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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인하대 복기대 교수가 했던 "고의적" 실수
게시물ID : history_281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rianjung
추천 : 3
조회수 : 77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6/11 01:42:56
이번건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왜냐하면 원문이 명확히 있는데 본인 맘대로 바꾸어 놓으셨으니, 이걸 "실수"라고 보기에는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고려사 보면 뻔히 나오는 내용인데, 왜 맘대로 쓰시는지 참.
--
http://news.donga.com/3/all/20100414/27576119/1 복기대교수님이 철령위가 요동에 있다는 논문을 실은 동아일보 기사이고
http://todayhumor.com/?history_21127 / 이를 인용한 포스팅입니다.

1. 고려사에 고려 서쪽국경이 요동지역이다는 주장
https://books.google.co.kr/books?id=A5QUBAAAQBAJ&pg=PT287&lpg=PT287&dq=%EA%B3%A0%EB%A0%A4%EC%82%AC+%EC%84%9C%EB%B6%81%EC%AA%BD&source=bl&ots=82cWkxWw3A&sig=1k3azeoePil_rPW6Y6WvISmUYmE&hl=en&sa=X&ei=DatvVcGiD9Xm8AXEtYHoCw&redir_esc=y#v=onepage&q=%EA%B3%A0%EB%A0%A4%EC%82%AC%20%EC%84%9C%EB%B6%81%EC%AA%BD&f=false
그 경계선의 서북쪽은 당나라이래로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대게 서북쪽은 고구려 경계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의 경계를 넘었다. 
고려사 권56, 지리1

복기대 교수님 왈 
고려사에 기록된 대로 고려시대 국경선은 한반도 안쪽이 아닌 북으로는 멀리 선춘령(두만강 북쪽으로 700리)이었고 
서쪽으로는 중국 요동지역이었다는 것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

복교수님의 오류입니다.
서북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한다고 분명히 적혀있는데, 이걸 서쪽으로는 중국요동지역이었다고 말씀하시는군요.

2. 현재의 랴오닝성 테링(천령)이 고려말의 철령이다
http://tadream.tistory.com/m/post/4371
《명실록(名實錄)》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임신(壬申), (태조 주원장은) 호부(戶部)에게 명해 고려국왕에게 자문을 구한다.
철령 이남은 원래 고려에 속했고, 백성들은 본국의 관할에 적응되었으므로 국경선을 바로 하여 서로 제 땅을 잘 지키되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다시피 명나라는 고려의 땅 철령을 원나라와의 국경선으로 알고 명나라와의 국경선을 원래대로 유지하자고 주장한다. 
임신년은 1393년입니다.

1번에서 검증했듯이 압록강이 경계인데 고려에 속한 철령이 요동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요동의 철령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옛 지명은 철령이 아니었다. 

중국 한나라(漢), 삼국(三國), 서진(西晉), 동진(東晉) 시기 요동군(郡)이나 현토군(郡)에 속했던 이 지역은 후에 대부분 고구려가 차지했다(현재 철령시에서 관할하는 개원<開原> 북부와 창도<昌圖>지역은 한 시기 부여에 예속). 명나라 이전 이곳은 은주(銀州)와 신흥(新興)으로 불리었다. 

은주는 요나라 때 불리던 지명이다. 《요사(遼史)》에는 “은주는 본래 발해국 부주(富州)였으나 태조가 은으로 다스리면서 이름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금나라 때 은주를 폐하고 신흥현을 설립하면서 줄곧 신흥으로 불리다가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운 후 26년이 지나 지금의 이름 철령으로 고쳤다.

랴오닝성 테링은 홍무제 26년 ( 1393년 )까지는 은주 혹은 신흥으로 불렸습니다.  

따라서 현재 랴오닝성 테링은 당시 철령이 될 수 없습니다.

3. 철령위 위치 비정과 관련된 추가사항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a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B2%A0%EB%A0%B9%EC%9C%84
태조 1권 총서 81번째기사 / 명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자 요동 정벌을 논의하다

처음에 명(明)나라 황제가 말하기를,
철령(鐵嶺)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로(開元路)에서 관할하던 군민(軍民)이 소속해 있던 곳 1)이니, 중국인·여진인(女眞人)·달달인(達達人)·고려인(高麗人)을 그대로 요동(遼東)에 소속시켜야 된다.” 고 하였다. 

최영이 백관(百官)을 모아 이 일을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명나라에〉 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우왕은 최영과 비밀히 의논하여 요동(遼東)을 치려고 하매, 공산 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이 최영의 사제(私第)에 나아가서 옳지 못함을 힘써 말하니, 최영은 자송(子松)이 임견미(林堅味)에게 편당(偏黨)해 붙었다고 핑계하고는 곤장을 쳐서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유배시켰다가, 조금 후에 그를 죽였다. 

우왕이 서북면 도안무사(都安撫使)의 요동(遼東) 군사가 강계(江界)에 이르러 장차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한다. 2)”

1) 개원로는 원나라때 화북지역에 세워진 행정구역으로 여기서는 원나라 직속 행정구역이었던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를 의미합니다.
2) 강계는 압록강 인근을 말합니다. 

태종실록 기록에도 지방행정관이 명확히 압록강 인근에 철령위를 세우려한다 보고했습니다.
명이 말하는 철령이 은주를 말한다면 도안무사의 보고는 부적절한 것입니다.
출처 http://todayhumor.com/?history_21129 , 원문
http://news.donga.com/3/all/20100414/27576119/1 동아일보 원기사
http://todayhumor.com/?history_21127 / 동아일보 인용 포스팅
https://books.google.co.kr/books?id=A5QUBAAAQBAJ&pg=PT287&lpg=PT287&dq=%EA%B3%A0%EB%A0%A4%EC%82%AC+%EC%84%9C%EB%B6%81%EC%AA%BD&source=bl&ots=82cWkxWw3A&sig=1k3azeoePil_rPW6Y6WvISmUYmE&hl=en&sa=X&ei=DatvVcGiD9Xm8AXEtYHoCw&redir_esc=y#v=onepage&q=%EA%B3%A0%EB%A0%A4%EC%82%AC%20%EC%84%9C%EB%B6%81%EC%AA%BD&f=false / 고려사 권56 지리1 인용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a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B2%A0%EB%A0%B9%EC%9C%84 / 태조실록 1권 8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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