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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필사]구병모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게시물ID : readers_290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ㅁㅈ이
추천 : 4
조회수 : 37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7/27 16:39:35



구병모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타인의 삶의 무게를 측정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사람들은 그 행위를 너무나 쉽게 했고 종종 재단에까지 이르렀다. 타인의 절실함을 허명에 대한 갈망으로 단정 짓기도 쉬웠다.

누구나 마음이란 걸 갖고 있기에 간과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내면으로 침참하기가 허공으로 뻗어 오르기보다 수월하다는 것이었다. 깊이를 재기도 불가능하며 거기 도사린 짐승의 야만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동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반면 사람의 신체―즉 외곽은 한계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모눈 한 칸을 깨뜨리는 사람을 보면 그 이변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똑같은 삶을 사는데 나와는 다른 행동 범위를 갖는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놈이 있는 곳은 아파트 10층 정도 높이에 불과했고 문명의 이기를 빌리자면 도달하기에 그리 아득한 높이도 아니었건만, 거기 있는 놈을 올려다보면 그곳은 순식간에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난 진공의 장소, 이 세상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높이가 되었다.

자기만의 색채와 도형이 지나치게 독창적이면서도 불가해한 논리를 갖고 눈 앞에 배열되는 일상.

처음부터 사람을, 오래전 내가 도전했던 시멘트 건물이나 그후로 부딪치기를 피하느라 애쓴 전봇대와 같은 선상에서 대했으니 말이야. 그 사람한테 다가가야 할 때와 멀어져야 할 때를 계속 놓치고 실수하면서 나는 그동안 내 몸 속에 이렇게 많은 허허벌판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했는데, 이를테면 내 안에 잘못 들어찬 텅 빈 공간이 오히려 몸의 체적보다 커서 한번 부딪치거나 적절한 타이밍을 맞추지 못할 때마다 나는 누에고치가 뽑아내는 실처럼 몸에서 공간을 토해내는거라고,

간격을 확정 짓는다는 건 곧 서로에게 다가갈 가능성도 내포한 것인만큼 우리의 관계는 그때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토해내도 내 인식과 감각은 달라지지 않았어. 그 사람이 실망하면서 떠나버린 뒤에야 나는 얼마나 그쪽에 가까이 다다르고 싶었는지, 아니 밀착 되고 싶었는지를 알았지.

실제로는 그 어떤 동기도 열쇠도 없이 자의적인 방문도 이동도 불가한 데다 공간 자체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세계였으나 그게 바로 지금, 바로 여기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점도 선도 없으며 따라서 부피나 깊이마저 무의미해 보이는 공간 뿐이었다. 입자가 아닌 의식으로 채워진 것 같은 틈새. 형태가 없으므로 촉각으로 인식 가능한 무엇 또한 없으리라는 선명한 예감. 이 그림을 목격하고 멈춰 서서 어둠의 틈새를 발견한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일종의 경건하고 진중한 암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멍을 통과해도 캠퍼스 뒤편은 어디까지나 캠퍼스 뒤편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관여하지도 존재를 인식하지도 않으며 저마다의 무거운 그림자를 이끌고 걸어나갔고, 보도블록의 요철 위로 분주한 소음과 무기력이 피어 올랐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하고 남루한 세계, 거기에 수만 분의 하나만큼 생물학적 온기와 진동을 보탤 뿐인 자기 자신, 언제고 일상에의 대항과 반란이란 이런 식으로 끝날 수 밖에 없음을 재확인시켜주는.

한 발씩 내딛을 때마다 기존의 세계에서 가볍게 분리되는 육체의 현존이 느껴졌고, 어라 지나서는 기존의 세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잊기 시작했으며, 가방 가죽의 생생한 질감만이 순간 속한 현실의 전부였다.

「관통」



그러나 속도와 무관하게 걷어차임을 당하는 대상이 느낄 모멸감과 고통은 동일할 테고,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유명한 모토는 그 사실을 증명한다. 꽃으로 때려서 사람이 죽기 때문에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님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적어도 사람답게 산다는 건. 정신은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때 비로소 정신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한다. 거기 존재한다고만 해서 그것이 정신이 될 수는 없다.

행위의 본질은 대동소이한데 거기 자꾸 논리와 이유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간이라 자위하고 싶은 거지.

「이창」



처음 그것은 일상적이고도 자연적인 퇴락을 표시하는 작고 별 볼일 없는 크기로 다가왔을 것이다.

누군가 한 존재를 책임진다는 것은 그러한 일이다. 옆자리를 나눈다는 행위는 그 자리가 비어 있다고만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식우」



솔직한 심정으로, 부단한 생산과 소비활동으로 사회를 굴리는 일과 전혀 인연이 없는 이들에게까지, 단지 그들이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설 자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바쳐야 한다는 현실에 지쳤어. 너는 전혀 그럴 때가 없어?

불행은 줄곧 부당하게 수면 아래 가라앉았다가 어떤 극단적 상황에서 피치 못할 방식으로 타의에 의해 공개 될 때 비로소 가치와 무게를 획득하는 모양으로,

부푼 희망이나 다짐이 소각로에 던져져 티끌과 재로 사그라지고 심장과 머리가 냉각되는 계기란 이처럼 단순하다. 블록의 누적이 한계에 도달하고 균형을 상실한 채로 버티고 있을 때 그것을 직접 쓰러뜨리는 것은 어디선가 급습하는 대단한 토네이도 같은 게 아니라 부주의한 어린애의 집게 손가락이다.

그것의 온기와 감촉을 아는 순간 또다시 그것의 권리와 자격을 숙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핌을 받을, 옆에 살아 있어도 되는 존재. 이어서 그것을 방기한 이들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눈을 낮추자 모든 것이 낮아지거나 멀어지거나 사라졌다.

「이물」



그것들은 성분이 모호하면서도 존재감만은 확고한 모종의 대상을 향해 고요하고 깊은 증오를 내뿜고 있으며 서로를 얽은 줄기는 오랜 시간 숙성된 어둠으로 단단하게 직조된 그물 같아서,

과연 몸이 보내오는 신호는 언제나처럼 적중률을 자랑하며, 벚나무들이 제 살비듬을 다 털기 전에 한 방울씩 듣기 시작한 비는 만 하루에 걸쳐 대운동장과 야외극장과 각 단대 건물들을 적셨다.

봄철의 꽃은 몰상식했다. 비 온 뒤 낙하하는 꽃잎을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계절성 기념촬영이라는 요식행위에 소비되고 나서 용도 폐기된 꽃잎들이 철이 기울어지면, 그 자리에 남는 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혼돈과 폐허였다.

아무도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그로 인해 안도하는 삶의 반복적인 궤도를 그리지 못하고, 다른 쪽 한 점을 끝내 만나지 못하는 곡선은 원을 이루다 말고 끊어질 터였다.

이 모든 조각들이 그 사람의 전체를 이루는 부속이어도 괜찮고, 전체는커녕 배경조차 되지 못한대도 상관없다. 그에게 속한 모든 세부는 언제고 무엇으로 대체해도 되는 임의의 요소들뿐이다. 살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정주 불가능한 임의이며 임시이듯이.

세상의 흐지부지된 소요 대부분이 그렇듯 의문부호가 지워진 자리에는 투지를 불태울 만한 공간 또한 남아 있지 않았다.

나사가 빠진 자리엔 대량으로 쌓여 대기 중인 나사 무더기 가운데 또 다른 하나가 뽑혀 금세 빈 데를 채웠고, 현금과 카드는 올리브유라도 바른 듯 저마다의 지갑에서 최소한의 마찰력도 잃은 채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와선 각종 의류와 장신구 사이를 순조롭게 돌았다. 이는 툭하ᅟᅧᆫ 픽픽 쓰러지거나 부서지거나 덩굴식물이 되어버리는 나약한 사람들보다는 자본의 흐름이 훨씬 정직하고 믿을 만하며 삶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는 진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사례로 남게 되었다.

그들이 건네고 싶어 하는 말은 기껏해야 한 장짜리 고막의 떨림이 아닌 온몸을 써서만 들을 수 있는 그 무엇 같다.

「덩굴손증후군의 내력」



그건 그저 불가항력의 변화라고 봐요. 그 속도가 인식의 교정이나 몇몇 계몽적인 구호들로는 붙들기는커녕 발 한 번 걸어볼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뿐이죠.

아니면 이루지 못한 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일부러 변화를 시도한 끝에 따라오는 과잉이라고 볼 수도 있고, 이도 저도 변명일 뿐 처음부터 ‘감’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본능적이고 원색적인 증거라고 생각하셔도 상관없어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실패한 꿈의 대상을 언젠가는 원한이 맺힌 눈으로 바라보게 마련이죠. 극던적으론 그것을 훼손하고 싶어지고요.

여기서의 견딤이란 미래 지향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어떤 보람이나 성과를 기대하는 극복과도 인연이 없지요. 그저 나날이 내 존재가 미음처럼 묽어지는 연습을 하는 것뿐이에요, 마침내는 투명해지다가 사라질 때까지 말예요.

우리는 인간인데 어째서 오랜 지배와 구속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어느새 나를 때리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반응하고 꼬리를 흔들거나 내리게 되었을까. 그러니 너희들은 더더욱 짐승 취급을 당해도 된다며 누군가들은 의기양양하게 돌을 던질 텐데.

그런데 어디까지 가야 그 길이 내가 가련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사람은 알게 되는 거죠? 어디까지 갔을 때 사람은 자신의 심연에서 가장 단순하며 온전한 것 하나를 발견하고 비로소 되돌아올 여지를 찾을 수 있거나, 아니면 되돌아올 길이 없어 그대로 다리 아래로 몸을 던져버리게 되는 걸까요?

「어디까지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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