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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따뜻한 망각
게시물ID : panic_930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Y-
추천 : 20
조회수 : 1441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7/04/11 00: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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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언젠가 할머니께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지금 행복하시냐고.

내가 그렇게 물어본 것은

그저 그녀가 언제나 행복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무표정에 과묵한 사람이었기에.

웃는 일도 거의 없으셨던 것 같다.


할머니는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하셨을까.

무언가 말하셨지만 기억나진 않는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다만 할머니의 그 조금 울적해 보이는 눈동자와 여전히 웃지 않는 그 입술은 기억난다.

그것만이 기억난다.


아버지는 6남매의 막내였다.

할아버지는 전쟁때 돌아가셨고.

한마디로 그런거다.

홀몸으로 6남매를 기르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전후 아무것도 없는 이 나라에서

혼자 살아남기도 힘든 그 때, 6명을 살려갔으니.

심지어 아이들을 학교에 진학시키고, 대학까지도 보냈다.


그리고 첫째 아들, 나에겐 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와 같이 군대에서.

하지만 이것은 전쟁도 아니었고

윗선에서 자살로 결론 내렸지만

그 누구도 믿는 사람 없었다.

실제로도 큰 아버지의 동기 중 한명은 선임이 심하게 구타하는 장면을 보았다고도 했었고.

그런 주장은 묻혀버렸지만.


그리고 둘째, 넷째, 다섯째 형제들도


정말, 덧없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불치병에 걸려서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고 떠난 그 형의 눈동자를 잊지 못한다고,

자유를, 민주를 외치다 터지는 폭죽같은 최루탄들과 번쩍이는 천둥같은 납탄들의 가운데 서있던 누나의 뒷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다음에 만나 뵐 때는 더 장한 아들이 되어서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갑작스런 사고로 영영 다시 돌아오지 못한 형의 웃음을 잊지 못한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할머니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것을 헤아릴 수는 없겠지.


아무튼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할머니는 웃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의 사진에도.

팔순때의 사진에도.

어디에도 웃고 있는 모습은 없었다.

웃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분명,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머니는 행복의 편린도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언제나 앉아만 있었다.

TV소리가 소음처럼 지직거리고, 전등은 깜빡거리는

그 작은 방에서

언제나 앉아만 있었다.


그걸 뭐라고 할까.

그건 불행이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불행에 덮힌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불행은 다시 또 할머니의 발목을 잡아 챈다.


치매였다.

이젠 더이상 떨어질 곳도 없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다.


할머니는 이제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가족들의 얼굴도, 존재도 전부.

마지막까지도 불행함은 그녀를 맴돌았다.

라고 생각했다.


문손잡이를 잡았다.

조금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문을 열자 4인실의 창가 자리에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자고 있는 그 시간

침대에 걸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 나는 잠깐 멈췄다 이내 걸어갔다.

할머니는 나를 보곤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할머니에게 있어서 나는 없는 존재 이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 이기도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았다.

할머니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때와 같은 차가운 느낌은 아니다.


정말 갑자기.

그때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나도, 아버지도, 모두를 잊은.

그때의 모든 시간을 잊은 그녀는 모를 시간.

그 시간이 떠올랐다.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한 마디 물어보았다.


"지금 행복하신가요?"

할머니는 나를 바라보곤

그때와 같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만 조금.

정말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웃고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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