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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타인의 고통》 정말로 공감할 수 있는가?
게시물ID : readers_277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시험안끝났다
추천 : 4
조회수 : 67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2/20 14:34:48

타인의_고토옹.jpg

《타인의 고통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지은이  수전 손택 Susan Sontag
옮긴이  이재원
출판사  이후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그리고 나의 주변 다른 사람들,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나는 ‘행복’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으며, 우리 모두 이것을 추구한다고(혹은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게,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행복이란 고통(-)과 쾌락(+)을 합쳤을 때 쾌락이 더 큰 상태, 양(+)의 상태를 의미한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 ‘양의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현재 추구하는 그 무엇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쾌락은 ‘안정’과 연결된다. 현재 양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을 이룬 상태이다. 행복에의 추구가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한다면, 이 상태에 있는 인간은 더는 무언가를 추구할 필요가 없어진다. 움직일 필요도 변화할 필요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순간인 것이다. 반면, 고통은 ‘불안’과 연결된다. 고통스럽다는 것은 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고, 즉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누군가가 만약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있다면, 그 사람과 더불어 그 사람의 고통에 연관되어있는 다른 사람들은 변화해야 한다.

  현재 상태가 양의 상태인지 음의 상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의 고통(혹은 쾌락)에 대해서는 딱히 고민하지 않아도 스스로 느낄 수 있다. 반면 ‘타인의 고통’은 어떤가? 나는 그것이 공감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해왔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 같이 눈물이 나며, 웃고 있는 사람을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공감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공감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현재 우리가 안정된 상태인지, 아니면 변화가 필요한 상태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공감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옆에 팔이 잘린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보면 우리가 팔이 잘린 것과 ‘똑같은’ 고통을 느낄 수 있겠는가? 심지어는 같이 팔이 잘렸다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사람으로서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공감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이성적이기보다는 종교적인 믿음에 가깝다. 공감은 사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헤아리는 일이다. 공감이 일어나는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타인의 고통 발생’ -> ‘타인의 고통 바라보기’ -> ‘타인의 고통을 바라볼 때 생겨나는 자신의 감정 헤아리기’

  책 《타인의 고통》(이하 타고)의 원제목은 “Regarding the pain of others”로 이 책은 공감이 일어나는 과정의 두 번째 단계, ‘타인의 고통 바라보기’에 대하여 다룬다. 주로 전쟁, 고문 등 타인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사진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그 사진을 찍는 행위와 그 사진을 바라보는 행위가 갖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 번째 단계에서 자신의 감정을 헤아릴 때, 그 감정이 연민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지로서 사진은 그림과 달리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고 여겨진다. 이를테면 전쟁의 참상을 찍은 사진은 그 전쟁 자체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믿어진다. “예술가는 데생이나 그림을 ‘제작’하고 사진작가는 사진을 ‘찍는다’라는 관습적인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 손으로 만든 이미지와 사진 사이의 차이점을 뭔가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사진 이미지도 그 자체로 일종의 모사라는 점에서, 당시에 일어난 어떤 일을 그저 투명하게만 보여줄 수는 없다. 사진 이미지도 누군가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다.”(타고, 74쪽) 사진에는 촬영 구도를 잡는 사진가의 의도가 담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약 사진이 어느 신문지면에 실린다면 그 지면을 편집하는 편집자의 의도 또한 담길 것이다. 이러한 의도들에 따라 고통을 담은 사진은 그 고통 자체와 어느 정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타인의 고통을 사진으로 ‘찍는’ 행위에서는 그 고통과의 ‘거리 두기’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 사진을 바라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고통을 담은 사진을 바라보는 것에는 일종의 “쾌락”이 존재한다.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 “자, 이것을 쳐다볼 수 있겠어?” 조금도 움찔하지 않은 채 이런 이미지를 쳐다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움찔거린다는 것 자체도 일종의 쾌락이다.”(타고, 66-67쪽) 이러한 쾌락은 앞서 말한 ‘거리 두기’에서 기원한다. 이를테면, 전쟁의 참화를 담은 사진은 멀리서 발생한 전쟁의 고통을 우리 눈앞에 가져다 보여준다. 하지만 사진이 만들어낸 ‘거리 두기’는 관음증적인 향락,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럴싸한 만족감”(타고 150쪽)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자신이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다면 이런 쾌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고통을 바라본다’라는 행위조차 할 수 없는 긴급한 상황, 1분 1초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바라보기’는 그런 상황에 처해있지 않을 때, 고통으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적, 공간적 혹은 심리적으로 거리가 있을 때 가능한 행위다.

  멀리 떨어진 곳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다. 이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자신이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있지 않다는 점, 더 나아가 자신이 그 상황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특권은 고통을 겪고 있는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연민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능력과 무고함이 담겨있다. 자신이 타인의 고통을 해결해줄 수 없을 때, 그리고 자신이 타인의 고통의 원인이 아닐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연민이다. 만약 타인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가령 의사와 같은 사람이라면, 고통스러워하는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해결 방안에 대하여 궁리할 것이다. 만약 타인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 있다면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연민을 느끼는 우리가 정말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능력하고 무고한가, 라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는 일이지만, 사진이 만들어낸 ‘거리 두기’에 의해 그 연관성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시리아 난민 사태에 대해 뉴스보도, 신문지면의 사진을 보고 연민을 느끼지만, 과연 ‘우리’가 ‘그들’의 고통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난민 사태는 그들의 문제일 뿐, 우리의 문제는 아닌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그 연관성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타고, 154쪽)
출처 http://blog.naver.com/mlnookang/2209390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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