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단편] 사후세계로부터 온 에세이 1.
게시물ID : panic_921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ediac
추천 : 1
조회수 : 85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1/19 04:21:06

모두 잘 지낸다 1.

내가 죽은 지 50일이 지났다.

막 장을 보고 돌아왔다. 오는 길에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이전의 생이 맞은 편에서 나를 향해 걸어와 나를 통과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간밤의 악몽이나 오래전 잃어버린 문장처럼

눈을 감으면 책상의 보라색이 어슴푸레하게 눈꺼풀 안쪽을 채우는 것을 느낀다. 어제 마시다 만 맥주를 마저 마시는 저녁이다. 맥주를 목 뒤로 넘겨도 별 느낌이 없는 것은 이미 김이 다 빠졌기 때문이다. 과거의 내가 남긴 것들은 이와 같이 항상 밍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간만에 밖에 나가 사온 것은 책 세 권과 맥주와 주전부리 몇 개였다. 다른 때와 별 다를 것 없는 장바구니였다. 나는 항상 같은 것만 사가는 그런 손님이다. 물론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꼭 같은 것만 사는 것은 아니다. 우선 매번 똑 같은 책을 사갈 만큼 특이한 손님은 되지 못하며, 하고 많은 맥주 중에 같은 것만 마실 만큼 무언가에 빠져있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그런 책이나 맥주의 하고 많음을 즐기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들도 많다. 맥주 시음가나 책 서평을 자주 작성하는 사람들처럼, 무언가의 다양함을 음미하고, 많은 종류의 음식이나 맥주를 맛보는 사람들 말이다. 그리고 사실 다양한 종류의 것들을 체험하고 맛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무언가를 즐기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이 맥주가 저 맥주와 무엇이 다른지, 이 안주와 저 안주가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이 책이 저 책과 어떻게 다른지 사실 잘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실은 그냥 아무거나 보이는 것을 집을 뿐 무언가 고려하고 생각해서 고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같은 책을 두 세 번 샀는지도 모른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죽음 이후에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의 지인들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전의 생에 대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것이 좋은 인생이었든 나쁜 인생이었든 상관 없이 모두가 그저 묻어두고 현재의 생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무슨 께름칙한 사건이라도 되는 냥 한다. 술자리에서 나는 종종 우리는 모두 이미 한 번 죽은 사람들인데, 너무 바뀐 것이 없다고, 두 번째 인생이라면 이것 보다는 나아야 한다고, 아니면 최소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고, 말하고는 했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괜한 이야기를 들추는 불청객인 양 쏘아보았다. 왜 또 그런 이야기를 꺼내? 나는 우리가 한 번 가졌던 생이니까, 하고 말하려던 것을 삼킨다. 나에게는 장을 보고 오는 길에도 생생하게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잊고 지내야 하고 또 어느 정도는 실제로 잊고 지내는 일이 된다. 나에게는 눈을 감았을 때의 어둠처럼 이렇게나 선명한 것이.

이전의 생에서도 내가 이런 인물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마음의 낮은 차원에서는 기억하고 있지만 의식적인 차원까지 올라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뭔가 그런 생각들을 하는 것을 조금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전의 생 보다는 현재의 생이 중요하며, 고로 현재에 충실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동시에 이전 생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각자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에 충실 하라는 말 자체가, 자신이 되찾고 싶은 과거의 기억을 좀처럼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반항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도 역시 과거에 대해 궁금한 마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전의 생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문화가 있다는 것은 어쩐지 조금 웃기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전 생의 기억을 그저 어떤 암시나 꿈 같은 것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꿈과 같다는 말을 누가 처음 사용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꽤나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면서 아무리 기억을 되 짚어보아도 결국 가장 끝 부분의 기억만이 남으니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인생의 마지막 부분이 인생 전체를 암시해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아무래도 무작위로 선정된 인생의 어떤 기억보다는, 보통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자신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려주지 않을까. 마치 꿈의 마지막 장면 만으로도 어떤 꿈이었는지, 좋은 꿈이었는지 악몽이었는지를 떠올리기에는 충분한 것처럼 말이다. 다만 이전 생의 마지막 기억은 꿈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또 꿈과는 반대로 밤이 찾아올수록 더 선명해지고는 하는 것이다.


 


제가 혼자서 만든 잡지 '우다' 에 수록될 단편 소설 중 일부입니다. 반응이 좋으면 공게에 결말까지 연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글 좋아하시는 분들은 제 잡지에 다른 소설이나 에세이도 많으니 텀블벅 후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텀블벅 후원 페이지 : https://tumblbug.com/udavol1

페이스북 개인 계정 :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14049632447

'우다'페이스북 페이지 : https://www.facebook.com/%EB%8F%85%EB%A6%BD%EC%B6%9C%ED%8C%90-%EC%9A%B0%EB%8B%A4-631399647046659/?fref=nf&pnref=story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