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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연구도 그동안 많이 변함(10년전 오영찬 교수 인터뷰)
게시물ID : history_282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rianjung
추천 : 3
조회수 : 78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6/16 01:48:54
10년전에는 이게 파격이었는데, 지금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인정하는 정설이 됐습니다.
이제 주류사학계에서 낙랑을 한나라 식민지로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단지 처음 생길때 한나라가 주도한 것 뿐이죠. 

이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였던 오영찬교수도 지금은 이대로 옮겨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도발적인 젊은 연구자에서 학계 주류가 된거죠.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1/09/2007010900001.html , 조선일보 2007년 1월
국내 연구자들은 대개 ‘낙랑=한나라(중국)’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낙랑실이 ‘3층 아시아관’에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영찬(39)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 학예연구관이 이 같은 통설에 반기를 들어 학문적 파장이 예상된다. 

그는 최근 출간한 ‘낙랑군 연구’(사계절간)에서 “한나라 사람(혹은 문화)과 고조선 사람들은 낙랑군 설치 100여 년쯤 지나 융화됐다. 사서에 등장하는 ‘낙랑인’이 그들이다”라고 주장한다.

반론의 근거는 발굴 결과에 대한 꼼꼼한 분석에서 출발한다. 일제는 1909년 평양 석암동고분을 시작으로 모두 88기의 낙랑 고분을 발굴 조사했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이나 유리건판 사진은 대부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어 연구에 유리했다.

“낙랑이 설치된 뒤에도 고조선의 대표적 무덤형식인 목곽묘(木槨墓·나무로 곽을 만든 뒤 그 안에 관을 넣은 무덤)가 100여 년 동안 지배적인 무덤 양식이었다. 낙랑의 무덤이 모두 한나라 사람의 무덤이라면 왜 이들이 고조선 무덤에 묻혔겠는가?”

오 연구관은 “고조선계 사람들이 한화(漢化)되고, 한인(漢人)들도 고조선에 토착화되면서 벌어진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몇몇 역사서에 등장하는 ‘낙랑인’이라는 표현도 결국은 낙랑지역의 특수성, 즉 서기 1세기 후반에 형성된 ‘낙랑문화를 이룬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

“낙랑군 설치 130여 년이 지난 서기 24~30년, 낙랑태수를 살해하고 독립세력을 형성한 왕조(王調)는 역사서에 ‘토인(土人)’으로 적혔다. 그만큼 고조선계의 힘이 컸다는 이야기이다. 낙랑시기가 우리 역사에 어떤 빛과 그림자를 던졌든 낙랑은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다.”



출처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1/09/20070109000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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