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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는 차원에서 군대 썰.txt
게시물ID : military_709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18R
추천 : 0
조회수 : 35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4/22 03:27:05
*이하 존칭 생략

때는 바야흐로 05년 초여름인지 초가을인지.
내가 적을 두고 있는 부대는 반기마다 근처에 주둔한 미군과 연합 훈련을 했다.

기본적인 부대 이동과 숙영지 편성, 한 두 차례의 대항전.

야산에서 이루어지는 마일즈 훈련은 사실 훈련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했다.
개인 당 10발을 들고 탄피 사라질까 안절부절하는 우리 부대와
무겁다는 이유로 탄창에서 공포탄을 빼 야산에 투기하고, M249를 풀 오토로 갈기는 형씨들하고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그러나 바디 랭귀지로 담배를 바꿔 피우고 서로의 전투식량을 나눠먹는 경험은 상당히 즐거운 축에 속했다.(밥에다 새알 비빈 친구 미안... 미리 말해줬어야 했는데...)
그렇기에 (가)족같은 선임들하고만 함께 굴러야 하는 다른 훈련들보다 이 훈련은 더 즐거웠다.

이 훈련의 백미는 모든 일정이 끝나고 벌어지는 뒷풀이였다.
반기마다 한 번이니, 한 번은 우리 부대에서, 한 번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공군 부대에서 뒷풀이를 했다.
이 뒷풀이는 살짝 체육대회의 성격을 띠었는데, 나는 미국인이 족구하는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다.

전반기 훈련은 우리 부대에서의 두루치기 파티로 마무리되었다.
거대한 트럭에 실려온 미군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아내가 한국인이라는 개리슨 상사의 ‘먹고 죽자!’ 건배사 한 방에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행보관님이 가져온 말통은 화수분처럼 막걸리를 쏟아내었고, 취사병은 연신 밥판으로 찐 두부와 두루치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술에 떡이 되어 간부 화장실에 처박힌 뒤, 나를 발견한 인사장교에게 ‘아 형, 쫌만 기달려봐.’라고 말했다. 라고 하더라. 뒷일은 상상에 맡김)

문제는 후반기 뒷풀이에서 발생했다.
우리는 튜브에서 갓 짜낸 초록물감으로 물들인 것 같은 활동복을 입고 미군부대를 찾았다.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건물에 들어간 선임은 ‘와 시X 자판기에서 스키틀즈를 파네??’라고 외치며 우리 군이 왜 미군을 따라갈 수 없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체육 경기가 끝나고, 우리는 미군이 준비한 식사를 하기 위해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전역한 선임들로부터 ‘야, 그거 피자 존내 큰 거 주니까 꼭 가라.’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우리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의 주적을 북한군이나 간부가 아니라 피자로 설정했다.

미군의 피자를 보았을 때, 우리는 서양제 시청각 자료를 볼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청년들에게, 피자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개인 당 두 쪽이라는 할당량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모두가 2% 부족한 양에 아쉬움을 삼키고 있을 때, 피자를 나눠 주던 카투사 한 명이 ‘피자 남았으니까 더 가져가세요!’라고 외쳤다.
이미 우리는 ‘니가 갈래, 내가 갈까?’의 위계질서를 체득한 군인이었기에, 나다 싶은 후임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 결과, 피자를 쌓아뒀던 테이블 앞은 마치 좀비 영화를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몇 해가 지난 뒤 월드워Z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서는 좀비의 발생지가 평택으로 나온다.
아마 여남은 피자를 쟁탈하기 위해 달려드는 우리 군인들에서 모티브를 얻은 건 아니었을까.

어쨌든 장비는 딸려도 군기는 최고라며 어깨를 으쓱하던 작전 장교는 순식간에 좀비로 화한 부대원들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평소 다른 장교들에 비해 성격이 유순한 편이었던 그는 불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둠가이로 변했고, 우리는 손에 쥔 피자를 채 다 먹지도 못한 채 육공에 올라야만 했다.

화가 나서 벌개진 건지, 아니면 창피해서 벌개진 건지, 하여튼 작전장교는 미군 관계자에게 황급히 인사를 하고 선탑 자리에 올랐다.

우리는 그 일로 군장을 돌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로 미군들이 우리 부대에 오는 일은 있어도 우리가 미군 기지에 가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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