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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고삼의 봄
게시물ID : readers_282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연히
추천 : 10
조회수 : 46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4/20 00:4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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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고삼 교실을 따라 길게 늘어선 밭에서, 상추와 토마토가 자꾸만 내게 손을 흔들었다. 진득한 거름냄새를 풍기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냄새는 희미해지고 밭에는 싱그러움만 남았다. 나는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책상위로 옮겨 심었다. 창밖 풍경과 달리 황량한 내 책상 위. 수학을 심을까, 문학을 심을까 하다가 얼굴을 파묻었다. 5일후면 중간고사가 시작된다. 교실을 둘러보니 아이들은 일제히 책상에 얼굴을 고정시킨 채 교과서 위로 농약을 치고 있었다. 수학이, 문학이, 모든 교과서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기를 바라면서.

 

나는 행여 발자국 소리가 아이들의 신경에 거슬릴까 조심스레 교실을 벗어났다. 고삼이 있는 신관을 벗어나자마자 일, 이학년 후배들의 왁자지껄한 소란스러움이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담임선생님을 만날까 두려워 본관 2층에 위치해 있는 도서실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도서실은 적막했다. 오직 이학년 한 명만이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왜 삼학년 언니가 공부도 안하고 여기에 왔어요? 하고 물을까봐 나는 최대한 구석진 곳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곧이어 이학년 아이마저 밖으로 나가버리자 도서실은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책 한 권을 뽑아 등받이가 없는 의자 위로 몸을 실었다. 시계 두 개가 엇박자로 짤깍거리는 소리를 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책의 질감이 기분 좋게 만져졌다. 머리 위에 자리 잡은 창문이 바람에 치여 덜컹거렸다. 그 소리가 너는 교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돌아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독촉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바람이 잦아들면 너무 적막한 나머지 웅웅거리는 소리가 도서실을 가득 채우는데, 그 소리가 마치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고,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공해 이곳저곳을 누비며 내는 기계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문득 수업시간 중에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친구는 산 쪽을 가리키며 저기에서 괴물이 달려올 것만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끊임없이 상상력을 펼치는데,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스스로의 머릿속에서만 펼쳐져야 하는, 줄곧 입시와 성적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게 되는. 이런 현실이 나는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감았던 눈을 뜨자 철학책들이 가득 꽂힌 책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노자와 공자. 윤리와 사상 시간에 배웠던 낯익은 동양 사상가들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이 철학책들을 모두 다 읽으면 윤리와 사상 1등급을 맞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단지 1등급을 맞기 위해 책을 읽으려는 것이라면 차라리 읽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지. 이 질문에 ‘입시’를 위해서. 라고 답하지 않을 학생이 몇 명이나 있을지.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싱그러웠던 교실 밖 풍경처럼 바깥은 봄날이 왔음을 쉼 없이 알리는데 내 마음 속은 여전히 겨울철 앙상한 나뭇가지 같다.

 

뽑아든 책이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은 시험기간이잖아. 너는 고삼이잖아. 대학 가야지. 따위의 말들이 자꾸만 마음을 짓눌렀다. 심지어는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책을 원래 자리에 꽂아 넣고 도서실을 나왔다. 그때까지도 도서실을 찾는 학생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제야 나는 조금이나마 시험기간이구나. 라는 것을 실감했다.

 

교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교실은 여전히 적막했고 아무도 내가 어디에 다녀왔는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나는 수능특강 대신 공책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정해진 틀 속에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위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누군가의 꿈은 ‘공부’속에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의 꿈은 ‘그림’속에 있을 수 있다. 나의 꿈은 ‘글’속에 있는 것이므로 나는 꿈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교실이라는 하나의 공간 속에서 남들과 다른 행위를 한다는 것은 내 마음 속의 앙상한 나뭇가지에 이파리가 돋아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내가 공부 대신 공책에 무언가를 열심히 써내려가자 짝꿍이 힐끗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궁금한 듯 내게 뭐해? 라고 질문을 던졌다. 소설을 쓰겠다는 말에 앞에 앉은 아이와 뒤에 앉은 아이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내 공책을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교실에도 봄의 기운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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