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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주의] 흑백 사진에 얽힌 이야기 -3-
게시물ID : panic_951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ementist
추천 : 25
조회수 : 2075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7/08/28 19:25:35



<주의! 충격적이고 불쾌하거나 잔인한 이미지가 많습니다. 

심신이 미약하신분들에겐 본 포스팅을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사진속에는 현실이 있고 이 것은 때때로 진짜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불가사의한 힘을 지니고 있다.


 -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이미지들을 인터넷으로 접합니다.


날이 갈수록 사진편집 기술의 발전으로 무서운 이미지의 수많은 합성사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소개해드릴 사진은 생생한 현실들이 담긴 잔혹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그에 얽힌 잔혹한 이야기들을 풀어보려합니다. 





1. 오래된 상인 부부의 사진 


45.jpg


이사진은 1920년 우크라이나에서 찍힌 오래된 사진입니다.


사진으로만 보았을땐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 노부부의 평범한 일상을 담은 사진 같게 보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가판을 열고 판매하는 품목입니다.


1920년대 당시 소련의 지배하에 있던 우크라이나의 식량을 소련측에서 곡물을 수탈하여 홀로모도르(Голодомор)라고


불리우는 대기근이 발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남아있던 집의 가축들을 모두 도축하고 그나마 남아있던 곡물들로 버텨나갔지만 결국 식량이 부족해진 사람들은 하루가 달리 말라 죽어갔습니다.


그 결과 참다 못한 우크라이나의 사람들은 죽어간 자신의 주변 이웃의 시신이나 심지어 자신의 가족의 시신 까지도 먹어가며 생존해 나갔습니다.


이때의 참상의 기록을 보면 자기 자녀를 잡아먹을 수 없어서 자기 집의 아이를 살았든 죽었든 옆집에 넘겨 먹게 하고


그 옆집 아이를 받아다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경우에는 특히 살아있는 아이가 아니라 실제로 죽은 아이를 주고 받는건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현지 치안당국조차 그냥 넘어가 주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선 암시장의 개념으로 서로의 가족의 시신을 팔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인신매매를 이용하여 운없는 여행자들의 시신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위의 사진은 자신의 죽은 자식의 시신을 판매하는 노 부부의 사진으로써 노부부의 눈에는 광기만이 가득해 보입니다.


이와 같은 끔찍한 13년동안의 대기근의 여파는 1933년 이후가 되어서야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2. 고뇌하는 남자의 사진


46.jpg


이 사진의 피사체인 남자는 무엇인가를 처다보며 깊은 고뇌에 빠져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이사진은 1870년대 콩고에서 찍힌 사진으로써 당시 콩고는 벨기에의 식민지였습니다.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콩고의 풍부한 자원인 고무에 대하여 눈독을 들였습니다. 


원주민을 시켜서 플렌테이션 산업을 시키고 결과물을 값싸게 착취하는 것은 그나마 폭정 선에서 머무르는 것이었지만


그의 생각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고무는 응고된 수액으로 '눈물 흘리는 나무'라고 불리는 고무나우에서 채취되는데 이 채취과정에서 콩고 원주민들은 열대우림의


넓은 지역으로 나가거나 나무 위에 올라가 일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원주민들에게는 보호장비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나무에서 떨어져 등이나 다리, 팔등이 부러지는 상황이 속출되었습니다.


부상자가 생기면 자연히 수익에 차질이 생겼으므로 레오폴드 2세는 원주민들이 실수 하지 않도록 한가지 '계책'을 마련합니다.


바로 원주민들에게 개인별로 생산 할당량을 지정하고는 이를 맞추지 못한 자들이 생길 시 


첫번째는 손만 자르고 살려주었고  두번째는 아예 한쪽 팔을 잘라버렸으며 거기에 세번째까지 채우지 못하면 참수형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할당량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가족이나 주변인을 비롯한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이양되었습니다.


자신의 할당량도 채우지 못할 판에 다른 가족의 할당량까지 뒤집어쓴 사람들은 결국 처형당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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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남자는 불행하게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콩고의 고무 노동자로써 남자가 고통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것은 자신의 딸의


잘려나간 발과 손입니다.



3. 어딘가를 주시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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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은채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남자를 찍은 이 사진은 1941년 우크라이나 빈니차에서 찍혔습니다.


그러나 당시 빈니차가 속한 유럽은 2차대전 중이었고 나치 독일의 침공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무시무시한 악명을 떨치던 나치 군대 소속중에서도 최악의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는 인종 청소만을 목적으로 삼은 나치독일의


대량 살상 조직이였습니다. 당시 빈니차는 유대인 자치구의 하나로 28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있었지만


이들에 의해 모두 처형당했습니다.


49.jpg


위에 사진은 아인자츠그루펜의 일원이 시신들이 채워지고 있는 집단학살 무덤 앞에 꿇어 앉아 있는 유태인을 향해 쏘기 바로전에


찍힌 사진으로 1943년 미확인된 독일군의 앨범에 채워져 있었고 사진의 뒤에는 '빈니차의 마지막 유태인'이라는 글귀만이 남아있었습니다.




4. 일그러진 여성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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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1901년 프랑스 파리에서 찍힌 사진입니다. 그 당시 흔하게 있던 빈민을 찍은 사진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사진에 얽힌 이야기는 놀랍습니다.


블랑셰 모니라는 이 여성은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고 성장한 영애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25살이 되던 1876년에 자신에게 다가올 비극을 상상도 못한 채 그녀는 파산한 변호사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당시 프랑스 귀족사회는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을 해야하는 관습이 있었던 터라 사랑을 선택한 대가는 끔찍한 비극이 되어


그녀에게 돌아왔습니다.


무려 25년간 가족에 의해 빛도 들어오지 않는 다락방에 감금 된 것입니다.


그녀의 동생은 그녀를 이해하였고 동정했지만 어머니의 완고함에 애써 외면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범죄행위에서도 그녀의 어머니는 태연했습니다.


딸을 다락방에 가둬둔 채 도시에 관대한 기부와 예술작품을 출품하여 '작품위원회'로 부터 상을 받으며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리기 바빳습니다.


한 여성이 25년간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인 다락방에 갇혀 있다는 익명의 편지가 1901년 당시 파리의 법무장관인 뮤슈 앞으로 날아온뒤


편지에 충격을 받은 법무장관은 모니가족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경찰을 보내 주택을 조사하여 다락방에서 피폐해진 블랑셰를 발견합니다.



51.jpg


발견될 당시 음식물과 배설물로 덮인 침대 위에 쓰러져 있엇던 그녀는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야윈 25kg에 몸무게에 불과하였고


빛을 바라 볼 수 없었던 그녀는 간신히 실눈을 뜬 채로 사람들을 바라봤다고 전해집니다.



5. 묶여있는 여인 


52.jpg


보기만 하여도 공포에 질려있는 여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1950년대 중반 '하비 글래트먼'이 찍은 사진입니다.


일명 '결박 살해자' 라고 불리운 연쇄 살인범인 하비 글랜트먼은 어린 연예인 지망생에게 자신을 사진기사로 소개한 후


피해자들에게 접근하여 노끈에 묶여 공포에 질린 포즈를 취해주면 시간당 20달러를 주겠다고 유혹하였습니다.


불행한 피해자들은 하비의 말만 듣고 아무런 의심없이 하비를 따라갔지만 그가 말했던것들이 모두 끔찍한 사실로 바뀌게 되어


살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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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 두명의 여성들이 같은 방식으로 살해 당한 뒤 1958년 극적으로 여성을 총으로 위협하는 하비 글래트먼을 경찰 순찰대가


검거하며 이후 하비 글래트먼의 집을 수색한 경찰은 그의 집에서 공포의 질려있는 여성의 사진들을 발견하게 되며 


하비 글래트먼의 연쇄 살인은 끝이 났습니다.





출처 출처: 티스토리 - 오삼도리의 잡상공간 -
http://53doris.tistory.com/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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