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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약소국인가?(3)
게시물ID : sisa_9562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하이얀돌
추천 : 1
조회수 : 63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6/14 13:3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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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한일합방

일본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정복하지 못하였다. 이는 특별히 언급되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세계의 식민지들이 대부분 원주민에 대한 정복을 통해 이뤄졌던 것과는 명백히 다른 점이다.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피를 충분히 흘렸다 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는 현상의 일부만 설명될 뿐이다. 일본은 두 전쟁을 통해 조선에 발언권을 행사하려는 외부세력의 제압이라는 필요조건을 달성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조선 백성 전체의 항복이라는 충분조건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의병이라는 방식으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조선의 부분적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서 일본은 매우 교묘한 방식을 활용하였다. 당시까지도 존재하고 있던 대한제국의 군대와 협조하여 의병에 대한 조직적인 진압 작전을 수행하였다. 일본은 관군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이점(조선 군주의 해산명령, 원활한 보급지원, 정확한 지리적 정보, 일반백성과 의병과의 분리 작업 등)을 활용할 수 있었으며 기민하게 이이제이의 수법을 발휘하였다. 이후 의병활동이 살육 수준의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일본이 결코 조선 백성 전체와의 전면전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강화도조약 이후 30년이 넘는 장기간에 걸쳐 조선의 지배 계급들에 대한 설득, 회유, 매수, 협박을 진행하였으며 서양세력침탈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교묘히 활용하여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비폭력적인 합방을 조작해낸 것이다. 조약서에 고종 황제의 정상적인 옥새와 서명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제기된 한일합방조약 무효 및 불법론은 별개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일부 대신들을 겁박하여 조약이라는 한 장짜리의 문서 행위를 만들어 내었고, 이 또한 최종 서명이 빠져 있는 불완전한 것이었으며, 군주의 승인이라는 이름을 팔아, 충과 효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던 조선 백성들의 저항의지를 봉쇄해버린 비겁한 방식이었다.
 
일본은 조선과의 전면전이 가져올 엄청난 후과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함부로 이를 선택하기도 어려웠다. 이미 300년전에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 치루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던 임진왜란으로부터 일본은 교훈을 받고 있었다. 조선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일본은 정정당당한 정면승부보다는 교활한 우회적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지배 계급들을 매수하고 주요 결정을 조작하여 조선 정복이라는 전면전의 부담을 회피하였다.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내부의 무력저항에 대해서는 관군과 의병이라는 방식으로 내부를 파편화하여 대처하고, 한일합방의 최종결정이 이뤄지기 이전에 미리 그 싹을 정리하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의 관점에서 볼 때, 피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식이었다. 일본이 전면전을 수행하였을 경우 조선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지, 혹은 장기적인 게릴라전의 진흙탕에 발이 묶여 버리게 되었을지, 그래서 이후 만주와 중국본토와 남양으로의 침략을 아예 시도해보지 못했을지는 누구도 확신하기 어렵다.
 
일본은 정면승부의 방식으로 조선을 정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마음껏 휘두르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일본과 조선의 합방은 문자 그대로 두 나라와 두 민족의 통합이 최초의 취지였다. 조선인의 극렬한 거부감은 차치하고라도, 연방국가 내지 통일국가의 모습이 애초의 목적 그것이었으며, 식민지라는 용어만으로 한일합방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이뤄질 수는 없는 것이다.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의 식민지였으며,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의 식민지였으며, 카타루니아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다고 할 것인가? 왜놈이라고 비하하던 민족과 수세적 입장에서 진행하는 합병에 대해 극심한 불쾌감을 가졌던 까닭에, 조선인들이 스스로의 처지를 자학적으로 식민지라고 불렀지만, 이는 유럽열강들의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대륙에서 자행하였던 억압적이며 거만한 식민지 지배 현상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일본은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이며, 인종, 언어, 종교, 생활풍습, 관습 등에서도 조선과 가장 밀접하다. 일본 왕실은 백제에 대한 향수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최근 일본왕의 삼촌이 무령왕릉을 참배하였고, 일제 말엽에는 부여에 일본의 조상신을 기념하는 최대규모의 신사를 세우려고까지 하였고, 동경에서 용인지역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검토한 적도 있다. 일본과 조선이 동조동근(하나의 조상에 하나의 뿌리를 가짐),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한 몸)라고 일본은 주장하였고, 특이하게도 조선인들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조선인을 2등국민으로 대우하고,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고 흡수하기 위한 계략이라고 조선인들은 평가절하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전략적인 미사여구의 껍질을 벗겨놓고 판단할 때, 세계 역사의 어느 곳에서도 제국과 식민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 하나의 뿌리, 하나의 조상, 하나의 몸이라고 주장한 경우는 없다. 조선의 처지를 단순히 일본의 식민지라고 비하해서 표현할 수만은 없는 점이다.
 
조선 민중의 엄청난 반감과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일본은 형식상 조선의 왕족과 양반지배층에 상당한 예우를 제공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두 나라의 합방을 통해 서구에 대항하자는 논리로 조선의 지배층을 설득하여 한일합방을 진행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에 대한 차별을 자행하고, 마침내 조선의 정신과 이름과 말과 글을 뺏으려 하였다. 조선 민중은 일본에 속은 지배층에 때문에 민족과 민족간의 총력전을 진행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 나중에는 일본과 조선을 동등하게 대우하겠다는 일본의 거짓에 다시 속게 되었다. 속은 자가 문제라면 속인 자도 마음껏 편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한일합방 과정에서 드러난 일본의 저열하고 악랄한 행위를 용납하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다. 그러나 한일합방을 마치 스페인이 남미를 식민지로 삼은 것과 같은 모습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식민지의 처참한 신세였던 것으로만 비하할 필요도 없다.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고, 심하게 말하면 한일합방의 목적 달성을 위해 꼼수로 조선을 속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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