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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순신에 관한 주장 정리
게시물ID : history_278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5
조회수 : 1643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7/04/08 10: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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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그냥 답글도 길어지고 참 이야기가 갑갑하게 흘러가서 그냥 글을 새로 팝니다, 두서없는 글이라 어느 정도 전달될지도 모르겠고 이해될지도 모르겠으나 몇자 작성해보려합니다, 닉네임 언급은 생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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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께서는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라는 책에서 말하듯 현대식 해전을 방불케 하는 함포전 (이하 현대적 함포전)만으로 이순신 장군은 해전을 치루었다 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리고 기록에 나오는 각종 백병전은 그러한 현대적 함포전의 화망을 돌파한 적선의 뒤처리 정도로 볼수 있다라고 하시지요, 

그게 사실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의 정황을 확인하기 위하여 기록을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이순신 장군이 올린 장계를 종합한 임진 장초라는 사료가 있습니다, 종군한 여러 해전의 상세한 경과와 정확한 진중의 정황을 담고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사료로서 이순신 장군과 7년 전쟁에 대한 연구에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사료라고 볼수 있지요,

거기에서 무어라 적혔는지를 몇가지 전투를 발췌하여 보자면 

1. 옥포해전

좌부장 낙안 군수 신 호는 왜대선 1척을 당파하고 왜적의 머리 1급을 베었는데 배안에 있던 칼 갑옷. 의관 등은 모두 왜장의 물건인 듯 하였으며, 우부장 보성 군수 김득광은 왜대선1척을 당파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되었던 1명을 산채로 빼앗았고, 

전부장 흥양 현감 배 흥립은 왜대선2척을,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은 왜중선 2척과 소선 2척을, 우척후장 사도 첨사 김 완은 왜대선 1척을, 우부기전 통장이며, 사도진 군관인 보인 이춘은 왜중선 1척을, 유균장이며 발포 가장인 신의 군관 훈련 봉사나 대용은 왜대선 2척을, 후부장 녹도 만호 정운은 왜중선 2척을, 좌척후장 여도 권관 김 인영은 왜중선 1척을 각각 당파하고, 

좌부 기전 통장이며 순천 대장인 전 봉사 유섭은 왜대선 1척을 당파하고 우리 나라 사람으로 포로되었던 소녀 1명을 산채로 빼앗았으며, 한후장이며 신의 군관인 급제 최 대성은 왜대선 1척을, 참퇴장이며 신의 군관인 급제 배 응록은 왜대선 1척을, 돌격장이며 신의 군관인 이 언양은 왜대서 1척을, 신의 대솔 군관인 훈련 봉사 변 존서와 전봉사 김효성등은 힘을 합하여 왜대선 1척을 각각 당파하였으며, 

경상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왜선 5척을 당파하고 우리 나라 사람으로 포로 되었던 1명(3명-全書)을 산채로 빼앗았는데, 합해서 왜선 26척을 모두 총통으로 쏘아 맞혀 깨뜨리고 불사르니 넓은 바다에는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덮었으며, 산으로 올라간 적도들은 숲속으로 숨어 엎드려 겁내지 않는 놈이 없었습니다.


2. 당항포 해전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일시에 운집하여 철환과 장편전. 피령전. 화전 및 천.지자 총통 등을 비바람같이 발사 하면서 저마다 힘을 다함에 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습니다. 왜적들은 부상을 당하여 엎어지는 자와 부축하여 달아나는 자의 수을 알 수 없었으며, 높은 언덕으로 도망쳐 진치고서는 감히 나와 싸울 생각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중위장 순천 부사 권준. 중부장 광양 현감 어 영담. 전부장 방답 점사 이 순신. 후부장 홍양 현감 배 흥립. 좌척후장 녹도 만호 정 운. 우척후장 사도 첨사 김 완. 좌별도장 우후이 몽구. 우별도장 여도 권관 김 인영. 한후장이며 신의 군관인 전 전 군관 고 안책. 급제 송 성.참퇴장 전 첨사 이 응화 등이 번갈아 드나들면서 왜선 전부를 당파 분멸하였으며, 김 완은 우리 나라 소녀 한명을 찾아내었고, 이 응화는 왜인 한명의 목을 베었는데, 왜인들이 멀리서서 바라보며 부르짖고 발을 구르며 대성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그날 당포에서 접전할 때, 우후 이몽구가 왜장선을 수색하여 찾아낸 금부채 한자루를 신에게 보냈는데, 그 부채의 한쪽 중앙에 쓰여 있기를「6월 8일 수길」라 서명하였고, 오른편에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라는 다섯 자를 썼고, 왼편에는 「구정유구수전(龜井流求守殿)」라는 여섯 자를 썼으며, 이를 옷칠한 갑 속에 넣어 두었다는 것으로 보아 필시 <수길>이가 <축전수>에게 부신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비포 권관 이 영남이 그 왜장선에서 울산 사삿집 계집종 억대와 거제소녀 모리 등을 산채로 사로잡았는데, 신이 직접 문초한바, 억대의 답하는 내용에, 『날짜는 기억할 수 없으나, 15일전 왜적에게 포로되어 왜장에게 시집가서 늘 한곳에 있었습니다.

-중략- 

그런데, 신의 허망한 생각에 만약 저 적들이 형세가 불리하게 되어 배를 버리고 상륙하면 모조리 섬멸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우리들이 짐짓 포위한 진형을 해체하고 퇴군할 것을 보이면 적들이 필시 그 틈을 타서 배를 옮길 것이니 그때 좌우에서 추격하면 거의 섬멸할 수 있으리라.』 라고 전령한 뒤에 퇴군하여 한쪽을 개방하자, 층각선이 과연 개방된 수로를 따라 나오는데, 검은색 돛을 둘씩이나 달았으며, 다른 배들은 날개처럼 벌려 층각선을 옹위하며 바다로 노를 재촉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의 여러 전선은 4면으로 포위하면서 재빠르게 협격을 가하고, 돌격장이 탄 거북선이 또 층각선 밑으로 달려가서 총통을 치솟아 층각선을 깨뜨리고, 여러 전선이 또 화전으로 그 비단 장막과 돛배를 쏘아 맞혔습니다. 그러자, 맹렬한 불길이 일어나고 층각 위에 않았던 왜장이 화살에 맞아 떨어졌습니다. 

다른 왜선 4척은 이 창황한 틈을 타서 돛을 달고 북쪽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신과 이억기 등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은 패를 갈라서 접전하며, 또 모조리 포위하자, 적선중의 허다한 적도들은 혹은 물에 빠지기 바쁘고 혹은 기슭을 타고 올라가며 혹은 산으로 올라 북쪽으로 도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사들은 창 칼 활 화살 등을 가지고 저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추격하여 머리 43급을 베고 왜선 전부를 불살라 버린 뒤에, 짐짓 배 한 척, 남겨둔 채 왜적들의 돌아갈 길을 개방해 두었으나, 이미 황혼이 짙어 어둑어둑하여 육상에 오른 왜적은 다 사로잡지 못하고, 이 억기와 함께 어둠을 타서 그 바다 어귀로 나와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6일 새벽에 방답 첨사 이 순신(李純信)이 <당항포에서 산으로 올라간 적들이 필시 남겨둔 배를 타고 새벽녘에 몰래 나올 것이라>하여 그가 통솔하는 전선을 거느리고 바다 어귀로 가서 적들이 나오는 것을 살피고 있다가 전부를 포획하고 급히 보고한 내용에, 『오늘 새벽에 당항포 바다 어귀로 배를 옮겨서 잠깐 있는 동안 과연 왜선 1척이 바다 어귀로 나오는 것이므로 첨사가 불의에 돌격하였습니다. 

1척에 타고 있는 왜적들은 거의 100여명이었는데, 우리편 배에서 먼저 지자 및 현자 총통을 쏘는 한편 장편전. 철환. 질려포. 대발화 등을 연달아 쏘고 던질 즈음에 왜적들은 마음이 급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등지둥 도망하려 하였으므로 요구금을 이용하여 바다 가운데로 끌어 내자, 반이나 물에 뛰어들어 죽었습니다. 

왜선에 포로된 우리 나라 사람을 찾아내어 생환하게 하는 것은 왜적의 목을 베는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왜선을 불사를 때에는 각별히 찾아서 구해내고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고 약속하였습니다. 이번에 여러 장수들이 위의 지시에 따라 포로되었던 남녀 6명을 산채로 잡아내었습니다. 이들 중에 다른 사람들은 나이가 어리거나, 포로된 날자가 짧아서 적의 소행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3. 한산해전

그래서 바다 가운데로 나와서는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벌려서 일시에 진격하면 각각 지자. 현자. 승자 등의 각종 총통을 쏘아서 먼저 2,3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도망치려 하였습니다. 여러 장수나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을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마구 발사하니, 그 형세가 바람과 우뢰같아, 적의 배를 불사르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거의 다 해버렸습니다. 

수천 부사 권준이 제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선 1척을 깨뜨려서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고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10급을 베고, 우리나라 남자 1명을 산채로 빼앗았습니다. 광양 현감 어영담도 먼저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1척을 깨뜨려 바다 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고 왜장을 쏘아 맞혀서 신의 배로 묶어왔는데, 문죄하기 전에 화살을 맞은 것이 중상이고 말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즉시 목을 베었으며, 다른 왜적을 비롯하여 머리12급을 베고, 우리나라 사람 ·1명을 산채로 빼앗아 왔답니다. 

사도 첨사 김완은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16급을 베었고, 흥양 현감 배흥립이 왜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8급을 베고, 또 많이 익사시켰습니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왜대선 1척을 바다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2척을 쫓아가서 깨뜨리고 일시에 불살랐습니다. 좌돌격장 급제 이기남은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사로잡아 머리 7급을 베었습니다. 

별도장이며 본영의 군관인 전만호 윤사공과 고 안책 등은 층각선 2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6급을 베었습니다. 낙안군수 신호는 왜대선 1척을 바다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7급을 베었습니다. 녹도 만호정운은 층각대선 2척을 총통으로 속까지 꿰뚫은 것을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불사르고, 머리 3급 베고,우리 나라 사람 2명을 산채로 빼앗았습니다. 

여도 권관 김인영은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3급을 베었습니다. 발포만호 황정록은 층각선 1척을 여러 전선과 협공하여 힘을 모아 깨뜨리고 머리 2급을 베었습니다. 우별도장 전 호 송응민은 머리 2급을 베었습니다. 흥양 통장전현감 최천보는 머리 3급을 베었습니다. 참퇴장 전첨사 이응화는 머리1급을 베었습니다. 

우돌격장 급제 박이량은 머리 1급을 베었습니다. 신이 타고있는 배에서는 머리 5급을 베었습니다. 유군 1령장 손윤문은 왜소선 2척에 총을 쏘고 산위에까지 추격하였습니다. 5령장 전봉사 최도전은 우리 나라 소년 3명을 산채로 빼앗았습니다. 그 나머지 왜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 등은 좌.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불살라 깨뜨렸으며, 화살을 맞고 물에 떨어져 익사한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자 확인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상기 전투들에는 화포의 사용에 있어 공통된 내용이 있습니다, 적선에 돌격하기 직전에 화포를 쏘던가 혹은 질려통, 철환, 대발화 같은 개인 화기를 함께 쏘던가 말입니다, 즉 교전 거리는 매우 짧았습니다, 그리고 거의 항상 그러한 화력 투사/당파는 적선에 보딩에 앞서 일어났지요, 

비단 그러한 사실은 이순신 장군의 기록으로만 입증되는 내용은 아닙니다, 조선 수군 규정인 수조 규식이라는 사료가 있습니다, 해상훈련 시 대/중 총통의 최초 사격거리는 200보, 조총은 100보, 활은 90보로 규정되어 있는데 1보를 1.2m로 보는 보편적 이론에 따르자면 실제 조선 수군의 총통 사격 시작 거리는 240m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적선이 100보 이내로 근접하면 조총 사격을 시작한다고 되어 있는데 동시에 100보에서부터 함선을 선회하면서 사격하도록 되어 있고 활의 경우 90보 이내로 들어 오면 사수(射手)들이 활로 화살을 쏘라고 규정한 대목과 30보 이내에서 사 부(射夫)들이 활을 쏘도록 규정한 내용이 동시에 수록되어 있으며 또한 30보에서 활을 쏜 후 탄환을 쏘고 관분통(罐噴筒)과 석류화전(石榴火箭)도 사용할 것을 명시하면 더 근접해서 현측에 접근한 상태가 되면 분화(噴火), 철도리깨(鐵道里鞭)를 사용하고 조약돌을 던져 교전하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해상은 안정된 지상과는 다르게 요잉/피칭/롤링이라는 탄도곡선을 일그러트리는 외부 요인이 있습니다, 그러한 외부 요인들을 감안할때 사거리는 심각하게 떨어질수 밖에 없는데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적성 기록이라고 볼수 있는 일본의 고려해전기를 본다면 안골포 해전에 관한 기록중 서로 교대로 출입하면서 천자, 지자, 현자총통과 여러가지 총통 뿐만 아니라 장편전 등을 빗발같이 쏘아 맞혔다 라는 언급이 되어 있는 한편 3차 한산도 대첩에는 

......(전략)......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경(酉ノ刻)까지 번갈아 공격하여 (아군 배의) 고루(高樓)며 통로며 발을 보호해주는 방어시설까지 모두 부수었다. 그 대포는 약 150cm(5尺) 길이의 단단한 나무 끝을 철로 두르고 철로 된 날개도 삼면에 붙이고.......(중략)......화살을 붙인 무기이다. 불화살은 끝에 철을 둥글고 튼튼하게 붙인 것이다. 이런 화살을 약 6~10m(3~5間) 거리까지 다가와 쏘았다. 구키 님은 니혼마루(日本丸) 배의 고루에서 조총(鐵砲)을 쏘셨는데, (적이 쏜) 대포를 한 발도 맞지 않았으니 불가사의한 일이라 하겠다......(후략)......

이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또한 같은 임진장초에서 기록된 내용중 해전과 육전에 관한 일을 자세히 아뢰는 계본에서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현자총통을 쏘고 이어서 포환과 시석을 빗발치듯 우박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해전의 쉬운 점입니다. 

라고 말하고 계시기도 하지요.

심지어 명종 실록 14년에는 

戰船左右前後, 排設天·地·玄字銃筒, 整備器械, 人伏板屋之下, 不露形體, 而疾棹直進, 迫近賊船, 隨其高下, 一時齊發, 則豈有不破之理, 亦豈有人被鐵丸之患乎? 전선의 전후 좌우에 천·지·현자[天·地·玄字] 총통을 설치하여 기계를 정비하고 사람들은 판옥板屋 밑에 숨어 몸을 노출시키지 않고서 빨리 노를 저어 곧장 적선에 가까이 다가가 그 높낮이에 따라 동시에 일제히 발사했다면, 어찌 격파하지 못할 이치가 있었겠으며 사람들이 철환을 맞을 염려가 있었겠느냐?

라는 명종의 발언까지 나오는 상황입니다, 즉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대적 함포전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주력은 아직까지 활을 비릇한 개인화기라는 사실을 알수가 있지요,

또한 현대적 함포전이 존재할수 없었다 라는 사실을 입증할수 있는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의 생산력이지요, 조선의 생산력은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떨어지기에 현대적 함포전을 수행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임진장초의 기록에는 비단 전투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營及各鎭浦所在火藥, 元數不敷爲白如乎, 戰船分載, 五征嶺海, 幾盡放下......(中略)......臣矣軍官訓鍊主簿李鳳壽, 得其妙法, 三朔之內, 焰硝一千斤煮出爲白乎等用良, 同焰焇合劑, 營及各官浦惠伊, 分上爲白在果......(後略)...... 

본영과 각 진포에 있는 화약은 기본 수량이 넉넉하지 못하였는데, 전선에 나누어 싣고 다섯 번이나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하여 거의 다 써버렸습니다......(중략)......신의 군관 훈련주부訓鍊主簿 이봉수李鳳壽가 그 묘법妙法(염초 생산법)을 알아내어 3개월 동안 염초 1,000근을 끓여낸 바로써, 그 염초를 조합하여 본영과 각 포구에 고루 나누어주었거니와.....(후략)......

여기서 염초 1000근은 화약으로 바꾼다면 대략 1200근 정도가 나옵니다만 이는 얼핏 들으면 많은 양 같지만 실제로는 아닙니다, 화약 1200근은 현자총통 4800발을 쏠 수 있는 양으로 다른 개인화기나 총통들에 배비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현자총통에만 사용한다고 가정했을때 이를 판옥선 40척에 판옥선 1척당 현자총통으로만 14문의 포를 갖추었다고 계산하면 현자총통 1문당 쏠 수 있는 화포는 8발 정도에 불과하고 그나마 총통을 천자총통으로 바꾸면 이 숫자는 1발 내외로 떨어집니다.

문제는 이게 상당히 잘 뽑혔다는 것으로 이순신이 원균과 삼도수군통제사직을 교대할 때 화약 비축량은 4,000근입니다만 판옥선 160척에 1척당 총통 14문을 배치했다고 놓고 계산하면 위의 수치와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데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전투를 벌일때 이 것을 전부 들고 나가는 건 아니라는 것이고 쏜다고 모두 맞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상기와 같은 내용은 최희량임란첩보서목에서 정유재란당시 판옥선에 실은 장비의 목록에서도 확인해볼수 있습니다,

그 장비 들은 흑각궁 10정 상각궁 1정 지자궁(支子弓) 7정 죽궁 1정 장창 12자루 환도 3자루 일본도 1자루 참부(참수형 도끼) 1자루 방울 1개 대쟁(大錚: 일종의 신호기구) 1개 통아(애기살을 쏘는데 필요한 대롱) 8개 현자총통 4자루 승자총통 7자루 현자총통용 화살 2개 대철환 12개 중철환 40개 소철환 3,000개 소소철환 500개" 도합 활이 19정이고 단병기 16자루, 대포가 4문, 소화기가 7정으로 인명살상이 중심이던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자면 책의 전문을 살펴보지 못하였습니다만 현대적 함포전만으로 이순신 장군은 해전을 치루었다 라는 그 분의 주장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물론 제가 살펴보지 못한 사료도 있을테고 이러한 주장을 뒤집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럼 그 걸 입증하시면 됩니다, 아주 간단한 문제이지요, 

현재까지는 

1. 조선 수군의 전투에서 화포가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처럼 크지는 않을뿐더러 사용해도 6~10m라는 기록이 보여주듯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사용되었고 2. 함포사격을 하긴 했지만, 적함을 격침하기보다는 인명살상이 주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화포를 발사할 때도 대형화살이나 포탄보다는 소형탄환을 주로 사용했고 3. 해전에서 주된 무기는 화포보다는 활이 주무기라는 사실만이 입증되어 있고 좀 더 신뢰성을 가질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대적인 화력전 결과 화망을 돌파한 상대에 대한 뒤처리/백병전/등선육박전이 아니라요, 

끝으로 평을 옮겨보자면 이순신은 함포를 위주로 하는 근대해전보다는 노선과 함포, 궁시류를 사용하던 노선시대 마지막인 갤리어스 단계의 해전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노선시대 마지막 단계 전술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었고, 전략적으로는 노선시대에 범선시대에 구현된 주요 전략을 모두 구사하며 제해권을 장악했다는게 전쟁사적으로 이순신이 가지는 진짜 의미라고 할수 있겠지요,
출처 http://hyukjunseo.egloos.com/v/3517733
http://xuecheng.egloos.com/4211554
http://xuecheng.egloos.com/4190523
http://sinsigel.egloos.com/1532958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27832&s_no=27832&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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