지_긴것_최종 (1).jpg
         ※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 및 인물, 지명, 배경등은 사실과 무관합니다.






 
 
 
X생태 보고서
: 살인마, 돌아이 거기에 왜 하필 나?
 
 
<10>
 
 
시 검문 있겠습니다. 어라? 경찰이시네?”
 
현실과 꿈을 분간하지 못하는 경찰 Z, 놈을 구슬려 검문을 통과해보겠다는 나의 계획은 그야말로 완벽해 보였으나, 막상 경찰을 대하고보니 엄청난 긴장감이 몰려왔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은 물론 이가 위아래로 딱딱 부딪히는 것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경찰 Z가 내 말을 찰떡같이 믿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 * * * *
 
 
잘 들어 Z, 이건 꿈이야. 그리고 우린 꿈 속에서 일종의 미션을 수행중이고!”
! 미션이요? 이 꿈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는데요? 대체 그 미션이란 건 뭐죠?”
이 꿈속에서 넌 사실 경찰로 위장한 스파이야. 특수 임무를 띄고 공항으로 향하는 중이지, 그러니까 이제부터 넌 검문소의 경찰을 속이고 공항으로 갈 수 있게 우릴 도와야해!”
! 스파이! 전부터 바라던 거에요! 제임스 본! 그럼 저도 기억을 잃어버린 건가요?”
기억? ! ! 물론이지! 아직은 기억이 완전하지 않지만 넌 스파이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저 검문소를 통과해야 돼! 알겠어?”
옛 썰! 걱정 붙들어 매세요! 제가 원래 연기 하난 끝내주거든요!”
그래 부디 실수 없길 바래...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 실수를 하거나 신분이 탈로나면...”
탄로나면? 꿈에서 깨는 건가요?”
그래! 꿈에서 깨는 것은 물론, 다시는 루시드 드림 같은 건 꿀 수 없게 될거야! ... 뭐랄까? 이 실패가 트라우마가 된다고나 할까? 집중하려 하면 할수록 상처가 생겨서 다시는 우릴 만나지 못 할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제가 이래뵈도 스파이영화 광팬입니다!”
 
 
* * * * * *
 
 
살짝 맛이 간 놈을 믿고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어느때보다 반짝이는 Z의 눈빛, 거기에 나와 우리 모두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아니 관할지역이 어디신데 여기까지 오셨나그래?”
안녕하세요. ㅇㅇ지구대 Z순경입니다. 바쁘신데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하하
어이구 멀리서도 오셨네. 그래 거기는 비상이 안 걸렸나?”
비상이요?”
그려! 비상. 지금 뭐야 연쇄 살인인가 뭔가가 터져서 엄청 시끄럽잖어. 나도 지금 급하게 검문 나가래서 나오긴 했는데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어. 근데 어디서 사람이 많이 죽고 상했나봐...”
이런! 그런 놈들을 붙잡아 사회 정의를 빨리 실현해야 할 텐데. 안타까울 뿐입니다.”
 
다소 어색한 지점은 있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연기였다. 떨지도 않고 천연덕스럽게, Z를 과소평가 했던 것을 후회하며 나도 조금은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나를 보며 말했다.
 
어라? 이 분은 뉘시길래 암말도 안하고 계시나? 어이구! 어디 아파요? 왠 땀을 그렇게 흘려 젊은 사람이?”
아하하하! ... 제가 지금 좀 아파서요. 콜록콜록! ! 아프다! 나는 아프다! 아파... 죽겠다. 콜록콜록
뭔가 되게... 어색하네?”
 
어색하네.’ 그 별 거 아닌 한 마디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눈치를 챈 걸까? 온 몸의 털이 쭈뼛하게 일어서고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어색한 침묵과 의심어린 시선이 더해졌다. 견딜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불안함과 싸우느라 미치겠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짜증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X였다.
 
아 진짜 거! 대충하고 빨리 갑시다! 확 죽여버릴까보다.”
뭐요?”
 
안그래도 의심스런 눈빛을 보내던 경찰이 X의 한 마디에 발끈했다. 다행히 사그라든 뒷 부분의 '확 죽여버릴까보다'는 듣지 못한 듯 했지만 찡그린 미간과 꾹다문 입술이 금방이라도 신분증을 요구 할 것 같은 기세였다.
 
어이! 거기 지금 뭐라고 했어? 보아하니 나이도 젊은 친구 같은데, 아버지뻘 되는 사람한테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말하면 쓰나!”
 
마음 같아선 X의 무릎을 꿇리고 사죄시키고픈 마음이 간절했지만 마음 뿐, 굳어버린 몸과 혀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자 그런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X가 또 한 번 불을 질렀다.
 
... 불만있습니까?”
뭐야! 이봐 당신! 거 좀 잠깐 내려봐! 아 이거 오늘 뚜껑열리네!”
 
수월하게 통과하리라 여겼던 검문소였다. Z도 구워삶아 놨겠다. 운이 좋으면 그대로 공항까지 직행이라 믿었다. 헌데 그걸 나의 어색한 연기와 X의 불같은 성미가 망쳐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위기. 검문소 밖 경찰들의 시선도 우리를 향했다.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한 표정이었다.
 
... 이대로 강행 돌파를? ... 아니야. 그랬다간 곧 경찰들이 따라붙고 도로가 통제 될 거야. 거기다 검문소 주변 경찰들이 너무 많아. ...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BX를 따라 화가난 얼굴이라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거고, 주방장 역시 처음부터 나 만큼이나 얼어 있었다. 게다가 어색한 한국어 발음때문에라도 닥치고 있는 게 최선이었다.
그럼 딱 하나, 얼간이 경찰 Z만 남는데... 이 놈도 상태가 안 좋았다. 조금 전까지의 자신있는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조금 전부터는 꿈이 붕괴되고 있어라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우물쭈물 안절부절이다.
 
어허! 너 내려 임마! 내리라고!”
허 참... 내리라면 못 내릴 줄 알아!”
 
나는 눈을 감았다.
 
오오 신이시여 정녕 이게 저의 마지막이란 말입니까? 이대로 저를 버리시나이까?’
 
생전 해본 적 없는 기도가 내 입술을 들썩였다. X는 금방이라도 차에서 내릴 기세였고, 경찰은 경찰대로 혼쭐을 내주겠다며 성이 나 있었다. 누가봐도 끝장 나기 일보직전이었다. 회심의 도주는 이것으로 끝나고, 긴 수감생활이 눈 앞에 펼쳐졌다.
 
행복했던 날들이여 바이바이...’
 
하지만 그때, 내 기도에 답하듯 얼간이 Z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저기! 경사님!”
뭐여! 말릴 생각이라면 허덜말어! 나 지금 뚜껑 열렸응께!”
아니요. 싸울 때 싸우시더라도 알 건 알고 싸우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뭔데! 말할라면 빨리허오! 나 지금 몹시 기분이 안 좋당께! 어이구 서울 생활 20년이 넘었는데 사투리 나오는 거 봐라!”
그게...”
 
갑자기 뜸을 들이는 Z, 마른침을 연거푸 삼킨다. ‘그래 너도 결국 거기까지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절망이 밀려왔다.
그리고 Z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경찰청에 모 국장님 자제분이신데요... 창피하지만 저희가 부득이하게 공항까지 모셔가고 있습니다.”
? ... 경찰청 구... 국장?”
요번에 새로 오신 국장님 있잖아요. 성함이 뭐라더라?”
이칠성 국장? 그 성격 콸콸하신 분? 나도 그 분 좀 알지!”
! 맞아요! 이칠성 국장님! 그 분 자제분이신데... 부득이하게 저희가...”
험험! ... 뭐시냐! ... 국장님 자제분이라... 에이 그렇다고 말투가 그래서야 어흠! 어흠! 이건 뭐 내가 꼭 국장님이 겁나서라기 보다는... 내가 워낙에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고 뭐 그러니까... 일단은 가시고... 혹시 뵈면 내 얘기 좀 잘해줘요. 흐흐 나 ㅇㅇ서 박남우요 하하핫.”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넘을 수 없을 듯 보였던 역경의 파도가 물러나자 저 멀리 평온의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나의 안식처, 공항으로 가는 실크로드!
하지만 그때였다. 통과하라던 경찰이 갑자기 다시 우리를 막아 섰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그의 얼굴엔 알 수 없는 의혹과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했다. 당황한 건 나 뿐만이 아니어서 긴장한 표정의 Z가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 저희 가는 거 아닌가요?”
가는 것은 가는 것인디, 나가 지금 쪼까 찜찜한 것이 떠올라서 말이오!”
? 대체 뭐가?”
그 방금 말한 이칠성 국장님 말이오.”
... ... 그분이 왜요?”
나가 알기로는 그 분 자제가 딸이란 말이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적당히 둘러댄 거짓말이 이렇게 빨리 발목을 잡을 줄이야.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믿음직스럽던 Z 역시 변명의 말을 잃고 핸들 사이에 고개를 처 박았다. 또 다시 찾아온 위기, 이대로는 Game over. 내 인생의 평온은 대체 언제쯤이나 찾아오는 것일까? 잔잔해진 듯 보였던 고난의 바다가 다시금 성을 내기 시작했다. 위기의 파도가 몰아치고, 운명이란 이름의 배가 세차게 요동쳤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쓸데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말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엉엉... 모하러 내가 X 이 놈을 숨겨줘서... 엉엉...”
 
서글퍼서 눈물이 다 나왔다. 헌데 그때였다. 앞을 가로막던 경찰의 표정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어딘가 조금 불편하고, 어딘가 조금은 민망한 표정이더니,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Z가 앉은 운전석으로 다가왔다.
 
아따 내가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구만...”
? ... 뭐요?”
숨겨뒀다매?”
? ... 숨겨요?”
그려! 이 국장님이 평소 그렇게 호탕하셔서 여자들이 줄줄 따르시더만, 숨겨둔 자식까지 있을 줄은 나가 꿈에도 몰랐구먼?”
? ... 숨겨둔 자... 자식이요?”
얼래? 내가 지금 다 들었는데 뭘 또 숨겨. 한 식구끼리! 저기 뒤에 앉은 젊은 친구가 숨겨둔 아들 아니냔마시! 나가 그런 것도 이해 못 할 줄 알고? 원래 영웅호색아닌가! 그 뭐야! 박통도 여대생끼고 시바스리갈 마시다 가고, 이회장도 얼마전에 보니께 너 때문에 성공했어이랐다잖소! 하하하핫!”
? ... ... 그렇죠.”
아이고 나가 주책이네! 나는 지금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들었소! 이 국장님이면 나중에 경찰청장까지 오르실 양반인데, 그런 몹쓸 소문이 돌아서야 쓰나? 걱정마소 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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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 및 인물, 지명, 배경등은 사실과 무관합니다.
 
기대 밖의 전개였다. 어안이 벙벙하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비록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꼴이지만 이것도 행운이라면 행운, 나의 주접과 검문소 경찰의 오해가 다시금 고난의 바다에 햇살을 내리쬐고 있었다.
 
경사님. 끝까지 비밀로 해주십시오. 국장님께는 꼭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묵묵히 업무에 매진하고 계시는 박남우 경사님의 열정과 특히 그 과묵함을!”
하하핫! 그러겠는가? 과묵한 거 하면 또 나가 최고제! 걱정을 하덜 말어!”
감사합니다. 그럼 충성! 수고하십시오.”
그려! 충성! 충성! 욕보소! 자제님도 조심히 가시고. 아이코 방정이야. 입조심해야되는 것인디! 하하핫! 나는 아무것도 못 봤소. 나는 ㅇㅇ서 박남우요. 하하핫!”
 
박남우 경사는 즉시 비켜서며 신호를 보냈고, 일행의 다른 경찰들이 도로를 막아선 바리게이트를 치웠다. 길어진 대화가 시선을 끌긴 했지만 다행히 더 이상의 의심은 없는 듯 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몇 번이고 벼랑 끝에 몰린 긴박한 전개였다.
 
후아아아! 걸리는 줄 알았네!”
그러게요 꿈이지만 저도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땀이 다 나네요.”
우리 사람 불알이 쪼그라들었다해! 근데 우리 공안은 돈 주면 다 된다해!”
 
X도 거들었다.
 
다 내 덕분인 줄 알아!”
닥쳐! 이 자식아! 어디까지나 이건 내 공이야 으하하하핫!”
 
그렇게 차는 달리고 검문소는 어느새 멀어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불안하다해! 검문소가 생긴 거 보니 우리 잡으려고 난리인가 보다해! 걱정된다해! 잡히면 나는 끝장이다해!”
그러게 임마! 누가 사람을 죽여서... 만두를... 에라이 나쁜놈!”
어쩔 수 없었다해! 고기를 살 돈이 없었다해!”
야 이 새끼야! 그 깟 돈 몇 푼 아끼자고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
나도 반성하고 있다해! 다시는 안 그럴꺼라해!”
 
그때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경찰 Z가 말했다.
 
저기 말씀중에 죄송한데 라디오 좀 틀어 봐도 되요? 자각몽 중에 라디오를 틀면 뭐가 나오는지 궁금해서요. 원래 이 시간엔 ㅇㅇㅇ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하거든요. 음악도 듣구요.”
 
검문소에서의 긴장감이 채 가시지 않아 음악따위를 듣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Z의 말을 듣고나니 제법 솔깃했다. 안전한 도피는 우리의 최우선 과제였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를 제외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라디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빨리 틀어봐 우리에 대해 뭐라고 하나!”
네 그럼...”
 
Z가 라디오를 켰다. 아니나 다를까? 정규방송이 중단되고 뉴스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긴급속보입니다. 경기도 ㅇㅇ동에서 다수의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이 현재 사건 현장을 확인하고 있지만 밝혀진 사상자의 수만 10여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큰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신고를 받고 최초 출동했던 경찰 ㅇㅇㅇ씨는 현재 피습을 당해 중태인 것으로 확인 되며, 현장을 이탈해 도주중인 유력한 용의자 4명은 물론 함께 출동했던 경찰 Z씨의 행방도 묘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경찰은 각지에 임시 검문소를 세우고 조사중에 있으며 빠른 시일내에 범인들을 체포할 수 있도록 시민들의 협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아 추가적인 속보입니다. 용의자들은 지금 경찰차를 탈취해 인천/김포 방향으로 도주중인 것이 최종 확인되었습니다. 경찰은 이들이 최근 일어난 일련의 연쇄 살인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인근 CCTV를 확보한 경찰은 남녀 4인과 그들에 의해 억류중인 경찰관 Z의 행방을 찾고 있습니다. 혹 이와 비슷한 광경을 목격하신 분께서는 국번없이 ㅇㅇㅇ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뒷골이 땡겼다. 검문소 통과 후 그나마 찾아왔던 평온이 라디오에서 들려온 속보를 듣자마자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격정적인 풍랑이 몰아치는 불안과 초조의 바다 위, 급히 주변을 돌아보지만 누구하나 나를 도울 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동경로까지 알아냈어. 이제 우리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야!”
야하하! 신기하네요. 역시 꿈은 꿈이야. ㅇㅇㅇ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할 시간인데 역시 안 하잖아요.”
 
다급한 외침에도 들려온 것은 역시나 자각몽 운운하는 Z의 허튼 소리뿐, 뉴스가 임시 검문소를 포함한 일선경찰들에게 알려진다면, 조금 전 만난 그 경찰도 곧 우리의 정체를 눈치 챌 게 뻔했다.
 
지주! 다른데도 좀 틀어봐라해! 음악 좀 들으면서 가자해!”
얌마! 넌 지금 음악이 문제냐!”
제가 돌려볼께요.”
 
버럭 화가 치밀었다. 현실감각이라곤 1g도 없는 미치광이들의 집합소, 그 와중에 홀로 제 정신을 유지한다는 건 말 그대로 미칠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때 Z가 돌린 다른 주파수에서도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쇄 살인범을 추적중이란 뉴스 보도해드렸구요. 이번엔 국제 뉴스입니다. 내전이 격화되고 있는 콩고의 왕자 나비두 토르깐이 지금 시각 1130, 국제 사회의 도움을 요청하고자 국왕 전용기로 김포공항에 입국했습니다. 이번 23일의 순방기간 동안 토르깐은...]
 
! 지금 들었어?”
? 뭘요?”
콩고왕자! 그것도 김포에!”
그래서요?”
그것도... ... 국왕 전용기!”
 
머릿 속이 띵해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느닷없는 콩고 왕자의 한국 방문, 그것도 국왕 전용기를 타고, 허고 많은 공항 중 김포공항에... 이건 그야말로 초 슈퍼 울트라 캡숑 짱 블링블링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운도 이쯤되면 신의 계시나 마찬가지. 의기양양해진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완벽해! 이렇게 우리의 대 탈주가 완성되는 것인가?”
거봐! 콩고 가려면 김포공항에서 비행기 타는 것 맞잖아!”
 
내내 X와 떠드느라 운전석 쪽의 일엔 도통 관심조차 없던 B가 끼어들어 한 마디를 보탰다. 평소라면 대번에 면박을 줄 멘트였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신의 계시가 아니고서는, 국내선 전용의 김포 공항에서 콩고행 비행기를 탈 기회가 찾아 올리 없는 것이다. 운명의 여신이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결단의 순간, 나는 휘몰아치는 고난의 풍랑을 바라보며 외쳤다.
 
가자! 김포 공항으로!”
 
최후를 향한 마지막 플랜이 가동되려 하고 있었다.
 
 

 
 
<11>
 
   금은 들 떠 있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희망의 나래를 펼친 꿈같은 시간이었다.
 
B는 콩고로 가서 미완의 사랑을 종결짓겠다는 쓰잘데기 없는 희망에 젖었고,
XB를 도와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 여차하면 의사양반도 처지하겠단 얄궂은 희망에...,
주방장은 내전이 한창이라는 콩고로 가 최고의 인육만두를 만들겠다는 끔찍한 희망을,
경찰 Z는 루시드 드림의 환상에 젖어 모험을 즐기겠다는 부질 없는 희망,
나는 나대로 인생의 골칫덩이들을 아프리카 오지로 날려보내겠다는 희망에...
 
각자의 지향점은 달랐지만 꿈을 향해 달린다는 공통점으로 우리는 어느새 하나가 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다더니, 역시나 우리들의 혼은 비정상이지 않았다.
상황이 나아지자 행복회로도 긍정적 에너지를 보탰다.
 
하긴 뭐! 지금 아니면 내 인생에 언제 경찰차를 몰아보겠냐!’
 
행복회로의 감언이설(甘言利說)은 최고였다. 달콤한 말로 구슬리며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다. 나라고 허세와 출세욕도 없겠는가? 취업은커녕 방구석 백수에 지나지 않았던 내가 차를 끌고 제복까지 입으니 공무원이라도 된 양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래! 공무원이 따로 있어? 차 몰고 유니폼 입고 다니면 경찰공무원이지! 그거 시험 되게 어렵다더라! 위기는 곧 기회라더니, 이 기회에 나 경찰이나 해볼까?’
 
어느덧 나는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었다. ‘불안하지 않다.’ ‘다 잘 될거다.’ ‘별 일 아니다.’ 자아도취에 빠지자 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이제껏 나를 짓눌러온 불안과 공포도 눈 녹 듯 사라져 갔다. 정신나간 4인조에 완벽히 녹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저 멀리 웅장한 외관과 함께 모두의 꿈을 이뤄줄 오즈의 마법사가 있는 에메랄드의 성이, 아니 콩고 왕자가 기다리는 김포공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항이다 와하!”
! 정말왓다해 김포공항이다해!”
콩고가 우리를 기다린다!”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우릴 막을 것은 없고,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거란 기대만이 가득했다. 경찰도 차마 우리가 김포공항으로 향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던지 검문소도 경찰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뻥 뚫린 도로만이 우리의 미래를 암시하듯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차를 세우고 공항 입구에 들어서자 심장이 더욱 세차게 뛰었다. 나는 진짜 경찰이라도 된 양 목을 빳빳이 세웠고, 다른 네명도 두리번 거리기는 했지만 어색한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 마지막 난관이 남아있었다.
 
콩고 왕자를 찾는 것과 그를 설득해 3인의 미치광이를 국왕 전용기에 태우는 것
 
그거야말로 이 게임의 엔딩크래딧을 띄울 마지막 보스이자 최후의 미션이다. 밀려드는 부담감에 입맛이 썼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반드시 불가능할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 이제껏 내가 겪은 고난과 위험의 크기는 컸다.
최강 돌아이의 절친으로 30년을 살았고, 연쇄 살인마와 애틋한(?) 동거도 경험했다. 인육만두 전문점 사망유희의 대학살에서 용맹히(?) 살아남았으며, 출동한 경찰도 슬기롭게(?) 물리쳤다. 그 뿐인가? 경찰을 구슬렸음은 물론 탁월한 언변(?)으로 삼엄한 검문까지 피했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심장부 김포공항에 당당히 입성한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먼 훗날 나 스스로 인생을 돌이켰을 때, 이것은 가장 빛나는 황금의 시기로 기억될 것이다.
물론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너무 들떠 있었을까? 아니면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긴장이 풀렸을까? 어느 순간 XB가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가까운 항공사 탑승수속장에선 낯익은 실갱이가 한창이었다.
 
시끄럽고 콩고행 비행기표 주세요.”
죄송하지만 고객님 저희는 국내선만 운행을 하고요. 그나마도 일본이나 중국정도는 항공편이 있기는 한데, 콩고행은 없어요. 그건 인천공항에 가셔도 마찬가지 일거에요. 직항노선을 운영하는 곳도 없을뿐더러, 내전중이라 아마 방문자제국가일텐데 여기서 이러시면...”
시끄럽고 다 알고 왔으니까. 표 내놔욧! 오늘도 타고 온 사람 있잖아요!”
고객님 정말 정말 죄송하지만 김포공항에 내리는 콩고발 항공기는 없습니다. 이건 제가 장담드릴 수 있어요. 해외발 항공편은 대부분 인천공항에...”
또 이러네. 콩고 왕자 오늘 왔다면서요.”
콩고 왕자요?”
네 콩고왕자.”
고객님 그건 말이죠... 어휴!”
 
탑승수속 담당 직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신호등처럼 변하고 있었다. 진상, 그래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지. 마음 같아선 한 대 후려치고 싶을 것이다. 그 심정은 당해본 내가 제일 잘 알았다. 마음 같아선 이 흥미진진한 실랑이를 더 두고 보고 싶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혹여 저 직원이 시큐리티 직원이라도 부르면 낭패가 생길지도 몰랐다.
나는 급히 달려갔고 매우 바람직한 타이밍에 곁에 선 X의 입도 막았다.
 
“B, 이 여자 죽일까?”
뭐라구요 고객님?”
! ! ! 저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 친구들인데요. 뭐랄까? 살짝 아시죠?”
 
내가 사과의 뜻을 표하며 머리위로 손가락을 빙빙 돌리자, 직원은 짜증이 난다는 듯 돌아섰다.
 
아 정말 재수없을라니까.”
왜 이래! 우리 여기서 비행기 타는 거 아냐?”
저 여자 마음에 안든다 A, 우리 B를 귀찮아하는게 막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네 손짓,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
! ! ! 진정들 하시고, 니들 돈 있어?”
없다.”
여기는 돈내고 사는데야. 우리 돈 없잖아. 내가 지금 머리 위로 손가락을 빙빙 돌린 것도 공짜냐 아니냐 그거 표시한거야. 돈 없으면 저기서 비행기 못 타.”
그런가?”
그래! 그래서! 우리가 콩고 왕자를 만나려는 거지. 그러니까 이것만 생각해. 돈있음 여기! 없으면 콩고왕자!”
... 없으면 콩고왕자... 왠지 납득이 된다 A.”
 
자본주의의 힘이란 역시 무시무시했다. 막무가내였던 XB도 돈 앞에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두 사람을 달래고 한시름 놓으려던 찰나, 이번엔 주방장과 경찰 Z가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니 조금 떨어진 대합실 TV앞에 넋을 잃고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 니들은 왜 여기와 있어!”
우와앙! 저거봐요 저거!”
그래 저거 좀 봐라해!”
 
배시시 웃으며 TV를 가리키는 Z, 무언가 찌릿한 위기감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모여있는 일련의 사람들은 모두 TV속 뉴스속보에 집중해 있었는데, 어둡고 흐릿한 CCTV화면과 함께 익숙한 몰골들이 보였다.
 
우리사람 TV출연 처음이다해!”
비록 꿈속이지만 TV출연은 저도 처음이에요. 엄마도 보고 계실까? 하하핫
내가 미.친다 미쳐!”
 
역시나 제 정신인 사람은 나뿐이었다. 공개된 CCTV의 화질이 좋지 않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콩고 왕자도 못 만나고 끝장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안심도 잠시, 화면은 이내 친숙한 얼굴의 앵커를 지우고 우리의 예상 몽타주와 도주경로, 그리고 신상정보를 뿌려 대고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끔찍한 살인행각을 저지르고 도주중인 범인들은 4인조로 구성되어 있으나, 현재 억류된 인질 Z의 억류 과정에 반항의 흔적이 없고 순순히 차에 올라탄 것으로 미루어 공모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출동했던 경찰 한 명을 포함 총 5인조의 범인이 현재 도주중이므로, 시민들께서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아직 범인들의 구체적인 신상이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경찰은 이들이 시 외곽으로 빠져나가거나 혹은 중국, 일본으로의 밀항 가능성도 염두해두고 검문, 검색을 강화중입니다. 혹 수상한 4인조 혹은 5인조의 일당을 목격하신 분께서는 즉시 신고를 바라구요. 다음은 현장에 나가 있는...]
 
검문, 검색을 강화중이란 말에 불안감이 가중됐다. 한시라도 빨리 일행을 콩고행 비행기에 태워야 겠다는 조급함도 몰려왔다. 그나마 불행중 다행인 것은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경찰의 예상도주로였다. 친절한 뉴스 속 설명에 따르면 대부분의 경찰이 항구와 지방도로에 집중되어 있었고, 설마 우리가 김포공항에 있을거란 추측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경찰도 미치지 않고서야 우리가 콩고로 갈거라곤 생각 않겠지. 김포공항으로 왔을거란 것도. 제 정신으론 여기에 올 이유가 절대 없어.’
 
심각한 나와 달리,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의 첫 TV출연을 기뻐하는 정신 나간 4인조, 나는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떨쳐내리라 다짐했다.
 
그러니까 너무 바짝 붙지도 말고 너무 떨어지지도 말고, 4명이 몰려 있지도 말고, 그렇다고 혼자다니진 말고... ! 복잡하다 복잡해! 아우 머리 아파! 그냥 다니면 안돼?”
 
갑작스런 나의 행동지령에 B가 짜증스레 투덜거렸다.
 
경찰이 지금 우릴 쫓고 있다니까! 걔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라곤 우리가 다해서 5명이란 거 밖에 없어. 그러니까 XB 니들 둘이 한 조고, 주방장하고 경찰 니들 둘이 한 조. 그렇게 나눠서 조용히 입 다물고 나만 따라다니라고. 위험하니까 딱 붙지는 말고,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해외에서 방문하는 국빈은 법무부 출입국 사무소 쪽으로 해서 나온데, 지금부터 그 쪽으로 갈꺼니까. 절대 소란 일으키면 안돼! 수상한 행동도 일절 금지고!”
그래 좋아. 어차피 난 X만 곁에 있으면 돼!”
나도야 B”
나도 저 둘은 무섭다해. 여기 이 친구가 마음에 든다해
... ... 저는 그다지....”
 
좋아. 그럼 다 찬성한 걸로 알고. 지금부터 콩고왕자 만나러간다. 다들 조심해!”
... 저기 저는...”
뭐하냐해! 이리 와라해!”
 
계단을 오르는 발길이 무거웠다. 앞장서긴 했지만 어떤 난관이 기다릴지 몰라 걱정부터 앞섰다. 4명의 다른 일행은 청순한 현실감각에 희희낙락한 것도 모자라 해맑기까지한데, 오직 나만이 두려움의 멍에를 지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저렇게 반쯤 정신이 나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시작된 미치광이들과의 동행, 하지만 외눈박이 세상의 두눈박이처럼 안타깝게도 나는 너무나 정상이었다.
너무나... 정상!
어느덧 도달한 법무부 출입국 사무소 앞, 문을 앞에 두고도 발길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법무부란 이름이 주는 압박감 탓이었다. 공항경찰이 쫙 깔려 있음은 물론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나를 머뭇거리게 했다.
그렇게 우유부단하고 미적지근한, 그러니까 더 없이 나 다운 모습으로 망설이고 있던 찰나, 유리문이 열리며 때 마침 걸어나오던 여직원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냥가라. 제발 못 본척하고 그냥가라나의 바람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흩날리고, 그냥 지나쳤으면 좋았을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왜 이제야 오셨어요?”
?”
왜 이제야 오셨냐구요!”
제가요? 저는 그냥... 근데 저를 아세요?”
장난치지 마세요. 안그래도 저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거든요?”
? 저 장난 아닌데...”
어휴! 안그래도 지금 막, 콩고에서 오신 대단하신 왕자님께서 소를 몇 마리 지참금으로 줄테니 자신의 여섯 번째 부인이 될 생각이 없냐고 물으신 참이라. 더 이상 장난할 기운, 저 지금 없거든요?”
호오! 콩고 왕자님! 뉴스에 나온 바로 그? 그럼 그 양반이 지금 이 안에?”
! 그러니까 얼른 들어가세요.”
? 들어가보라구요? 제가요? 그래도 되나요?”
! 그러려고 오신 거 아니에요?”
... 그렇기는 합니다만. 정말 그래도 될지?”
아 진짜! 아까부터 계속 왜 그래요? 장난할 기분 아니라니까요! 안그래도 아까부터 계속 기다리고 계시니까 빨랑 들어가세요.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기나 해요? 요청한지가 언젠데!”
? 저를요? 기다리셨다구요? 왜요?”
왜냐뇨! 자꾸 이러시면 저 화냅니다. 거류중 신변보호요청이랑 숙소 이동지원, 공문은 벌써 며칠 전에 보내드렸고, 오늘도 유선으로 지원 요청했잖아요. 그걸 이제야 나타나서는 왜요?’ 시끄럽고 빨리 들어가요! 경찰이잖아요! 신변보호요청 수행하러 오신거구요! 아니에요?”
경찰요? 어딜봐서요?”
뭘 어딜봐요! 보다시피죠.”
 
그녀가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경찰복을 입고 있다는 걸, 그리고 우리와 콩고 왕자와의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운명이자 신의 계시라는 걸...
 
으허! 그래! 나는 경찰이니까. 그래! 신변보호를 위해서! 좀 얼토당토않은 일행이 좀 달라붙긴 했지만! 으허! 콩고왕자를 만나러! 으허!”
어디 아프세요?”
아닙니다. 으허!”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걸 간신히 참아낸다는 게 괴상한 웃음소리로 변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나. 아니 우연이라 해도 이 정도로 착착 들어맞으면 운명이라 봐도 무방했다. 들 뜬 기분을 겨우 추스린 난 뒤 따르던 얼토당토 않은 일행에게 손짓 했다.
 
가자! 왕자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단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자. 밖에서 만난 여직원 만큼이나 딱딱하고 신경질적인 얼굴의 직원 하나가 몹시도 공무원스런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 ! 그게... ... 그러니까 저희가 신변을... 그러니까 콩고 왕자님의 요청을 아니! 여기서 요청하신 그 뭐냐. 그 요청을 받고 제가... 아니 저희가 이렇게 다 같이... 그러니까.”
! 요청한 지가 언젠데 이제 와요! 한 참 기다렸네. 그런데 뒤에 서 계신 분들도 일행이에요?”
! ! 저희가 다 이렇게 일행입니다. 하하핫!”
아무리 타 부처 요청이래도 제복도 안 입고... 에휴 참... ... 그래도 외빈인데 에이!”
하하핫! ! 죄송합니다. ... 저희가 또 은밀히 일반인처럼 위장해서 신변을 보호해드리려고! 이게 또 요즘 새로 도입한 서비습니다. 우하하핫!”
알았으니까 복도 따라 쭉 들어가보세요. 안쪽 제일 끝 방입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법무부 직원을 속이는 일은 생각보다 쉬워, 일이 될려면 이렇게도 되는구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담당 공무원의 무성의 덕분이긴 했지만 내 연기가 특히 더 훌륭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다 느낀 바로 그 순간, 그가 갑자기 우리를 불러 세웠다.
 
아 참! 저기 잠깐만요.”
? ... ... 하실... ... 말씀이라도...?”
거 뉴스보니까. 4인조? 아니 5인조? 암튼 그 살인마들 뉴스로 완전 난리던데, 그거 어떻게 되가고 있어요? 걔들잡는다고 다 나가서 사람 없어서 이제 나오신거죠?”
? 히익... ...그게...”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곤 아주 조금 미심쩍은 눈빛이 오갔다. 위 아래, 그리고 좌우를 훑는 기분 나쁜 시선,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들리지 않지만 모양이 하나’ ‘’ ‘’ ‘!’ ‘다섯?’을 말한다. 법무부 직원의 이목을 속이고 콩고까지 직행하리라던 원대한 꿈이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직원의 애매한 탄식...
 
어라?”
 
머릿 속 위기신호가 울렸다. 분명히 의심받고 있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이마에선 연신 굵은 땀방울만이 흘러내렸다.
 
어라? 하필 오신 것도 다섯... 분이네?”
... ! 그게.. 하하하 공교롭게도... 하하핫!”
여자 하나, 남자 넷... 경찰도 계시고.”
하하하핫! 그러게요. ! 이거 참! 오해하기 딱 좋네! 으하하하핫!”
그렇죠? 오해겠죠? 근데 저기 뒷줄에 서 계신 하얀 주방장 가운 입으신 분. 뒤에 숨긴게 혹시 칼 아니죠?”
... ... 물론 아니죠! 하하핫! 저희가 좀 더 리얼하게 위장을 하느라고! 하하하핫! 야 임마! 내가 그런거 들고 다니지 말랬잖아! 새꺄!”
! 미안하다해! 이거 칼 아니다해!”
하하핫! ... 들으셨죠?”
 
나의 변명이 너무 허술했을까? 아니면 주방장의 칼에 묻은 붉은 것을 봤을까? 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마주하기가 버거워진 내 시선이 아래로, 아래로 향한자, 얼핏 보인 그의 손이 움찔거린다. 전화기로 갈까? 말까? 다시금 찾아온 위기에 절망의 파도가 엄습했다. 공항경찰이 출동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폭풍전야의 고요가 흐르고, 그 고요가 피를 말리는 갈증으로 되돌아왔다. 급히 마른침을 삼키자 직원 역시 마른침을 삼키며 나를 본다. 긴장된 얼굴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손은 멈칫 멈칫하며 머뭇댈 뿐 전화기를 잡지 않았다.
 
왜지? ... 신고를 안하지?’
 
처음엔 궁금했지만 곧 이해가 됐다. 당연한 일이었다. 법무부 직원이라지만 그래봐야 고작 사무직 공무원이다. 반면 상대는 학살극을 자행한 간악한 살인마 집단. 목숨이 두 개가 아닌 이상 경거망동할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무실 안의 다른 직원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 한 분위기였다. 설사 누군가 알아 챈다해도 직원은 고작 3, 숫적으로도 우리가 우세했다.
그런 생각에 평정심을 되찾고 바라보자, 비로소 그의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이 보였다. 두려운가? 두렵겠지! 그래, 사실 나도 저 인간들이 두렵다. 공포심이 무디어 진 건, 내가 연루된 상황탓 일 뿐, 따로 두고 본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쉬이 범접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자 그가 입을 열었다.
 
... 죄송하지만 자... 잠깐 밖에서 기다리시는게...”
 
얄팍한 수작이었다. 평정심이 돌아오자 얕은 꾀가 보이고 미소가 지어졌다.
 
아니요. 저희는 여기가 좋은데요?”
... 그러신가요? ... 그거 참... 유감스러운... 일이네요... 하 참... 왜 이리 덥지?.”
 
나의 거절에 그는 몹시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도 애매했다. 밖으로 나가든 안으로 들어가든 신고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방법은 오직 전화기를 들지 못하게 하는 것 뿐이었는데, 그렇다고 전화기를 때려 부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
“....”
“....”
 
침묵의 대치전(對峙戰)이 이어졌다. 안치환 시인의 시 깃발이었던가? ‘아아 그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이자 총성없는 전쟁’. 침묵의 무게가 서로와 서로를 짓누르며 누가 먼저 무너질지에 대한 내기를 벌이고 있었다. 이겨야 했다. 반드시 이 난관을 헤치고 콩고왕자를 만나야 할 이유가 내게는 있었다.
고민이 깊어졌지만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이 내기는 시간을 끌수록 우리에게 불리했다. 지금은 두려움이란 이름으로 그를 잡아 놓고 있지만, 이 대치전이 언제까지고 유지될 거란 보장은 없었다. 누군가 들이닥칠수도 있고, 다른 직원들이 우리의 정체를 눈치 챌 수도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상반된 두 개의 마음이 엇갈렸다.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게 없어. 정면돌파다!’
안돼! 들어가면 이 사람이 바로 신고할거야!’
그렇다고 마냥 이대로 있을 참이야? 이대론 답이 없어! 시간 끌면 불리한 건 우리야!’
대책이 없잖아! 대책이! 그냥 있자니 우리가 불리하고, 들어가자니 신고를 할테고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이 사람을 여기다 놔두곤 답이 없어!’
 
그때였다. 메마른 사막에 오아시스가 나타나듯, 꽉 막혔던 내 머릿속을 시원하게 뚫어내는 회심의 굳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 같이 가시죠!”
?”
!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직원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저희랑 같이 들어가시자구요. 복도 제일 끝 방, 콩고 왕자가 있는 곳으로!”
... 제가요?”

11.jpg
         ※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 및 인물, 지명, 배경등은 사실과 무관합니다.
    
그의 얼굴에서 낭패감이 묻어났다. 이거야 말로 회심의 한 수, 그의 신고가 두려워 오도가도 못 한다면 그를 데리고 들어가면 되지 않냐는 발상의 전환이 만든 기가 막힌 반전이었다.
 
그럼 누가 있어요. 소란 피우면 재미없는 거 아시죠?”
? 예에...”
 
울상짖는 그의 표정이 재밌어 나는 몇 마디를 더 보탰다.
 
뉴스 보셨죠? 행여나 쓸 데 없는 생각 하고 계시면, 버리세요. 쟤들 아주 흉악무도한 놈들이에요.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법은 멀고... .은 가깝다.”
 
때마침 주방장이 환상의 호흡을 선보이며 숨겨뒀던 식도를 슬며시 꺼낸다.
 
법은 멀고... 카칼... 으허헉...”
어허! 조용히!”
 
나는 급히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다행히 사무실 내 누구도 그의 급박함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지금까지 오도가도 못 한 것이 우리라면, 이제는 그의 손이 전화기 코 앞에서 머뭇거린다. 조금 움찔대다 돌아오고 또 조금 움찔대다 우리의 면면을 곁 눈질 한 후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툭하고 백기를 든 그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시간이 없어요. 어서갑시다.”
? 네에...”
 
그는 울상을 지었지만 소용없다. 우리도 벼랑끝까지 몰린 상태다. 그에겐 돌아갈 곳이 있지만, 우리에겐 없다. 오직 콩고행 전용기만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가 머뭇거리며 일어섰다.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싫은 기색이 역력하지만, 축 쳐진 그의 어깨를 보니 쓸데 없는 소란을 일으킬 것 같진 않았다.
누구나 자신의 목숨은 하나 뿐이니까.
 
앞장서요.”
...”
뭐해 빨리 따라오지 않고!”
 
그를 앞세운 후, 멍때리던 일행을 채근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드디어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도 바라던 콩고 왕자를, 우리에게 콩고행 전용기 제공해줄, 마지막 희망이자 최후의 보루, 에메랄드 성에 사는 오즈의 마법사를...
하지만, 아아 운명이란 얼마나 얄궂은가?
 
저기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못 들은 척, 외면하고 가려했다. 하지만 한 톤 더 높아진 짜증스런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저기요! 거기 경찰분!”
 
본능적으로 두 다리가 멈춰섰다. 조금 전 문 앞에서 마주친 그 여직원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헌데 왜 나를?’ 불안한 예감에 머리털이 곤두 설 지경이었다.
 
괜찮아. 이제껏 잘 해왔잖아. 적당히 둘러대면 돼.’
 
급히 손짓하자 그나마 눈치 빠른 주방장이 앞선 남자직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는 잠시 움찔거렸지만 이내 저항을 포기하고 풀 죽은 듯 고개를 떨궜다. 조금 더 안심이 된 난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그 곳엔 아까 그 여직원이 서 있었다.
 
... 무슨 일이시죠?”
왜긴요! 그 쪽 때문이죠.”
그러니까. 왜요? 보시다시피 제가 지금 좀 바빠서. 조금 이따가 얘기하면 안 될까요?”
맘대로 하세요. 어차피 그 쪽 일행이지 내 일행도 아니고....”
어휴... 네 그럼... 전 이만. ? 지금 뭐... 뭐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못 들었어요? 그쪽 일행분들 오셨다구요 밖에!”
... 일행?”
 
반투명의 유리문 넘어 서성이는 몇몇의 사내가 보였다. 뿌연유리문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무언가를 부산히 품에서 꺼내고 있었다. 얇고 긴데다 까만 것들, 칼은 분명 아닌데, 어딘지 더 위험해 보이는 것이 흡사 총을 꺼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들어오지 않고 계속 머뭇대자 이번엔 그녀가 자리에서 박차고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아 저 인간들은 왜 안들어오고 저기서 궁싯거려!”
 
... 설마 경찰?’
 
탄식과 절규가 쏟아져 나왔다. 경찰복 그리고 손에 든 총들, 내 예감이 맞다면 진짜 콩고왕자의 신변보호를 위해 온 경찰이거나 아니면...
 
우리를 체포하기 위해 출동한... ... 경찰 특공대?’
 
그리고 그녀가 문을 열었다.
 
경찰입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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