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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700년 VS 고구려 900년
게시물ID : history_283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hishright
추천 : 0
조회수 : 2321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7/06/21 13:41:42
고구려 700년 VS 고구려 900년

중국 사서 <신당서>에서, 당의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요동에서 돌아와 전황을 보고하는 중에 “<고려비기>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9백년을 넘지 못하고 팔십 먹은 당의 장수(이세적)에게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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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가 AD668년이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면 900년전이면 언제쯤인가?

AD 668 +BCE 232 = 900

AD668년으로부터 9백년 전이면 BC232년이다. 그 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해모수, 단군조선의 대통을 이어받다 (BCE 232)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지던 고조선 말기에 한민족의 새 역사가 개창되었다. 해모수는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단기 2095년에 웅심산에서 기두하였다 (삼성기 상, 북부여기) 그 후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당시 47세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대신하여 오가 부족장의 6년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순으로 추대함으로써 북부여 역사가 시작되었다 (BCE 232)

해모수가 북부여를 창건한 것은 BC239년이고, 그 다음해에 고조선을 이은 대부여의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가 퇴위한 후, 대부여는 6년 동안 오가의 장관들이 통치후에. 해모수는 오가의 추대를 받아 BC232년에 정식으로 ‘북부여의 단군’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당 고종과 그의 신하 가언충도 ‘해모수단군의 즉위년을 고구려 역사의 원년으로 본 것입니다.

(북부여 해모수의 건국(BCE239년)을 고구려의 기원으로 잡으면, 멸망 때(668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역년은 907년이 된다. 크게 다르지 않음.)

광개토태왕이 17세손'이라는 광개토태왕 비문 구절 또한 해모수가 고구려의 태조임을 밝혀줍니다. 
광개토태왕은 주몽의 13세손이자 해모수의 17세손입니다. 
참고 →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28384&s_no=28384&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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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며..(광개토대왕비)

하백(河泊)의 손자(孫子)이며 일월(日月)의 아들인 추모(鄒牟) 성왕(聖王)이 북부여에서 나셨으니,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천하사방(天下四方)이 알지니...”(모두루 묘비)

당대의 비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해모수에서 주몽까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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