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퍼져있던 예술적 활동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통치자들은 자신의 위신을 위해 다양한 예술가들과 철학가들의 학파를 후원하고 문화적 부흥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사보이 공국은 베른과 발스태드를 합병했지만 이 두 주의 통치자들은 여전히 비협조적이고 스위스의 영향력 내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공작은 빠르게 행정가들을 투입하고 그들을 달래기 시작한다
1450년 6월 25일
루도비코 공작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 사보이 령 전 지역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로 결심한다
여전히 비협조적인 스위스 지방들을 달래기 위해 자치권을 높혀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분리주의는 잠시나마 수그러드는 듯 했다
교황은 프로방스 지역을 노리고 있었다
1450년 11월 23일
교황은 프로방스 공작들 파문한다
1452년 6월 25일
천한 출신의 루도비코가 마상시합의 우승을 거머쥐었다
귀족들은 분개하고 통치자인 루도비코는 난감해 할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승은 우승, 그는 군의 지휘자가 되었고 공작으로부터 아시나리라는 성을 하사 받는다
1453년 1월 3일
사보이 주는 새로 추기경을 선출하게 된다
사보이의 첫 추기경이 사보이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1453년 4월 3일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두 왕족 남녀는 이베리아의 통치권과 그 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서로 정략결혼을 맺고 나라를 하나로 합치기로 한다 스페인 연합왕국의 시초가 될 사건이었다
행정요원들의 노력은 드디어 사보이가 합병한 스위스 주들을 사보이령 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들의 노력덕에 그곳 통치자들은 좀더 협조적으로 사보이를 대하게 되었다
1453년 5월 16일
사보이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다 또한 더 이상 힘의 균형이 맞지않는 스위스는 그들의 최우선 과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루도비코 공작은 프랑스의 힘을 빌어 부르고뉴와 대항하기로 한다
1454년 6월 27일
선대 공작이 천민출신의 여자와 결혼했다는 문서가 발견되면서 왕가가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루도비코 공작은 이를 적극 부인하지만 귀족들은 믿지 않았다
스위스와 정전협약을 맺은 지금 공작은 프로방스를 노리기로 한다
1456년 3월 12일
사보이의 추기경이 프랑스에 매수된 사건이 벌어진다
사보이는 프랑스에 큰 실망을 하지만 국력차이때문에 별 대응은 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성직자들의 분노는 치솟고 그들은 이에 대한 대책을 요구했지만
공작은 이를 무시하기로 한다
1457년 5월 13일
루도비코 공작이 승하하고 아메데오 9세가 공작에 오른다
루도비코 공작이 병으로 급사했기에 나라 전체에 충격이 컸다
전임자의 사망에 대한 충격을 완화시키기도 전에 아메데오 9세는 교황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던 프로방스의 드라기냥 지방을 노리고 공격한다
프로방스 공작이 파문당했기 때문에 프로방스 정벌에 대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수월하게 드라기냥을 정복했지만 프로방스군은 아직 남아 있었다
부르고뉴에 통행권을 요청하려 했지만 들어줄리 만무했다
그래서 프랑스에 통행권을 요청한 공작은 루도비코 지휘관에게 승리를 주문한다
1458년 1월 14일
전쟁이 한창인 때 상인들은 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성직자들과 대립한다
교권이 약화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시대상 교권을 무시할 때는 아니었다
승기는 이미 사보이군에 기울고 있었다
아메데오 9세는 1458년 3월 2일 국가 안정을 위해 행정가들을 파견했고
7월 2일엔 사보이의 영광을 노래하던 음유시인을 궁정으로 데려온다
1458년 7월 10일
사보이 군대는 남은 프로방스 잔존 병력을 처리하기 위해 로렌지방으로 출발한다
한편 사보이 교구는 새로운 추기경 선출을 위해 프랑스에서 추기경을 매수하려 했지만 위험부담이 커서 포기한다
또한 철광석에 문제가 생겨 병력의 장비 지급에 문제가 생겼다
하지만 어차피 전쟁은 끝나가고 당분간 전쟁은 없을 것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1468년 10월 3일
아메데오 9세는 전쟁때문에 미뤄두었던 피에몬테 백작의 딸 베아트리체 보르게세와의 결혼식을 진행하고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에마뉘엘레 피리베르토 사보이아로 지정한다
그는 이듬해 태어난다
1460년 12월 22일
프로방스와의 전쟁이 끝났다
프로방스는 사보이 공국에 배상금과 드라기뇽 주를 넘겨주게 되었다
또한 프로방스 공작의 영토였던 로렌 역시 독립하게 되었다
이로써 프로방스는 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한편 피에몬테 백작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고
이에 동조하듯 지방 귀족들은 공국내 힘을 모으기 위해 파벌을 결성한다
공작은 오만한 피에몬테 백작의 직할령을 뺏기로 결정하고
피에몬테 백작에게 반역죄를 씌워 그를 체포하고 그 영지를 회수하기로 한다
혹시모를 반란에 대비해 병력을 피에몬테 근처로 집결시키기도 하였다
다행이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고 귀족들의 불만이 있었지만 피에몬테 백작의 체포 또한 완만하게 진행되었다
1463년 8월 9일
반란진압과 중앙집권화에 열을 올리던 아메데오 9세는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방위 요청을 '실수로' 거부하고 만다
이로써 프랑스 - 사보이 동맹은 해산된다
프랑스 - 사보이 동맹이 해산됨에 따라 루이 11세는 사보이 공작 아메데오 9세에게 큰 앙심을 품게 된다
프-사 동맹 해산이 사보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지 그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과연 사보이는 프랑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것인가
사보이는 영원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