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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날이면 힘들다구요???
게시물ID : wedlock_66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스윙보틀
추천 : 19
조회수 : 1833회
댓글수 : 28개
등록시간 : 2017/01/24 00: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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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반말이라 죄송합니다.)
내가 큰 집이 되고 난 후.

우리 집 명절엔 차례가 없어졌다.
첨이 힘들었다.
그럼 독립 기념일 처럼 기뻐해야 하는데, 
이런~~ 노예의 삶에서 해방시켜 준다니 이게 또 몸에 안 맞은 옷처럼 싫다네..ㅋㅋ 아니 이런.

매번 명절 마다. 크고 작은 일들을 치르다 보면 항상 누군가는 소외되고 누군가는 서운하고 그랫잖아. . 그런데도 이건 좀 아니지 않느냐고 꼭 구한말 종놈들에게 노비 문서 주고 

'이제 자유니라' 말을 하니 '서방님 저희가 어디를 가리오'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첨엔 매일 맞던 사람이 갑자기 매질이 중단되니 때리던 사람을 찾아와 이건 아니지 않느냐 라는 질문을 받는 다소 희한한 상황이 된거지.
 명절때 마다  떡은 너희가 부침개는 너희가 이런거 서로 이야기 하다 빈정 상했쟎아. 그러지 않았냐고 자꾸 환기를 시키는 다소 어색한 리마인드가 계속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 전생에 나라라곤 구해 보지 않은 것 같은 남정네들은 심지어 무료하기 까지 해서 항상 어디 방에서 술이나 까고 쉴 새 없이 입에 쳐 넣고 마시고 하지 않았나? 이런 행동이 올바른 것이냐? 라고 일갈도 하고..그러면 '아 그랬지'하고 '맞어 맞어' 이런 과정을 몇 번을 반복한 후 ㅕ우 자리를 잡았어...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에게 한 질문이지 명절 때 너는 드러누워 쳐 마시던지 아니면 잔소리나 해대고 그런데 너는 그럴 자격이 있느냐? 라고 스스로에게 묻고는 당연히 아니다는 결론에 다다른 후 아예 차례를 없앴다. 내가 생각했도 멋지다.박수 한 번 쳐라.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n년이 지나고 부터는 이제 우리는 조선 시대로 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특히 요즘 황교익 선생의 칼럼을 보면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구나 한다.
조선 시대 양반은 20프로도 채 되지 않고 조선 후기 양반을 사고 족보를 사긴 했는데 그렇게 어깨 너머로 배운 지식이 남의 집 차례 지내는 거 보고
"옳거니 우리도 저걸 해야 양반이구나"
그래서 옆 집 차례상 제물 놓는거 보고 조율이시니 홍동백서가 나왔다고 하지 않았는가?라는 황교익 선생의 칼럼
추석에 맞는 제 철 과일은 포도와 복숭아 일진대 어느 나라 예법에서 왔는지 사과와 배는 이른데도 그것을 올려야 하고
어른에게 술따를 때는 상표를 보이지 않게 하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블라 블라. 고개를 돌리고...블라 블라 .라는 황교익 선생의 칼럼이 지금 내 가슴을 두드린다. 그리고 묻는다 이런 따위가 예절이라굽쇼?
난 전세계를 다 돌아 다닐 기회가 있어 참으로 무수한 나라를 다녀 봤지만. 우리 나라 같은 나라도 분명 있지만.

남쪽  사람들 처럼 다들 둘러 앉아 노래부르고 술 마시고 놀든가? 북유럽처럼 아주 소박한 쿠키와 식사와 소담스런 대화를 하든가 하는 선택은 있을 지언정 어른은 가오 잡는다고 힘들고 돈댄다고 힘들고, 젊은 사람은 그 어른의 가오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연기하고 모두가 힘든 가부키 공연같은 이런 연극은 모두에게 힘이 든다. 그래서 누군가는 stop이라고 그리고 why? 라고 물어야 한다. 우리 집에선 다행히 그게 나였다. 큰 집인 나. 나의 취임 일성은
'누구도 힘들고 고통받아선 안된다' 였다.

누구의 딸들의 희생을 그냥 윽박지르면서 그 딸들에게 '명절은 원래 이런거야!라고 굴종을 강요하고 '일년에 두번만 참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나?'
적어도 이 따위 말은 안나오게 해야하고 실제로 제도를 바꾸니 그런  따위의 말들이 사라졌다.
사람이 잘못된 제도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면 그 제도를 바꾸면 된다는 간단한 진리를 내 삶부터 적용시켜야지 안그래?
조선의 5백년 유구한 역사가 각 가정의 말도 안되는 제도와 윤리에서 기인한다면 난 반드시 거부하는거지.
아니 산사람이 즐거워야 조상도 모시고 그리고 그 조상도 즐거운 후손들에게 공양 받아야 좋은거 아닌가?

아무튼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하냐고?

지금도 다 모이긴 모여 물론 절차는 없어졌어  요즘도 그래서 1박은 하는데,-이것도 서로 사는 곳이 한 도시로 통일 되어 있으면 이럴 필요도 없는데 팔도에 흩어져 있으니 어쩔 수가 없어 모이려면. 가끔 펜션 같은데도 가 -근데 그것도 상징성 때문에 본가에서 하자라고 다들 동의해서 본가에서  1박은 해.  단,1박 하는 날은 무조건 외식,

'간단하게 집에서 먹자는 없어'

외식 후엔 영화 한 편.  

집에가도 이 날 만큼은 1회 용품 써.지구가 아파해도 말이야. 내 가정의 평화가 우선이거든 딱 이틀만 용서해주라. 설 추석 .
주전 부리도 다 사다 기성품으로 사다 놓았고 렌지에다 그걸 돌려서 먹으면 되게 해놨어. 
그리곤  100liter짜리 쓰레기 봉투 사다놓고 혹시나 나이 어린 사람이 커피라도 탈까봐 아예 커피도 종류별로 캔으로 사다놔. 
음료수 식혜 같은것도 무조건 캔으로  준비해두고 접시 같은것도 다 일회용이야. 
단 설인 만큼  ,  음식은 딱 하나 해먹어.

 미리 사골국 끓여다 놓은데다 설날 아침에 떡국 한그릇. 
그리곤 시댁 성묘는 시댁 사람만 가. 
성묘 가면서 전부 빠이빠이.
 명절 노동은 낯선 집에서 잠을 하루 자는 것. (조금 익숙치 않은 화장실 뭐 이런거지)이게 다지.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 보다도,(지금도 따라야 하는지 웃음만 나는 턱시도도 입고 폐백도 드리는 좀 희한한 우리 결혼 문화 처럼, )난 우리의 행복이 중요해. 

주위에 이런 이야길 지인들에게 하면 꼭 이런 사람 있어 
 조상들이 제삿밥 하나 얻어 먹을려고 자식 키우쟎아??? _이런 써글_ 이러면서 악 쓰는 사람들.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그들 설득 못해. 다만 나는 이렇게 살아.
그 들은 그렇게 사는거고 우린 우리 대로 사는 거지 뭐.

조올라 쳐 맞던 옛날 군대에서 왜? 라는 질문은 허용되지 않았어. 근데 우리가 사는 이 곳이 군대 같은 곳이 되어서야 쓰나? 합리적이어야 하지
 아마도 명절 때문에 고통 받는다면 우린 왜?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 같애. 그래야 바뀌지. 물론 고담 시티처럼 보수적인 곳은 뭐 방법이 없지 뭐.

내가 리쳐드 도킨스 같은 학자의 책을 참 좋아하고 나름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죽어서 욕 좀 들어 먹더라도,(우리 조상님이 날 욕하셔도 내가 총대 메고 저 세상 가서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셔요 - 같이 살아가는 는 사람들 행복하게 해주려고 제가 그랬습니다.라고 할거다. )
최종적으로 결론은

이제는 적어도 우리 집에선 다들 명절날을 기다리는 것 같애. 페스티벌 화 되어 있거든. 가끔 돈 걷어서 경품 추첨 같은 행사도 하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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