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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하나. 들국화 - 행진.
게시물ID : readers_281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나니가와루이?
추천 : 0
조회수 : 37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4/02 18:4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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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커덕.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액자를 떼고, 탁자를 치우고, 소파를 버리고, TV를 팔고, 카펫을 말아놓고 보니 황량해진 거실이 울릴 것만 같은 큰 소리라고 그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 받았던 전화의 내용마저 순간 잊어버릴 정도로 쓸쓸한 소리에 그는 울고 싶어졌다. 서류는 제출했어. 여자의 무뚝뚝한 전언이 전부였다. 그는 간신히-정말 간신히, 흔들리지 않는 음성을 연기해가면서-응, 하고 대답했다. 그래. 여자가 그의 대답을 받았다. 뭔가 더 이어지는 말도 없이 전화는 그 순간 끝이 났다. 그래서 끝이 났다. 짧았던 몇 년의 세월이 수화기 너머 뚜뚜 울리는 신호음을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없어져버렸다. 그는 잠시 수화기를 들고 있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던 것이다. 납득한 것 아니었냐고 되내면서 그는 담배를 찾아 물었다.

기왕 나갈 집이니까 적당히 청소만 해 둘 생각이었다. 그동안 집 안에서 피우지 못한 담배를 피는 것 정도야 뭐 어떤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삿날은 내일이었고, 준비할 것은 많지 않았으며, 자는 곳만 대충 정리해놓고 가면 그만이었다. 가재도구가 비워진 공간이 너무 더러워서 걸레로 대충 닦아둔 것이 전부였다. 허연 걸레는 금새 더러워졌다. 다시 빨아서 검은 자국이 지워질 때까지 닦았다. 걸레는 쉽게 하얗게 되었다. 그는 허연 걸레로 다시 방을 닦았다. 닦을 바닥이 없어서 신문지로 덮어둔 책장의 먼지를 슬쩍 문질러가며 닦아냈다. 그렇게 하고 나서도 닦을 곳은 많지 않았다. 굳이 화장실이나 싱크대, 가스레인지를 닦아둘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생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청소를 했던가? 그렇지는 않았다고, 그는 생각하면서 창틀을 닦는다. 다만, 그렇지 정말 다만 조금 더 나은 모습이 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보일 모습을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이해하고 청소를 계속한다. 일종의 자위행위처럼 그는 청소를 계속한다. 하, 메마른 웃음이 입꼬리에 걸려서 차마 넘어가지 못하고 방안을 맴돌았다.

청소는 생각보다 일찍 끝나버렸다. 이삿짐을 정리해둔 집 안에서 청소할 꺼리는 많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였다. 그는 아쉬운 눈길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자기의 짐을 정리해둔 방에도 한 번 들어가보고, 짐이 없는 방에도 들어가 보았다가 나와보면서 그는 부재不在에 대해서 생각한다. 아무도 없는 방의 존재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아무런 필요도 없는 방의 의미는 없었다. 휑한 방은 보일러마저 통하지 않는 듯한 차가움이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내가 이 방을 내 집에 두고 살았던가? 그는 순간 떠오른 의문에 답하지 못했다. 아마도 이 집을 떠나는 순간까지 답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소파가 치워진 거실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보일러를 돌려두었기 때문에 바닥은 뜨끈뜨끈했다. 그는 그저 멍하니 천장만을 올려보았다. 텅 빈 거실은 따뜻했다. 그것이 오히려 그를 더 추워지게 하는 것 같았다. 그 역설적인 온도의 차이. 그 이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의미없는 짓은 가치가 없다. 가치없는 일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괴이한 삼단논법으로 구성된 논리가 그의 머리 속을 들쑤셔놓았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천장에서 TV가 있던 장소로, 다시 냉장고가 있던 장소로, 테이블이 있던 장소로, 소파가 있던 장소로, 사진이 걸려있었던 벽으로 시선만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추억? 추억. 과거의 지나간 일들은 시간이라는 향신료를 더해서 평범한 일상마저도 화려하게 장식해버린다. 천장에 달아두었던 형광등을 갈았었지, 투덜거리면서. 그때는 쉬는 날에 귀찮게시리 뭔가를 시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진심은 아니었어. 투덜거리면서도 내 입은 웃고 있었거든. 그랬지. 하면서 그는 실핏 웃었다. TV를 보면서도 그는 자주 소리를 높였다. 보고싶은 드라마나 스포츠 경기에서는 절대 리모컨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끝내는 그것때문에 얼굴을 붉힌 적도 있었다. 화를 내고, 소리를 치고, 때로는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같은 드라마를 보고, 같은 장면에서 웃고, 같은 장면에서 울었던 적이 훨씬 더 많았다. 그랬었지. 그는 다시 실풋 웃었다.

짐을 챙겨놓은 방에서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뻔한 전화들이었으니까. 그래도 전원을 꺼 놓지 않는 것이 그들에 대한 자신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무슨 예의? 그들의 화를 돋궈주는데에 필요한 예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봐줬으면 했다. 차라리 진동으로 해 두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휴대폰의 부재중 전화는 마흔 일곱 통이었다. 당신들도 절박하겠지. 그는 휴대폰 너머에서 울상을 지어가며 통화대기음을 듣고 있을 누군가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미안합니다. 소리내어 중얼거린 말에는 현실감이 없었다. 현실감? 애초에 그런게 있을 리가 없었다.

진동 모드로 바꿔둔 휴대폰을 대충 내팽겨치고 다시 거실로 나오다가 베란다의 창고 문이 슬쩍 열린 것을 보고 닫으려고 다가간다. 안에는 별 것 없었다. 버리기 귀찮아 처박아둔 책들. 쓰지 않는 그릇들. 낡아서 버리려고 했던 작은 수납장 등 잡다한 것들이다. 이런 것까지 버리기도 귀찮아서 치우지도 않았다. 알아서들 하겠지 싶었던 것들이 전부인 곳이라서 그는 그냥 문을 닫으려고 하다가, 문득 한 쪽 구석에 세워진 케이스 하나를 발견한다. 먼지가 조금 앉은 기타 케이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비싸지도 않은 싸구려 기타는 그것을 사려고 했을 당시의 그에게 있어 꽤 거금을 모아서 장만했었던 것이었다. 그 생각이 나서, 그는 대충 먼지를 털고 기타 케이스를 집어들었다.

거실로 돌아와서 케이스 안의 기타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꺼낸 지 반년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줄은 낡았고, 손질해두지 않아 음도 불안할 것이다. 현 하나를 뜯자 거친 음이 튕겨나왔다. 조율도 안 해놨으니 당연한 일인데도 왠지 그 생뚱맞은 음이탈이 꼭 자신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는 조금 웃었다. 다행히 같이 들어있던 조율기에 건전지가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전원을 켜고 음을 맞춰서 현을 조였다. 간단하게 코드 몇 개를 잡아보면서 뚱땅거렸다. 조율되긴 했지만 되는대로 잡은 코드에 맞춰 튕겨진 음은 제멋대로 놀았다. 간단한 곡 몇 개가 생각나서 피크를 잡아들고 뜯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바로바로 칠 수는 없었다. 때로는 놓치고, 때로는 잘못 짚어가면서 그는 노래 하나를 연주했었다. 여자는 그가 가끔씩 기타를 꺼낼 때마다 껄껄 웃었다. 어설픈 그의 연주실력 때문이기도 했고, 걸걸한 목소리로 어울리지 않는 노래-사랑노래라던가, 이별노래라던가, 달큼한 노래라던가, 달달한 팝송이라던가-들을 얼굴이 벌개져가면서 부르는 모습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여자는 좋아라 했었다. 몇몇 곡을 부를 때만 빼고. 가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싫다고 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곡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는 익숙한 코드 몇 개만 반복해서 짚어보기 시작했다. 그저 그런 기억일 뿐인데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답답했다. 그냥 답답했던 거다. 그는 거칠게 현을 뜯었다. 음이 제멋대로 튕겨진다. 몇 개의 코드, 몇 개의 단어들만 그냥 기억이 나다가 머리 속 저 멀리에서 여자의 찌푸린 얼굴과 함께 가라앉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생각날 것 같다. 겨우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도 간절해진다. 유치해진다. 그, 그 곡. 그 노래.

연주는 이어지지 못했다. 번개처럼 갑자기 울려댄 인터넷전화기 때문이었다. 엊그제 회사에서 빈 자리의 전화기-물론 번호는 있었던 물건이다.-를 몰래 떼와서 주말에만 달아두었다. 휴대폰으로 연락할 수 없었으니까. 번호는 두 사람에게만 알려주었다. 하나는 여자에게였고, 하나는 어머니에게였다. 여자는 방금 전에 전화가 왔으니 이번에는 어머니일 터였다. 그는 황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피곤에 절은 목소리가 들렸다. 몸은 괜찮니. 그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한숨. 조금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머니가 물었다. 어쩌다가... 잦아들어가는 작은 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귀에는 마치 비명처럼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그는 그 한마디만 할 수 있었다. 그에게 허락된 단 한마디였다. 죄송합니다.. 보일리가 없을 텐데도 그는 수화기 너머의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게 며늘아기도 말린 것을 왜 네가 그렇게 해서 이 꼴을 만들어어... 친구가 뭐라고, 의리가 뭐라고오, 이놈아아아... 어머니의 말이 울음에 걸려 고꾸라진다. 높아지고 다시 낮아진다.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한 마디를 흘려넣고 나서 다시 할말이 없었다. 전화선 너머의 어머니는 울음을 참는 듯 숨을 몰아쉰다. 느이 누나한테는 얘기 안 했어어.. 너 그렇게 된 거 나만 알어. 잘하셨어요. 뭐 좋은 일이라고 얘기를 하겠어요. 여기 정리되면 전부 처리되는 거니까 너무 걱정 마셔요. 말씀 드렸잖아요. 그는 억지로 이야기를 잇는다. 아이구우.. 한숨소리가 비명같이 그의 귀를 찌른다. 어머니의 한숨소리. 떠나간 여자의 한숨소리. 끊을게요. 이 전화로는 전화 하지 마세요. 조만간에 정리가 좀 되면 뵈러 갈게요. 저 찾는 사람 있으면 무조건 모른다구만 하세요. 아셨죠. 전 나간 아들이니까 모른다고만 하세요. 호적에서 팠다고 하세요. 그건 제가 다 처리할테니까요. 어미에게 자신을 버리라 하는 아들의 불효는 얼마큼이나 될까. 자신이 드리게 될 불효는 대체 어디까지일까. 아들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어미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그 가늠할 수 없는 물음들에 대해서 눈을 감았다. 다른 방법은 없어. 그렇게 납득하지 않았느냐고 자신을 타이르면서.

다시 돌아와서 천장을 바라보면서 눕는다. 그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부질없이 흩어져간 자신의 믿음과 친구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의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그는 믿으려고 했다. 그래서 도장을 찍었다. 결혼 전에도 알고 지내던 여자는 그의 친구와도 십년을 넘게 알고 지냈지만 끝까지 그를 말리려고 했다. 남자만 우정 있냐. 나도 우정 있다. 나도 의리 있지만 이건 아니다. 여자의 말은 논리정연했고 틀림이 없었다. 그는 납득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었다. 우정 좋다. 의리도 좋다. 나는 믿어서 그런다. 친구를 믿는거다. 내가 급할 때 믿어줄 사람이 가족 말고 없다는 건 너무 슬픈 것 아니냐. 나와 그 친구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만약 뭐가 잘 안되더라도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게 해본다고 하지 않느냐. 세상에 몇 없는 단짝이다. 나 어릴때부터 나랑 항상 붙어있던 놈이다. 그런 놈을 내가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믿어주겠나. 그러니까 당신도 나 믿어라.

결과로 말하자면 지금 이 꼴이다. 30년을 알아온 단짝 친구는 어느 순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어느 골짜기로 숨었들었다는 이야기도 돌았고, 외국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에게 찾아올 현실뿐이었다. 여자가 좋아하던 외국의 뮤지컬의 어느 노래가 이야기한 것처럼 불행은 순식간에 찾아들었다. 밀려드는 독촉장과 하나둘씩 찾아오기 시작하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의 이야기, 분노, 욕설들.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느새 내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하나씩 무너져가는 소리가 매일 그의 현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현실 이상의 절망은 손쉽게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의 원인은 친구에 대한 그의 터무니없는 믿음이었고, 그 결과로의 과정은 낙하하는 롤러코스터처럼 한순간이었다.

여자와 함께하기 이전부터 모아두었던 돈으로 장만한 아파트도, 한푼 한푼 모아가며 마련한 살림들도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남은 것에 대해서는 법에 기대보기로 했다. 그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처리해두어야 했다. 직장에서도 그런 그를 원치는 않았을 것이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권고라는 형태의 판결을 그는 아무말 없이 받아들이고서 자신의 자리를 조용히 정리했다. 주변 사람들은 수근거리면서도 형식적으로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관련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해했고, 그것마저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가장 큰 이해가 필요했던 것은 여자와의 문제였다. 필요 이상의 짐은 여자의 가족에게까지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 그가 먼저 말했다. 여자는 아무말 없이 며칠동안 집을 비웠다. 일주일이 지난 다음 여자는 알겠다고 했고, 서류에 대해서는 자기가 준비해놓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방금 전 그 모든 절차는 끝이 났다. 그로써 그의 모든 현실들은 이제 과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머니의 아들. 직장에서의 직급. 한 여자의 남편.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의 위치.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모든 것들의 시작이 자신에게서부터 나왔다.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수 밖에. 인정하는 수 밖에.

그렇게 누워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는 매캐한 담배 냄새가 코를, 눈을 찌르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오늘만은 좀 내버려둬. 오늘만은 용서해줘. 저 방에서 쉴새없이 울리는 휴대폰을 향해서 그는 빌었다. 제발, 오늘만은.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했잖아. 남은 것도 어떻게든 처리해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잘못했으니까. 뭔지는 모르지만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는 빌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책임을 떠 맏아서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 때문에 빌어야 하는 자신을 오늘만큼은 가엽게 여기고 싶었다. 불쌍하게 여기고 싶었다. 병신처럼 매도해주고도 싶었고, 갖은 욕을 전부 퍼부어주고도 싶었다. 내가 나에게,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오늘만큼은 당신들의 원망을 내게 처리해달라고 하지 말아줘.눈물이, 쓰린 것이, 질척질척한 감정들이 쏟아져 흘러나온다. 천장을 바라보면서, 몸부림치면서, 되지도 않는 소리를 꺽꺽 뱉어내면서

그는 울었다.

그렇게 울다가 지친 뒤에도 다시 울고, 또 울고, 계속 울다가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그는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것들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베란다 밖을 바라보았다. 노을. 다 꺼져가는 노을이 마주선 아파트 사이로, 세상에 젖어들고 있었다. 해가 진다. 그는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쉬어버린 목소리가 껄럭대며 말을 맺는다. 진다. 해가 진다. 오늘이 갔다. 그는 멈추지 않고 중얼거렸다. 왔다가, 가고, 다시 오고, 다시 지고, 다시 떠오른다. 해가, 진다. 밤이 온다. 내일이 오겠지. 내일은 오겠지. 내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일은 오겠지.

그러면 살아야지.

그는 중얼거린다. 그래도 살아야지. 의미가 없어도 살아야지. 내일이 오니까 살아야지. 오늘은 갔으니까 살아야지. 내일의 해가 뜨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살아야지.

변하는 것 따위는 없고, 악몽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깨어나지도 않고, 더욱 비참해지고, 더욱 절망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살아야지.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살아야지.

그는 문득 기타를 집어들었다. 뭔가에 이끌린 것처럼 코드를 짚어나간다. 디 마이너, 이 마이너, 다시 디 마이너, 씨. 그에게 코드를 가르쳐주던 형은 노래를 자주 불렀다. 이 노래였다. 형은 컬컬한 목소리로 불러야 한다며 일부러 거칠게 그르렁 거리면서 불렀다. 그 때 그 형은 이 노래를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 이 노래의 가사를 받아들였던 걸까. 무슨 마음으로 이 가사를 불러야 할지 알고 있었던 걸까.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자연스레 노래를 부른다. 잔뜩 울어서 쉬어버린 목소리로 그는 노래를 부른다. 손은 쉬지 않고 다음 코드를 짚어나가고, 피크를 튕긴다. 그래, 어둡지만, 정말로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힘들다는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었던 악몽같은 기억들은 모두 오늘의 일이고, 앞으로도 이어져갈 일이다. 현실은 비참하고 어두웠고, 미래를 바라볼 수 조차 없게 만드는 모든 것이 그의 주변에 놓여있다. 절망만이 그에게 남아있는 단어였다. 그렇지만

그러나, 나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비참하기만 했던 기억이었나? 모든 것이 절망적인 기억이었나?

내가 추억의,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는 인정하고자 했다. 사랑할 수 없는 기억들을, 과거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함으로써 사랑했던 기억들을, 사랑할 수 있는 추억들을, 과거들을 인정하고 싶었다. 내 인생이 나빠졌다고 해서, 절망에 빠졌다고 해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신세라고 해서, 그동안의 모든 일들마저 절망이라는 이름의 색으로 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외친다.

행진.

행-진.

행-진.

하는거-야.

디 마이너, 씨, 디, 디 마이너, 씨. 그는 계속 부른다. 행진. 행진. 멈추지 않고 가자. 행진.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른다. 굴복하지 않겠노라고, 나는 가겠노라고 그는 노래를 부른다.

행진. 
 
행-진.

행-진.

하는거-야.

그는 계속 부른다. 기타의 줄이 오랜만의 격렬한 진동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제 몸을 툭 끊어버렸는데도 그는 피크를 튕겼다. 음이 어딘가 한 가락씩 빠져나와도 그는 노래를 불렀다. 쉬어터진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왜 그렇게 슬픈걸까.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그는 스스로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다시 노래를 부른다.

행진. 행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행진. 그러나 끊기지 않을 행진. 삶이라는 길에의 행진. 포기하지 않을 행진.

쉴새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목구멍 뒤로 넘어가는 콧물 때문에, 새어나가는 숨소리만 나오는 쉬어터진 목소리 때문에, 더 이상 피크를 쥘 수도 없을만큼 빠져나간 팔 힘 때문에, 격한 진동을 못이기고 부어오른 물집들 때문에 그가 노래를 멈췄을 때는 이미 누런 달이 하늘 높이 떠 있을 무렵이었다. 그는 지친 팔로 기타를 내려놓았다. 기타를 치기 전에도 흘릴만큼 흘렸다고 생각했던 눈물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끊임없이 비어져나왔다. 너무 흘려대었기 때문일까. 눈이 아파서, 그는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그는 휘청이며 일어났다. 문을 열자, 아랫집의 사람인 듯 잔뜩 찌푸린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아마도 한 소리 쏘아줄 생각인 듯 했지만, 잔뜩 부은데다가 제대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쉬어터진 목소리에 흠칫 한 듯 너무 시끄럽다며 주의 좀 해달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 돌아서버렸다. 그는 고개를 숙였고 문을 닫았다.

자야 했다. 내일은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이삿짐을 옮겨야 했다. 남은 돈을 처리하기 위해 법무사와도 상담을 해봐야 했고, 전화기도 회사에 돌려놓기 위해 가야 했다. 휴대폰은 내일도 부재중 전화를 수두룩하게 남길 것이고, 어머니에게는 올해가 가기 전에는 연락드릴 수도 없을 것이다. 변하지 않을 내일이 온다. 그렇지만

행진.

하고 그는 잔뜩 쉬어서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입을 열어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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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다 읽으셨다면 위의 링크를 통해 행진을 한번 듣고 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엊그제, 아는 후배(여자)들과 간단하게 술을 먹었고, 노래방을 갔었죠. 저는 요즘 노래는 잘 모르고 좋아하는 노래는 들국화나 유재하 등 옛날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불렀더니 왜 이리 옛날 노래만 부르냐고 하더군요. 요즘 노래들에도 좋은 노래들 많다고.
그러냐고 대충 고개를 끄덕인 다음 집에 와서 들국화 노래를 검색해서 들어보았습니다. 언제 들어도 눈물이 났습니다. 왜 그런지도 알수 없게 눈물이 나더군요.
나이를 먹어가면서(비록 얼마 안되는 나이긴 하지만) 저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또는 부를 때마다 눈물이 나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담담하게(그러나 세상에는 담담하기에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현실을 받아들이고서, 그래도 나는 행진. 행진하겠다고 하는 이 가사는 몇 십년의 세월이 흘러도 제게 있어 눈물나게 하는 노래 베스트 1에 들어서는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썼습니다.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겠죠.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이 노래를 한번 들어보게 된다면, 하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졸렬하고 낙서같이 휘갈긴 글이 노래를 망치지 않았기만을(이미 망쳐버리기도 했지만) 바라는 마음으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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