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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선생과 러브레터
게시물ID : readers_281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코코넛파이
추천 : 4
조회수 : 26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4/12 23:18:39


"소문 들었소?"

회의가 끝난 뒤 교무실을 나서는데 김 선생이 어느새 뒤따라 와선 말을 건넨다

학교 안의 온갖 소문을 따라 가다 보면 그 근원지엔 언제나 김욱대 선생이 있었는데

김선생의 입을 거치지 않은 소문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시골 학교 생활이란 누구네 소가 새끼를 몇 마리 낳았다든가, 멧돼지가 난데없이 산에서 내려와 미쳐 날뛴다 던지 하는 일들 말고는 

   무료함의 연속인지라 다들 그런 김선생을 어느 정도는 묵인 해 주는 분위기였다.


"무슨 소문 말이오?"

나는 속으로는 무척 궁금하였지만 겉으로는 짐짓 관심 없는 체 되물었다.

"아 글쎄, 2학년 수학을 맡고 있는 박오유 선생에 대한 소문 말이오."

"박선생 이라면…?"

"왜 있잖소. 고양이를 세 마리나 키우면서 혼자 산다는 총각 선생 말이오.

멀쩡하게 생겨선 맨날 웃기지도 않은 농을 내뱉으며 혼자 웃질 않나..괴짜가 따로 없지."

김선생은 주위를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어젯밤 학교 순찰을 돌던 강씨 아저씨가 똑똑히 들었답디다.

숙직실에서 아주 해괴한 소리가 들렸다는 구려."

김선생은 더욱 더 소리를 낮춰 소근거렸다.

"...그게, 흡사 남녀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소리 같았다는데.."

나는 깜짝 놀라서 김선생을 쳐다 보았다.

"아니, 그럴 리가요. 박선생은 아시다시피.."

"쉿 저기 박선생이 오고 있소."

김선생은 황급히 나를 입막음 하고는 박선생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훤칠한 키에 시원스런 이목구비, 엘리트들의 전유물인 뿔테 안경까지 걸친 모습이 영락없는 경성 시내에서 보았던 모던보이를 연상시켰다.

그는 나와 김선생에게 꾸벅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박선생의 일이 걸려 수업을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끝내고는 오후에 다시 김선생을 찾아갔다.

난롯불 위에 고구마를 올리던 김선생이 나를 보자 들어 오라고 손짓 한다.

김선생은 한가롭게 앉아 고구마가 익는 모습을 지켜볼 작정인 모양인 듯하여 이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오전에 이야기 꺼낸 박선생 말이오."

김선생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제서야 생각 난 듯 말을 꺼냈다.

"난 또 무어라고. 최선생 또한 뜬소문을 캐내는걸 좋아하나 보구려?"

순간 김선생을 고구마처럼 구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잠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나서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박선생은 모태 독신남이 분명한데 어째서 그런 해괴한 소문이 도는 거요?"

김선생은 석양이 내려 앉아 쓸쓸해 보이는 교정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린다.

"그도 외로운 게지요. 모태 독신남 이라고 해도 연애까지 못한다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소?"

연민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던 김선생의 표정이 갑작스레 바뀐다.

"말 나온 김에 오늘 밤 우리 둘이서 염탐을 하면 어떻겠소?"

"염탐이라니, 어찌 그런 무모한 짓을…"

나는 항상 마주치는 박선생의 선한 얼굴을 떠 올렸다.

그는 적당히 소심한 청년이었으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 또한 지니고 있었다.

특히 마을에서 온갖 패악 질을 일삼던 일배파 놈들을 벼멸구 잡듯 흠씬 두들겨 패줬던 일을 생각 하면 할수록 더더욱 안될 일이다.

"나도 박선생이 좋은 사람 이라는 건 알고 있소

내 말은 박선생에게 어떻게 해를 가하겠다는 게 아니라는 말이오. 정 그렇다면 나 혼자 가리다."

 

호기심은 이성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나는 할 수 없이 자정이 다 된 시간에 김선생에게 이끌려 학교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

강당 옆 단풍나무 밑에서 김선생은 덧신과 얼굴가리개, 장갑을 내 손에 쥐어준다.

김선생이 이 마을로 오기 전엔 대체 뭐하던 사람이었는지 새삼 궁금해 졌다.

우리는 중앙 현관을 통해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숙직실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열린 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박선생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렇지 않소? 대답을 해 보란 말이오."

애원하는 듯한 박선생의 목소리.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또 한 목소리.

"그렇게 갑자기 물어보시면 어떻게 해요."

김선생과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서로를 쳐다 보았다.

그것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맑고 청초하며 마치 수선화에서 떨어지는 한 줄기 이슬과도 같은 어여쁜 목소리.

틀림없이 이것은 여인이 내는 목소리다.

아마 박선생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모양인데 열린 틈으로는 거기까지 보이지 않았다.

또 다시 박선생의 목소리.

"왜 당신은 매번 나의 애정을 거절 하는 거요? 어째서 내가 고백하기만 하면..."

"아이, 자꾸 그러시면.."

여기까지 듣고 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김선생이 조심스레 문을 조금 더 열어젖혔다.

 

 

나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은 아니나 그날 자정 학교에서 본 광경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해괴하고 이상하며 기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텅 빈 숙직실 안에는 박선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신이 분명 우리 집에서 국수 먹고 가지 않겠냐고 나를 홀리지 않았소!

이 순진한 나를, 나를 그렇게 홀려 놓고 이제 와서 거절하다니!"

이 목소리는 분명 박선생의 굵은 사내다운 목소리였으나

"어머나, 혼자 착각하셔 놓곤 왜 이러신담. 사람 곤란하게 하지 마셔요!"

이렇게 받아 치는 청초한 높은 여인의 목소리 또한 박선생의 입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에그 머니, 저게 웬일이야!

아마 미쳤나 보아, 밤중에 혼자 왜 저러고 있을꼬.."

김선생이 소곤거렸다.

"에그 불쌍해."

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고이는 눈물을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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