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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스포] 희랍어 시간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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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한유적
추천 : 1
조회수 : 22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8/04 21:2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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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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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말을 잃었다. 벙어리처럼, 원래 말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읽고 들을 수 있지만 소리를 낼 수 없다. 문장을 적는 것이 힘겹다. 그녀의 생각대로라면, 그것은 '원인도 전조도 없는' 현상이었다. 수년 전의 이혼, 반년 전 어머니의 죽음, 수개월 전 양육권을 잃어 전남편에게 빼앗긴 아들. 그 무엇도 근본적인 원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전략) 심리치료사는 그토록 자명한 원인들을 왜 그녀가 부인하려 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아니요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백지에 적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그녀의 실어는, 독자에게 의문을 던지는 정체불명의 존재다. 심리적인 원인으로써 지정할 수 있을 것 같은 모든 사건들을, 그녀는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도피나 자존심 같은 것이 아니라 담담한 확인이다.

단지 그녀는 어렸을 적 겪었던 비슷한 현상을 떠올린다. 말의, 단어의, 문장의 날카로움에 고통스러워하다가 마침내 언어를 잃었던 유년 시절, 학창 시절.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너무도 다르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생경하고 강렬한 자극의 범람을 견디다 못해 도피했던 것뿐이었다. 또한 그때는 되찾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지 않았음에도 사소한 계기를 통해 언어를 되찾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녀는 의문했다.
방학을 앞둔 그해 겨울의 평범한 수업시간, 한 개의 평범한 불어 단어가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퇴화된 기관을 기억하듯 무심코 언어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중략)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공포는 아직 희미했다. 고통은 침묵의 뱃속에서 뜨거운 회로를 드러내기 전에 망설이고 있었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그녀가 품고 있는 폭약은 무엇인가. 왜 언어가, 말이, 불꽃이 되어 그 폭약을 터뜨리기 위해 심지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인가. 왜 다시, 언어를 잃었는가. 되찾을 수 있는가. 되찾아야 하는가. 되찾아도 되는가.

일견에는 그녀가 말을 되찾지 않는 편이 나아 보인다. 그녀는 말에 의해 고통받아 왔다. 말에 대해 민감하고 예민한 그녀에게, 말로 입은 상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할 바 없이 클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도피했다, 고 본다. 말에서 멀어졌다. 스스로 입을 닫고 손을 멈추고 타인의 말을 말로써 듣지 않았다. 그저 소리의 파편으로써 맞닿을 뿐.

그러나 그 도피로 인해 그녀는 아들을 되찾을 방법을 잃었다. 그녀가 말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는 아들을 되찾고자 하는 것 말고는 없을 것이다.

말로 열리는 통로가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갔다는 것을, 이대로 가면 아이를 영영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다. 알면 알수록 통로는 더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갔다. 간절히 구할수록 그것을 거꾸로 행하는 신이 있는 것처럼. 신음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더 고요해졌다. 피도 고름도 눈에서 흐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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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쿵저러쿵 길게 이야기해 봤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소설은 내게 있어 매우 질 나쁜 종류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그녀가 나에게 불가사의한,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존재다.) 한 번 정독해서는 도저히 문장들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어렵고, 두세 번에 이르면 문장과 단어들은 더욱 난잡하게 날뛴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간접적이다. 소설의 분위기나 느낌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그 이상을 얻고자 하면 독서 이상의 영역으로 - 독해나 해석으로 - 들어가야 할 것만 같다.

그냥 '그런 캐릭터야. 깊게 생각하지 마'라고 넘길 수는 없다. 일말의 공감의 여지가 없는 캐릭터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런 캐릭터를 용인한 채 넘어가서는 이 책을 이해할 수도 없다.

내 머리가 나쁜 것인가. 혹은 내 감성이 맛 간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도 소설을 한두 편만 읽어 보지는 않았다. 이 소설이 다른 소설들에 비해 이질적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나마 비슷한 것을 찾자면, 같은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의 여주인공도 다소 난해한 면이 없진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로 머리를 감싸 쥐고 고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소설은 매력이 있다. 만약 매력이 없었다면 공감이 안 되는 캐릭터를 붙들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진작에 내팽개치고 '나랑 안 맞네' 한 마디 감상과 함께 곧 잊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참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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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책이라고 평가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다시 읽고, 또 읽어서, 이해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끝끝내 이해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이해하여, 이해한 후에 다시 감상문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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