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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예송을 나름 요약정리해봤습니다.[여기저기서 모은 정보를 재취합]
게시물ID : history_2796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하트다하트
추천 : 1
조회수 : 1304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7/05/06 06: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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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예송은 1차 예송논쟁을 말하는 것이다. 중요한 주축은 서인과 남인 그리고 현종이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자의대비)가 몇년복을 입느냐가 문제가 되면서 발생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상복을 입는 제도를 잘 지키지 않았다.

그런데 예학의 대가인 남인의 윤휴가 효종은 정통이니 어머니인 자의대비가 마땅히 3년복을 입어야하지 않겠냐고 주장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신권강화로 질서를 다지려는 서인의 송시열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었으므로 효종의 [의붓]어머니인 자의대비가 1년을 입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왕권 강화로 새로운 권력 기반을 다져나가려는 남인의 허목은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결국 권력을 쟁취하려는 생각에서 각자 유리한 이론을 주장한 것으로 보면 된다.

기득권층이었던 송시열은 어린 왕을 길들이려 한 것이고, 남인은 아직 힘이 없는 왕과 연합?하여 서인[송시열]을 이겨보려 한 것이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말싸움정도의 분위기였으나 조선 후기 최고의 문제적 인물중 하나인 남인의 윤선도가 상소를 올리면서 피냄새가 나기 시작하였다.

아마 윤선도는 송시열과 함께 효종과 현종의 스승이었으나

송시열은 종1품까지 출세한 반면 자신은 정3품에 불과했던 점, 인조반정 이후 여당인 서인에게 밀려있던 점이 거세게 문제 제기를 한 이유라 보여진다.

어쨌든 논쟁의 결과는 장자와 차자 구분없이 1년복으로 명시되어 있는 경국대전을 내세운 송시열의 서인의 승리였다.

아마 논리에서의 승리라기보다는 이제 갓 왕이 된 현종이 기존의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력적인 구도에서 보면 인조반정 이후 30년간 성립된 서인과 남인의 공존 체제가 깨질 조짐을 보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또한 환국정치의 예고편으로도 볼 수 있다.

비록 1차 예송논쟁인 기해예송이 서인의 판정승으로 귀결되었지만 이 불씨는 15년 뒤인 1674년 갑인예송으로 다시 불타오르게 된다.

다음은 갑인예송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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