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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필사] 이기호 장편소설 『차남들의 세계사』
게시물ID : readers_292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ㅁㅈ이
추천 : 4
조회수 : 26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8/07 09:27:43

이기호 장편소설 『차남들의 세계사』



누군가에게 쫒기면서 30대를, 누군가를 피해다니면서 40대를, 누군가를 등진 채 50대를, 그는 그렇게 골목길에서 마주친 된바람처럼 잔뜩 고개를 움츠린 채 스쳐 지나쳤으며......


코너를 도느라 다행히 속도는 그다지 내지 않았지만 무언가 분명 물컹거리는 것이 그의 복사뼈를 지나, 무릎 연골을 지나, 엉덩이 굴곡을 지나, 허리와 어깨와 손목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만약 그가 그냥 그렇게 살았다면 그건 무슨 이야기가 될까? 이봐, 친구. 설마 당신도 그걸 바라면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 아니겠지? 소설은 그래서 한편으론 끔찍하고 잔인한 것이다.)


그 내용들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들이었지만 박병철의 입을 거치면서 다시 한 번 풍선껌처럼 부풀려졌고, 애인에게서 버림받은 씨름 선수의 팬티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나 버렸다. 부풀려지고 늘어나면 그 다음엔 무엇이 오겠는가? 터지거나 끊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


문제는 당시의 상황이라는 것이, 추측과 과장의 여지가 있는 것은 여지없이 추측과 과장으로, 추측과 과장은 다시 사실과 진실로, 사실과 진실은 다시 수사와 체포로 연결되는, 뱀 꼬리 물기식 순환 구조였다는 데 있었다.


하나의 걱정이, 모든 것의 걱정으로 변화되고, 하나의 두려움이, 수십 가지의 두려움으로 연결되어 버리는 마법.


마치 이쪽과 저쪽으로 반듯하게 잘린 나무처럼, 끈이 풀린 검은 커튼이 갑자기 쏟아져 내려와 무대와 객석을 반으로 나눈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과거와 단절한 채 살아갔다.


미워하고 싶고 또 원망하고 싶은데, 두려움 때문에 자꾸 멈칫멈칫하고 서둘러 불을 꺼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서, 그 마음이 안타까워서, 그녀는 오랫동안 소리 죽여 울기만 했다.


그러니, 보아라.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 이야기의 핵심을 그대로 단정지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아무것도 읽을 수도 없는 세계. 눈앞에 있는 것도 외면하고 다른 것을 말해 버리는 세계,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전문 용어로 ‘눈먼 상태’ 되시겠다.), 그것이 어쩌면 ‘차남들의 세계’라고 말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작품은 언제나 생물처럼 저 혼자 자가 증식하는 법이니, 안기부 요원들은 그런 것 따위엔 신경 쓰지 않고 모두 1계급씩 승진했다.


사실 나가이 에브쎄이의 내면은 김동혁의 평론을 접하고 난 이후부터 히말라야의 그늘진 빙벽처럼 거칠고 날카롭게 변해 갔으며, 자잘한 성에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내려안고 다시 솟구쳤다가 가라앉는 일이 바복되고 있었다.


때때로 평온하게만 보이던 우리의 일상이 부욱, 소리를 내며 찢어진 후, 그 틈에서 낯선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어쩌면 그 순간이야말로 의식 중이든 무의식중이든 윌가 감추고자 애를 쓰던 유일한 진실이 눈앞에 나타나는, 아프지만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하기에 급급해한다. 그만큼 우리의 진실이 더럽고, 하찮고, 추악하고, 섬뜩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는 방식이다. 그 손이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양,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다시 틈 안으로 억지로 욱여넣고 겹겹이 시멘트를 발라 버린다. 그리고 시멘트를 바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안의 또 다른 괴몰울 눈 앞에 호명해 낸다. (사실 그 낯선 손은 이 괴물의 손이기도 하다.) 그렇게 불러낸 괴물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날뛰고, 제멋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도, 우리는 스스로 괴물을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어쨌든 괴물 덕분에 우리는 다시 진실을 외면할 수 있었으니까. 고마운 괴물이니까...... 그것이 우리가 우리를 잃어버리는 기본 공식이니까.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인과관계였고, 플롯이었으며,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겐 나복만의 고통 또한 다음에서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하나의 스토리에 지나지 않았다. 고통은 하나의 도구일 뿐, 고통은 하나의 과정일 뿐...... 그래서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이봐, 친구. 자네는 어떤가? 자네는 지금 이 부분을 어떻게 읽고 있나?) 하지만 들어 보아라. 정작 말하기 어렵고, 쓰기 힘든 것은 고통 그 자체이다. 스토리를 멈추게 하고, 플롯을 정지시키는, 그런 고통이 사라진 이야기란, 그런 고통을 감상하는 이야기란. 사파리 버스에서 내다보는 저녁놀 붉게 물든 초원과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은가. 안락한 의자에 앉아, 두꺼운 유리창 뒤에서, 초원을 바라보고 싶은가? 안전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다음 단락은 듣지 말고 그대로 넘어가길......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를 이해하는 덴 아무런 지장도 없을 테니까...... 원망도, 아쉬움도 없으니까....... 그렇게 하시길. 그게 바로 당신 안의 괴물이 작동하는 방식일 테니까.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때때로 사람들은 신과 악마를 동시에 숭배한다는 비밀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속 한쪽에 어린아이가 웅크리고 있다면 저 쪽엔 나이 든 노인이 쪼그려 앉아 있고, 이편에 속물적인 욕망이 숨 쉬고 있다면 저편에 순진무구한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는 진리를, 그는 헤르만 헤세를 통해 깨달은 사람이었다. 또한 어쩌다가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충동이 툭 고개를 들기라도 하면, 전쟁이 나고 살인이 나고 세상 모든 것에 종말이 온다고 해도 뚜벅뚜벅 제 갈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도 정남운은 다년간의 요원 생활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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