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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히 적어본 일제 강점기 시대의 제주도의 가치와 일본군 주둔 현황입니다
게시물ID : military2_9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1/4
조회수 : 1290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7/02/04 00:18:45
아래에 떡밥이 던져졌는데 생각해보니 작성한 글이 있어 옮겨봅니다,

일단 일본 제국이 침탈하고 지배했으며 그 들의 미쳐날뛰는 군부를 막을 길 없던 당시 시대상 속의 제주도의 가치를 살펴보자면 크게 두번 평가 받고 주목받게 됩니다,

하나는 37년에 시작된 중일 전쟁 당시 중국 중부 지역을 폭격할수 있는 가장 일본 본토에 가까우면서도 중국에 가까웠던 지역이 제주도 였습니다, 본디 일본 나가사키 오오무라 항공 기지에서 출발하여 중국 중부를 거쳐 제주도로 돌아오던 일본 폭격기들은 이후 아예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던게 43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며 조금 달라지게 됩니다, 자원줄이 말라버린 일본 본토의 수송 라인을 사수하는 유일무이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슬슬 몰려들어오는 귀축영미의 해군을 막을 요새의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44년 7월 사이판 함락 이후 미군의 가시권 내에 일본 본토가 들어오며 그 들의 상륙 경로가 고민되기 시작한바, 이 문제를 두고 머리를 싸맨 끝에 크게 두 가지의 결론이 나왔습니다, 첫째로 괌과 사이판을 발판으로 일본 동남부의 오가사와라 제도를 점령 곧바로 간토 평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필리핀에서 오키나와를 거쳐 일본 서남부의 규슈 지역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지요,

문제는 두번째입니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미군이 제주도를 점령하여 이 곳을 발판으로 규슈 지역의 상륙 작전에 박차를 가할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륙의 관동군을 비릇한 지원 전력의 차단이 현실이 될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본토 대결전 그러니까 결호 작전이 준비된바 이 작전은 총 일곱개로 나누어 배비되어 졌는데 결 1호는 훗카이도 지시마, 결 2호는 토호쿠 결 3호는 간토 결 4호는 토카이 결 5호는 츄부 결 6호는 규슈 결 7호는 조선 그러니까 제주도 입니다, 즉 제주도는 일본 본토를 사수하는 최후이자 최초의 결전 지역중 한 곳으로 배비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견이 없던 것은 아닙니다, 45년 6월에 해군 군령부 1부에서 작성된 정황보고 (....)에 따르자면 오키나와에 구축된 미군의 전력으로 볼때 소련의 참전을 유도 하는게 아니라면 미군의 제주도 침공은 오판으로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만 동남아 일대와 태평양의 자원 수급과 수송 라인이 소멸된 이상 중국과 일본 본토를 잇는 대한 해협 일대의 사수는 필수였고 제주도는 이에 빠질래야 빠질수 없는 요충지 였던데다, 최종 목적지인 관동 그러니까 간토 지역을 공습하기 위해서는 전진 기지가 필요한바 한반도 남부나 규슈 북부 지역 일대가 물망에 올랐는데 여길 들어오려면 제주도는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미군이 다가오면 올수록 소련의 참전이 우려되는바 미군을 조기에 차단할 필요성이 존재하였고 이에 제주도에 대한 본토 대결전 준비는 차곡차곡 진행될수 밖에 없었지요.

특히나 45년 2월 미군이 필리핀에 이은 이오섬을 함락시키자 오키나와 본토와 규슈 일대의 상륙 가능성이 높아졌고, 이에 상륙 지점으로 훗카이도와 제주도가 주목된바 본토 대결전 준비에 있어 이 두 지역은 최 우선 대상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주도에 제 58군 사령부와 2개 사단 그리고 1개 혼성 여단 및 예하 부대를 들여보내는 한편 만주 일대에서 독립 구포 제 23 대대, 제 4 통신 중대, 몽강에서 독립 전차 제 12 연대, 제 14중대, 중국 북부에서 전신 제 11연대 중국 중부에서 분진포 제 1대대, 조선에서 독립 야포병 제 6대대가 제 58군의 휘하에 들어왔으며 한반도 본토에 제 121사단을 기동 병단으로 삼아 배비시켰습니다.

여기에 실제 결 7호 작전이 시행될시 관동군과 중국 방면군에서 2~3개 사단이 추가 증파 될 예정이었지요.

특히나 이러한 준비는 다른 지역에서는 8월 말에 기본골격을 완성하고, 10월 말에 모든 준비를 마치는 것으로 계획이 잡힌 반면 제주도는 8월 말에 미군이 상륙할 것으로 예상되어 그보다 1개월 앞선 7월 말에 기본골격을 완성하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다들 아시겠지만 대본영의 예상과는 다르게 움직이는데다 상상 그 이상의 진격속도를 보이는 미군 때문에 45년 6월부터 제3차 병비강화가 진행되었는데, 결 7호 작전을 주관하던 제17방면군의 이러한 전력강화 계획은 6월 25일에 미군에 의한 오키나와가 함락되고, 마리아나와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미군기에 의해 한반도 남부 해안 일대가 공격받음에 따라 다시 수정되었고 대본영은 제주도나 남부지방에 미군이 압도적인 항공 전력을 앞세워 상륙할 것으로 예상한바 이에 따라 한반도 남부 해안과 제주도에 집중적인 보강을 하게 됩니다.

가령 이렇습니다, 45년 6월에 부산에서 독립 혼성 제 127 여단과 전남에서 독립 혼성 제39 그리고 40여단, 독립 혼성 산포병 제20연대, 박격포 제20․21대대, 해상 수송 대대 2개, 해상 근무대 10개, 통신 작업대 2개가 신설되었고 7월에는 독립 야포병 제10연대, 박격포 대대 2개, 독립 공병 대대 2개, 통신 작업대 2개, 화물창 하나가 만들어 졌으며, 8월에는 박격포 대대 2개, 독립 야전 중포병 중대 1개, 독립 야전 고사포 중대 2개, 독립 전차중대 1개가 신설되었습니다,

이러한 준비 결과 제주도의 병력은 자료에 따라 오차가 있으나 약 7만 5천여명, 제주도 인구의 32.5?6?% 정도에 달했으나, km 당 보병대대 0.3개 기관총 3정, 연대포 0.9문, 박격포 1문, 화포 1문 등 담당하는 전면이 100km에 달한 반면 화력은 최하에 머물렀고, 이에 물자 보급 및 화력 보강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가령 분진포의 경우 아무런 탄환도 없이 배비되는 등 총체적인 난국을 겪어야 했습니다.

물론 이 들도 그러한 문제를 모르는 것은 아니라, 내륙 결전을 준비하였습니다만 이런 계획은 비행장과 항만 시설을 방비하기 위해 해안 결전을 요구하는 대본영과의 갈등을 불러올수 밖에 없어 타협을 하게 되었으며, 올지 안올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추가적인 지원 약속과 함께 대략적인 작전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작전의 준비는 총 3단계로 이루진바 첫번째로 45년 4~5월달 모슬포, 한림, 제주시 등 3개 방면으로 미군의 진격로를 예상하여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이른바 주진지대, 중부지역인 제주와 서귀포 중심으로는 공격 준비 진지대, 동부 지역에는 유격진지대를 설정했습니다

6월 초에는 2단계가 시작되었는데 앞서 설명드린 제 3차 병비와 함께 시작되었는데 독립 야포병 제6 연대, 제 12 포병 사령부, 독립 산포병 제 20연대, 박격포 제 29 대대, 독립 공병 대대 2개의 배속과 함께 기존에 중앙에 제 58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전방에 111사단, 중앙에 96사단, 후방에 독립혼성제108여단을 두었던 배치를 수정하여 제주도 서부 지역은 서남부지역 그러니까 안덕에서 대정 그리고 한경일대는 제111사단이 서북부지역 즉 한경에서 한림 그리고 애월 일대는 제121사단이 나누어 방비하였고, 제96사단과 독립 혼성 제 108여단이 남북으로 나누어 맡았던 중앙과 동부지역을 작전의 성격에 맞춰 동서로 구분하는 한편 공격 준비 진지대가 구축되는 중앙지역 즉 제주와 서귀포는 제96사단이 유격진지대인 동부지역 성산과 표선은 독립혼성 제 108여단이 담당 하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러던게 1945년 6월 25일 오키나와가 함락되며 3번째 단계로 접어드는데, 서북부지역은 제121사단이 주둔하였고 발이악을 중심으로 한림읍 금악과 애월읍 금덕 지역에는 각 1개씩의 보병 연대 병력들이 배치되었으며, 나머지 1개 연대는 서북부해안인 애월지역에 배비 시켰습니다. 

중앙 지역에는 여전히 제58군사령부 그리고 제 96사단이주둔했는데 제 96사단은 진드르와 정뜨르의 육군 동, 서 비행장의 경비 및 미군의진공에 대비한 기동 병단 이른바 소방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제 96사단 사령부가 자리한 산천단을 중심으로해서는 제96사단 소속 보병 제 292, 293, 294연대가 주둔했으며 동부 지역은독립 혼성 제 108여단이 맡은바 여단 사령부가 세화에서 송당 부근에 함덕에서 표선까지는 해안선을 따라 예하 6개 대대가 배치되었습니다.

이는 제주도 남부 지역에 진지의 40%가, 제주시를 중심으로 한 제주 중앙부에 30%의 진지가 밀집해 있는 것에서 볼수 있듯 제주도 서남부 지역에서 초동 단계의 해안 결전을 전개하고, '만약에' 패배한다면 중앙부인 제주시 지역에서 2차 결전을 치르며, '여기서도' 패하면 한라산 정상 부근까지 후퇴해 최후의 저항을 하겠다는 구도로 판단되는데 쉽게 말해 오키나와 시즌 2나 이오지마 시즌 2를 찍겠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배경에는 당연히 우리 나라 사람들이 대거 끌려간건 말할 것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미 39년 부터 각종 공사에 제주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일대에서 강제 징용과 군속으로서의 강제 노역에 끌려온 사람들로 북적였고, 결7호 작전이 준비되면서 현지에서 강제로 총을 쥔 사람들도 부지기수 였지요.

강제 공출은 말할것도 없는데, 특이한건 소나 말(!?), 송진유, 유기 그릇 같은 것들 뿐만 아니라 비행장에 깔 잔디도 공출의 대상이었고, 해조류의 일종인 감태는 화약의 원료, 고구마는 알콜의 원료, 소나무 뿌리 기름은 항공기 연료 의 대용품이라 해서 공출의 대상이었다는 것 입니다, 말 그대로 제주도가 하나의 독립된 거대한 농장이자 생산 공장과 같은 상황이었지요.

하나 더 재밌는 것은 이러한 공출을 막무가내로 한것 만은 아니고, 각 농가에서 반드시 소 2마리 씩을 기르되 숫소의 비중을 10% 이내로 줄이는 축우 개량 계획을 세우는 등 나름 체계적인 일면도 있다는 것이지요, 아 물론 그러한 체계적인 일면이 제주도민에게 이득이 될 일은 없었지만 말입니다.


첨언> 이러한 제주도의 가치는 현재도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중국의 해군 전력의 중심이 발해만과 동해안 일대에 집중된 현실에서 그 들의 움직임을 가장 기민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빠르게 대응할수 있으며 그 들의 대양 진출 자체를 커트할수 있는 지형적 조건 등을 고려해본다면 어디가 답일지는 사실상 명백한 노릇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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