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금관을 벗고 촛불 가운데 선 예수
게시물ID : sisa_8240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권종상
추천 : 3
조회수 : 68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12/25 06:29:00


크리스마스 이브, 점심을 먹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이맘때면 긴긴 겨울방학이 시작되어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을것이고, 중고등학교때는 또래 여학생들과의 어울림을 기대하며 교회 학생회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발걸음 가볍게 향하곤 했었습니다. 1년에 한 번, 교회에서 밤샘을 하며 평소에 짝사랑해왔던 여자아이의 손을 게임을 핑계로 잡곤 했지요. 전기 게임이나 수건 돌리기, 뭐 이런 것들. 수건은 꼭 그 여자아이의 뒤에 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낮부끄럽군요. 30년이 넘은 일인데도. 

예수님의 생일은 특별했습니다. 교회에선 이것 저것 챙겨주곤 했지요. 그것이 부모님이 내신 연보돈에서 나온다는 것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그 어린 시절의 성탄은 그냥 설레이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조금씩 크기 시작했고, 재수하던 때, 구세군 서대문 영문 -지금은 구세군 제일교회로 이름이 바뀐 - 의 청년회 선배들은 제게 혁명가 청년 예수를 가르쳐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불의 세례를 받은 셈이었습니다. '이상하고 불온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게 됐을 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겨울, 대학 선배와 광화문을 함께 걸으며 나지막히 불렀던 금관의 예수. 그 '대설'을 쓴 사람은 지금 너무 이상하게 변해 버려서 내가 나이먹으면 절대로 저렇게 되진 말아야겠다 하는 반면교사의 인물이 돼 버렸지만, 김민기 선배가 여기에 필을 받아 썼던 그 노래의 가사는 절망할 수 없는 희망의 한 자락을 분명하게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조중동도 이것을 촛불 혁명이라 부르면서, 얼마 전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가 혁명을 이야기했다고 그것을 좌파의 불순한 무엇인가라고 매도합니다. 언론 권력도 아직은 변하지 않았고, 청문회엔 거짓말을 하는 자들로 넘쳐납니다. 우리의 혁명은 4.19 때부터 지금까지 미완성입니다. 재벌은 자기의 금권 승계를 위해 뻔뻔한 권력자들과 손을 잡고 국민의 돈을 훔쳐 불법적인 세습을 완성하고, 무능한 권력자의 뒤에 숨어 온갖 치부를 해 온 것들은 국민 앞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이런 걸 백일하에 밝혀 버리는 촛불의 혁명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예수는 혁명가였습니다. 가난한 노동자, 목공이었던 예수는 수천 수만의 군중 앞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기존 질서에 당차게 저항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운명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으킨 혁명의 확산을 막으려는 로마 제국과 그들의 하수인인 헤로데의 괴뢰정권이 그를 잡으러 왔을 때, 그는 독배를 받아 마시기로 결심합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함으로서, 그는 "신 앞에선 누구나 신의 자녀이다"라는, 당시엔 정말 입 밖으로 꺼내기도 힘들었을 인간의 평등함, 인권의 소중함에 대한 그의 주장을 당시엔 전 세계라 할 수 있었을 지중해 일대에 퍼뜨려 버립니다. 그리고 그 혁명은 결국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제국이 되어 버리도록 만듭니다. 물론 기득권층은 예수의 '불온한' 주장을 체제에 순응하라는 그들만의 버전으로 재해석해 버렸고, 지배의 수단으로 삼아 버렸지만. 

그런데 우리 안에 예수가 와 있습니다. 예수는 감옥에 갇히고 자식을 잃고 광장에서 사람들이 들고 있는 촛불 한 가운데에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어두움을 환하게 밝혔던 촛불의 행렬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녹여 주위를 빛내는 그 촛불 안에 담긴 예수를 봅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태워 버리고 새로운 한국 사회를 만들어 낼 열정의 불꽃들. 그 안에 예수가 담겨 있습니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금관의 예수는 촛불 앞에서 금관을 벗고, 해방자 예수로 와 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복된 성탄 되소서. 


시애틀에서...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