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쟁은 드디어 막바지에 이르른듯 보였다
1463년 8월 9일
프랑스에 대한 야욕을 감출줄 모르던 영국은 프랑스를 다시 공격했고 프랑스는 동맹국들에게 마지막 100년전쟁의 최후를 부탁했다
하지만 사보이 공국은 100년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전쟁이 한창일때 공작은 프로방스의 위조문서를 주문했다
교황은 로마에만 있으면 된다
1464년 7월 7일
아메데오 9세 사보이공작은 다른 왕족이 귀족에게 암살당하는 것을 묵인했다
모두가 알고 있던 암살기도를 공작이 모른척 한것에 대한 추문이 일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오히려 환영했다
이미 두개 주를 뺏긴 스위스는 그저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1465년 12월 10일
스위스 정복이 재개된다
1466년 1월 24일 이후로 기록이 없던것을 보아 사보이 공국의 마상토너먼트는 이것이 마지막 이었고
전쟁에서의 마지막 기사의 돌격은 매우 용맹했으리라 추측된다
또한 군사무장을 강화시키고 석궁부대를 도입한다
1467년 4월 16일
스위스는 쉽게 점령됬고
공작은 스위스에게 강탈한 배상금으로 르네상스 지원에 투자한다
이로써 사보이는 르네상스를 수용한 선진국가로 발돋움한다
하지만 스위스를 집어삼킨 사보이에 대한 주변국들의 평가는 좋지 못했다
공작은 잠시 정복활동을 멈출 필요가 있었다
1467년 6월 13일
공작은 추기경의 자문을 받아 국가를 좀더 원활하게 굴리기로 한다
비록 망국이라고 하지만 아직 프로방스 분리주의는 남아있었고
이를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행정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469년 3월 23일
드디어 사보이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결정될 첫번째 정책이 결정되었다
공작은 사보이에 행정적 제도가 절실함을 느끼고 행정 제도의 발전을 위한 계획을 결정한다
행정제도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그동안 전쟁으로 유입된 많은 배상금으로 어지러워진 조폐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플로리안 보그를 조폐소장으로 임명한다
또한 행정자문에 능통한 장관을 임명하면서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로써 사보이 공국의 행정제도는 나날히 발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행정제도의 급진적인 발전과 함께 사보이 주변국들의 정세도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1469년 5월 8일
밀라노는 귀족들에 의해 혁명을 맞이하고 비스콘티 가문은 밀라노에서 추방당한다
같은 해 12월에는 부르고뉴가 프로방스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주변국들의 어지러운 정세는 사보이 공국의 힘을 키울 기회이기도 했다
밀라노 공화국은 프로방스 공국과 동맹이었으며 부르고뉴 공국과 전쟁중이었다
아메데오 9세는 부르고뉴의 힘으로 밀라노를 약화시키기 원했기에 전령을 보내 요새의 길을 열어주었고
1470년 12월 15일
밀라노가 부르고뉴에게 쑥대밭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한 아메데오 9세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연합하여 밀라노를 공격했다
밀라노 공화국 역시 같은해 12월 8일에 사보이에 항복한다
1472년 12월 8일
파르마의 라누치오 백작는 사보이 공국의 힘으로 독립하고 자신을 라누치오 1세로 선포한다
그리고 아마데오 9세는 새로운 이탈리아의 공작과 동맹을 맺으며 왕실결혼을 주선한다
아마데오 9세는 밀라노를 공격하여 분할시키고 힘을 약화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직도 프랑스,부르고뉴의 영향력내에 있으며 밀라노 역시 아직 붕괴되지는 않았다
아직 안심할수 없는 적들이 주변에 널려있다
하지만 현명한 군주 아마데오 9세는 행정제도를 개혁하고 스위스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강한 적들이 많을지언정 안으로 부터 국력을 키워가고 기회를 보아 국토를 늘려 생존하는 것이 아마데오 9세의 최우선 과제 였다
비록 지금은 연약해도
사보이는 영원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