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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평범한 어느 날
게시물ID : panic_918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묻어가자
추천 : 12
조회수 : 132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12/20 05:47:51
 
나는 쓰레기 더미를 층층이 쌓은 것 같은 뇌 고기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마트료시카 뇌 세상으로 도망간 겁쟁이들이었다.
마트료시카 뇌는 가상 세계로, 현실보다 시간이 10배는 느리게 간다.
아마 그들은 천억 년은 되는 시간을 살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들이 가상 세계로 도망간 까닭은 간단하다.
우주는 어느 날 멸망하기 때문이고 그 전에 최대한 오래 살기 위해서이다.
난 현실에 남아 우주의 최후와 맞서 싸우기로 다짐한 이들 중 하나였다.
오늘은 왠지 우울한 날이다.
나는 뭔가를 기념한다는 의미로 인류의 역사를 또 한 번 훑어 보았다.
예수라는 인물이 태어나고 그 당시 지구가 태양을 2천 번 돌았을 때쯤의 이야기를 나는 가장 좋아한다.
당시의 조상은 과학이라는 유용한 도구를 손에 넣음으로써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때의 희망찬 감정에 동화되는 기분이 든다.
희망에 찬 수많은 연구들, 기대감에 가득한 SF 소설들
그리고 그 당시의 시간을 기준으로 200억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최대 무기는 여전히 과학이다.
이 얼마나 처참하고 모멸스러운 인류의 모습이란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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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자괴감에 몸서리치다가 겨우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끝도 보이지 않게 높은 저 마트료시카 뇌 빌딩을 모조리 폭파해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가 우주의 마지막 남은 생물이라 한들.
내가 저들을 모조리 죽이고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명을 모두 없애버린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늘을 보았다.
아름답고 합리적인 코스모스. 그 코스모스의 밤.
우주의 어둠이 나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 새까만. 아주 새까맣기만 한 그 검은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미 너무도 멀어져버린 별들은 한 점의 빛도 우리에게 보내지 않았다.
우리가 만든 인공태양만이 우리 행성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 인공태양은 이미 최대한의 가속도로 우리에게 돌진하고 있었으나
행성-항성 간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우리 인류가 이룩한 찬란한 기술 문명인 것이다.
나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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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우리는 이미 우주의 지배자인데.
그러나 깨닫게 되었다.
더는 정복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강해진 후에서야.
우주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였다.
우리가 가진 과학이란 도구의 한계였단 말이다.
과학보다 더 뛰어난 도구가 없었단 말이다.
이백억 년이 지난 후에도 말이다.
우리는 코스모스의 안에 있기에
코스모스의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었으나
결국 카오스에는 근접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카오스로 돌아갈 것이다.
아니, 그것은 나의 바람일 뿐이다.
우리는 이 끔찍한 코스모스에서 영원히 어떤 에너지 덩어리로 부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상을 하니 몸서리가 친다.
 
 
..
..
 
 
또 정신을 잃은 나를 내 동료들이 깨웠다.
오늘이 그 날이란다.
나는 멍하니 천 년 전의 나를 떠올려보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과학 문명이 나의 회상을 금세 도와주었다.
그때의 나는 쓰레기 더미를 층층이 쌓은 것 같은 뇌 고기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을 마트료시카 뇌의 세상으로 도망간 겁쟁이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후로 천 년 동안 나는 뭘 했는가. 아무런 발전도 없이.
인류는 뭘 했는가.
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하는데 동료가 따스하게 손수건 하나를 건네주었다.
"저건 봐야지."
동료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인공 태양을 포함한 하늘을 말이다.
지금, 우주에서 가장 경이로운 천문현상이 일어날 테지만 아무도 이를 촬영하는 동료는 없었다.
그 순간, 인공 태양이 가루처럼 흩날렸다.
아주 순식간이었다.
암흑에너지의 팽창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원자마저 붕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흐느끼고 있어서 그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쩌면 잘된 일이다. 이 두려운 순간을 볼 수 없으니까 참으로 잘됐다.
그러나 새까만 어둠이. 어둠이 몰려오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주먹을 꽉 쥐었으나 이제 주먹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 순간 그가. 그녀가. 그것이.
내 눈을 가리던 눈물을 암흑에너지로 모두 닦아주었다.
그는. 그녀는. 그것은.
나에게 새까만 공간을 너무도 또렷하게 보여주었다.
그 잠깐의 1초 동안 나는.
생명이 사는 이유는 이 순간을 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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