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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참 명이 긴 듯
게시물ID : panic_916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달팽이연필
추천 : 35
조회수 : 4524회
댓글수 : 54개
등록시간 : 2016/11/25 16:3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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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있었던 일들인데, 돌아보니 이상해서 적어봅니다. 
반말 양해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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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때는 내가 중학교 3학년, 여동생이 초등학교 고학년 일 때이다. 
그 해 겨울엔 지리에도 어둡고 겁도 많은 내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찰흙공예를 하고싶다며
동생을 데리고 무작정 근처 산 속 도예 학원에 찾아갔더란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겨우 찾아갔던 산 속,
막상 찾아가니 단체만 받는다는 그 곳 원장님,
그래도 왔으니 찰흙 좀 가지고 놀다가 가렴,
그렇게 몇 시간을 놀다가
우리가 버스에서 내렸던 허름한 버스 정류장으로 다시 찾아갔을 땐
이미 날이 저물까 말까,  아직 어둡지는 않은 저녁. 
버스 시간표는 당연히 모르고
지금도 길치인 나는 동서남북도 모르고
어린 동생은 내 손만 꼬옥 잡고있는데
덜컥, 이제 어쩌지 싶었다. 

그런데 마침 차 한 대가 구원처럼 우리 앞에 멈춰섰다. 
까만 SUV, 아저씨 네 분,
어디가니, 여기 버스 안 서, 태워다 줄 까?
나와 동생은 안도의 미소와 함께 얼른 뒷자리로 올랐다. 
아저씨 둘은 앞자리,
우리 둘은 뒷자리 가운데,
그리고 우리 양 옆으로 아저씨 한 분씩이 탔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참 친절했다. 
집주소를 물으며 집까지 태워주시겠다고 하셨다.  
나머지 세 분은 말이 없었다. 
몇 살이니? 어디살아? 니네 어디왔던거야?
니네 여깄는지 엄마는 아셔?
어디간다고 하고나왔어?
난 조잘조잘 묻는대로,
엄마는 일가셔서 집에 안계셨어요,
저희 나온지 몰라요,
아빠는 사업하시구요,
그러다가 그 아저씨가 어느 학교 다니냐고 물으셨다. 
ㅇㅇㅇ여중이요!
그래?
그 때 아저씨가 처음으로 고개를 뒤로 졎혀 물으셨다. 
그 학교에 ㅇㅇㅇ 선생님 계시지 않아?
네!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신데!
그러고는 차를 탄 후 처음,
그 아저씨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알 수 없는 침묵. 
그 아저씨는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고서는
더 이상 부드럽고 친절하지 않은 말투로, 
선생님 잘 계시냐?
네!
잘 해 주시지?
네!
나는 미술선생님이셨던 담임 선생님께서 
내가 힘든 일이 있을때 나를 아기처럼 업고 
미술 실을 뱅뱅 돌며 위로 해 주시던 일을 떠올렸다. 
아저씨는 말이 없으셨다. 
그저 운전하던 아저씨를 툭툭 치시고는, 가자, 그러셨다. 
그러고는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무리하고 거친 유턴. 
그리고는 아저씨가 바빠서 그런데,
버스터미널에 내려줄게,
거기서부턴 집에 갈 수 있어?
나는 실망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렇다고 했다. 
집까지 태워 준데놓고?!

우리를 버스 정류장에 내려주시고 아저씨는, 
나랑 눈을 맞추며 
ㅇㅇㅇ 선생님이 아저씨 학교다닐 때 담임이셨어,
선생님 좋은 분이시다, 말씀 잘 듣고,
선생님 속 썩이지 말고, 알았지?
그러셨다. 

그리고는,
다시는 모르는 사람이 태워준다 그러면 차에 타면 안된다.
그러고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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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4학년

나는 대학교를 외국에서 다녔다. 
나랑 친구 둘이 아파트 하나를 빌려 살고 있었고,
그 날은 알바가 없어서 집에 있었다. 
밖엔 추적추적 비가오고 날도 추웠다. 
누군가 문을 두드려 열어보니,
건장한 흑인 아저씨가 가죽잠바와 청바지를 입고 서있었다. 
아마도 본인이 구사할 수 있는
최대로 상냥하고 지적인, 흑인 억양을 숨긴 영어로,
잠깐 얘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저는 마약에 중독된 청소년들을 돕고있습니다. 
나는 츄리닝 차림에 잠도 덜 깬 상태로,
예, 무슨 일이세요? 
그러고는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채 문을 열고 서 있었다. 
바깥 공기가 참 차갑다고 생각하며 잠시
그 아저씨가 하는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는데, 그 분이,
저 너무 추워서 그런데,
잠시 현관에 서서 문을 닫고 얘기 해도 되겠습니까?
그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난 정말 미친 애야, 싶었다. 
난 그 분께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얼른 들어오시라고,
현관 말고 식탁에서 얘기를 하자고,
우리집엔 동양 여자만 셋 살아요,
죄송하지만 신발은 벗고 들어오세요,
현관문을 잠그고, 거실을 지나,
부엌 옆 식탁으로 아저씨를 안내했다.

나는 얼른 추워하는 그 분께 핫초콜렛을 타 드리고
빵과 쿠키를 접시에 담아 내어드렸다. 
죄송해요, 제가 날씨 생각을 못했어요,
그러고는 아저씨의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열악한 상황에서 자라 마약에 노출된 아이들,
각종 범죄에 이용되는 아이들, 등등
우리는 두 시간이 넘게 대화를 이어갔다. 
아... 나도 쉬고싶은데 이 사람 왜 안가지,
싶기도했지만,
이 날씨에 좋은 일 하는 아저씨를 냉대할 순 없으니까. 
결론은, 그 아이들을 위한 모금활동으로
잡지를 팔고있는데 구독해달라는 거였다. 
나는 선뜻, $98어치의 잡지를 주문했다. 
식당 알바로 생계를 이어가던 나로서는 큰 돈이었지만,
직접 발로 뛰는 이 사람의 고생에 비하면 부끄러운 돈. 
난 그 자리에서 수표를 써 드렸고 
아저씨는 룸메이트들은 어딨냐 물었다. 
둘 다 방학이라 한국에 갔어요. 
아... 그래요? 가족은 어딨어요?
다 한국에 있죠. 
아... 그런데... 수표말고 현금은 없어요?
아, 있어요! 그게 편하세요? 잠깐만요. 
나는 얼른 지갑을 가지고 나와 현금을 드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저씨는 계속 앉아서
식탁만 뚫어지게 보고있었다. 
긴 침묵. 
그러다 결심 한 듯 일어서서 거실로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현관까지 가더니
문고리를 잡고 한참 서 계셨다. 
내 굿바이 인사에도 아저씨는 미동이 없었다
 ....아!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나는 얼른 우산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이거 쓰고 가세요!
아저씨는 돌아서서 나와 우산을 번갈아 보더니,
아니요! 아니예요. 전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안 돌려주셔도 돼요. 선물이예요. 
아니예요. 원치 않습니다. 
몇 분 간 짧은 대화 끝에 다시 몸을 돌려 문을 연 아저씨. 
그런데 문을 열다 말고 다시 쾅 닫고는 고개를 숙였다. 
왜그러지?
어색한 정적 끝에 아저씨가 한숨을 쉬었다. 
흑인 억양을 숨기지 않고 말을 시작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핫초콜렛이랑 빵 고마웠어. 
잡지도 사 줘서 고마워.
돌아섰지만 바닥을 보며 빠르게 말을 이어가다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조금 전까지의 선량한 눈이 아니어서 조금 긴장이 됐다. 
아니예요, 전 평범한 사람이고 당신이 좋은 사람이죠. 
내 말은 무시당했다. 
키가 나보다 머리 둘 정도는 큰 아저씨는 손을 올려
삿대질을 하듯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나를 가르켰다. 

다시는, 절대, 모르는 사람을 집 안으로 들이지 마. 
넌 좋은 사람이니까. 

그러고는 문을 열고 가버렸다. 
나는 내가 구독한 많은 잡지를 한 부도 받아보지 못했고,
친구들은 내가 사기 당한거라고 놀렸지만,
난 몇 년 뒤 이사를 갈 때
아저씨가 써 준 영수증에 적힌 주소로 편지를 썼다. 
잡지는 새로운 주소로 보내주세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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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지루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나의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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