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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줄친 문장들
게시물ID : readers_295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hinejade
추천 : 4
조회수 : 44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9/06 00:06:22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텍스트의 한계성과 잠재성

-삼십오 년째 나는 책과 폐지를 꾸려왔고, 십오 대에 걸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써온 나라에서 살고 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그보다 더 큰 슬픔이 담긴 생각과 이미지를 머릿속에 차근차근 쌓아가는 습관과 광기가 항시 존재해온 유서 깊은 왕국에 나는 거주한다.

=최악의 문장

-삼십오 년째 압축기로 폐지를 압축해왔지만 오 년 후면 나도 내 기계와 함께 은퇴한다. 하지만 이 기계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려고 나는 저금을 하고 있고, 저금통장까지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함께 은퇴할 것이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매우 시끄러운 고독

-시신 네 구를 태운 참이었고, 그 가운데 엄마는 세 번째였다. 나는 꼼짝도 않고서 인간의 궁극적인 실체를 목격하고 있었다. 장의사 인부가 뼈를 추려 곱게 갈아서 어머니의 마지막 유해를 철제 상자에 담았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기차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킬로그램당 1코루나에 팔릴 굉장한 화물을 싣고 떠났을 때처럼. 그 순간 머릿속에는 칼 샌드버그의 시구만 맴돌았다. 사람에게서 남는건 성냥 한 갑을 만들 만큼의 인과, 사형수 한 명을 목매달 못정도 되는 철이 전불하는. 한 달 뒤에 나는 막 넘겨받은 엄마의 유골함을 들고 외삼촌의 집 정원에 들어섰다. 자신의 철도 신호소에 앉아 있던 외삼촌은 우리를 보자 소리를 질었다. “, 내 누이로군. 네가 돌아왔어!” 그는 유골함을 받아들고 무게를 가늠해 본 뒤 누이동생의 몸이 전만 못하다고 말했다. 생전에 75킬로그램은 족히 나가던 누이였는데! 실제로 저울에 달아보니 재의 무게가 적어도 50그램은 축이 나 있었다. 그는 장롱 위에 유골함을 올려놓았다. 그러다 어느 화창한 여름날 외삼촌은 무밭에서 김을 매다가 문득 떠올렸다. 누이는, 그러니까 내 엄마는, 무라면 사족을 못 썼다는 것을. 그는 통조림 따개로 유골함을 연 뒤 무밭에 엄마의 재를 뿌렸고, 나중에 우리는 그 무를 맛있게 먹었다.

-탈무드의 구절들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책들이 우선 나를 모기처럼 짓이겨놓겠지. 그런 다음 샤프트 속을 오르내리는 승강기처럼 곧장 마룻바닥을 뚫고 지하실까지 떨어질 것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광경이 상상되면 나는 차라리 창가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드는 편을 택한다.

=책을 좋아하면서 왜 두려워 하나

-화장실과 침실 천장에 나 자신이 걸어둔 다모클레스의 검이다.

-사십 년 동안 나처럼 일이 유일한 기쁨이었던지라 은퇴한 후에도 그 일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사람이다.

-나는 아이들과 은퇴한 노인들의 고함소리와 환호성을 들으며 걸어갔다. 그러나 와서 합류하라고 부르는 사람도, 한잔하고 싶은지 내게 묻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자신들의 놀이에 빠져 얼이 나가 있었다. 놀이라고 해봐야 그들이 평생토록 애정을 쏟았던 일의 반복에 불과했지만. 나는 카인처럼 이마에 표적을 지닌 채 걸어다녔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어슬렁거리다가 그곳을 떠나며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나를 불러줄 수도 있었으련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문을 나서면서 나는 또 한 번 뒤돌아보았다. 초롱과 선로 변경 통제실의 불빛 속에서 아이들과 노인들의 형상이 어렴풋이 흔들리고 있었다.

-2톤짜리 닫집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무게에 짓눌려 내 몸이 구부정해진 것이다.

-더러운 물 밑 개흙 속에서 썩어가는 그루터기 위로 도깨비불이 어른거리듯이, 깊디깊은 이 지하 공간에서 부패해가는 늪지 표면으로 작은 기포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변증법의 논리대로 승자가 다시 두 진영으로 나뉜다는 것도 그 고매한 하수구 청소부들이 내게 알려주었다.

-전투에서 패한 교양인들이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밤이 새도록 그녀에게 용서를 빌었지만 헛일이었다.

-아름다운 하루다!

-왜 나만 보면 그렇게 험상궂은 표정만 짓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로 말미암은 고통의 낙인이 뚜렷이 새겨지고 부당한 분노가 서려 있는 얼굴. 그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한없이 비참한 심경에 젖곤 했다. 그지없이 고결한 주인에게 추악한 골칫거리나 떠안기는 밉살스러운 고용인, 그 혐오스러운 인간이 나인가 싶어서……

-예수가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미래로의 전진)이라면, 노자는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근원으로의 후퇴)이었다.

=예수는 녹색 버튼이며 노자는 붉은색 버튼일까?

-늘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게 내 운명이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것에 대해, 이런 성질을 가진 것에 대해, 심지어 나 자신에게까지 용서를 빌곤 했으니까……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나 자신의 밖과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보는 세상만사는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으로 활기를 띤다. 일제히 전진하는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후퇴한다. 대장간 풀무가 그렇고, 붉은색과 녹색 버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내 압축기가 그렇다. 만사는 절룩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데, 그 덕분에 세상은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게 된다.

-무형의 축축한 종이 반죽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생쥐들이 우글대는, 구멍이 숭숭 뚫린 에멘탈 치즈처럼 되어버린 덩어리였다.

=이것은 삼촌일 것이다.

-폐지를 압축하는 사람 역시 하늘보다 인간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건 일종의 암살이며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행위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책을 좋아하는데 책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 스스로를 죽이는 길고 긴 자살.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일.

-매 순간 일손을 멈추고 천계론을 읽으며 짤막한 글귀들을 낚아채 캐러멜처럼 빨아먹으면서 장엄한 미에 도취되었다.

-스무 개의 꾸러미가 해바라기의 환한 빛을 발하며 스무량의 화차로 연결된 열차처럼 화물용 승강기를 향해 나아갔다.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나는 지하실에 가만히 있지만 세상은 시끄럽게 움직인가?

-사실 나는 땅거미가 지는 해질 무렵을 너무도 사랑했다. 하루 중에서 무언가 굉장한 일이 닥칠 것만 같은 기분에 젖은 유일한 순간이었다. 이런 불확실한 시각에는 모든 거리와 장소가 평소보다 더 근사해 보였다. 사람들의 표정도 명상에 잠긴 듯 온화해졌고, 그 순간만은 나 역시 아름다운 청년이 된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다. 거울이나 상점 진열창을 힐끗거리면 주름살 하나 없는 내 모습이 보였고, 놀란 내 손가락들이 얼굴을 더듬었다……날마다 해질녘이면 아름다움을 향해 가는 문이 열렸다.

-그녀는 연이 하늘로 자기를 낚아채갈 거라고, 성모마리아처럼 곧장 천국으로 데려갈 거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녀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둘이 함께 낭아오르면 되지 않느냐고……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하늘이란 세상을 말하는 걸까?

-나는 열성을 다해 파기했다.

-나는 이 히틀러와 열광하는 남녀들과 아이들을 파쇄하고 짓이겼는데, 그럴수록 나의 집시 여자가 더 간절히 생각났다.

-그저 책이나 갉아먹고 폐지 더미에 뚫린 구멍 속에 살며 그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인데. 추운 밤이면 내 품안에서 공처럼 웅크렸던 내 어린 집시 여자처럼 몸을 사린 생쥐들이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마침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쳐다보았다.

-무엇보다 그들이 낀 장갑에 나는 모욕을 느꼈다.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나는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기쁨에, 폐지가 지닌 비길 데 없이 감각적인 매력에 아무도 마음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부브니에서는 그렇게 비인간적인 일을 해치우고 있었다.

=여기서의 비인간적인 것은 하늘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수로 그곳에 버려진 책들과 사소한 기쁨도 끝이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차러ᅟᅡᆷ 늙은 압축공들이 누렸던 좋은 시절도 끝이 나고 만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게 되었으니까. 매 꾸러미에서 책을 한 권씩 골라 보너스로 준다 해도 나는 거기서 끝장이었고,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겠다는 열망으로 우리가 종이 더미에서 구해낸 장서들도 모두 끝장이었다. 그러나 내 용기를 결정적으로 꺾어놓은 건 그 젊은이들이었다.

-헤르더와 헤겔의 책들은 나를 고대 그리스에 던져놓았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건만 내가 막상 휴가를 떠나본 적은 없었다. 일을 따라잡느라 휴가는 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하루라도 결근을 하면 소장은 가차없이 추가로 이틀을 더 근무하게 했다. 어쩌다 하루 쉬는 날이 찾아와도 나는 수당을 받고 일하러 갔다. 일이 항시 밀려 있는데다, 내 역량을 넘어서는 종이 더미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으니까. 사르트르 양반과 카뮈 양반이, 특히 후자가 멋들어지게 글로 옮겨놓은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십오 년 동안 내 일상의 몫이었다.

-‘안돼. 넌 그럴 수 없어, 단 한권의 책도 펼쳐 볼 권리가 없어, 잔혹한 한국 형이처럼 냉정해져야 해라고 쉴새없이 나 자신을 타일렀다. 내가 압축통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들이 무감각한 흙덩이인 양, 그렇게 일했다.

-무한의 문턱 너머에 자리한 정삼각형의 한복판

=?

-카페 검은 양조장카운터에 기대앉아 나는 맥주 한 잔을 마신다. 이봐, 오늘부터 넌 혼자야.

=35년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사라졌다.

-전진이 곧 후퇴인 셈이지. 그래,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수스 아드 푸투룸 같은 말이야.

-아니다. 난 분명 아무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저 눈만 감아도 모든 게 현실에서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니까.

-“여러분, 난 백정의 조수요……

=아마도 압착기와 자신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듯

-어쩌면 그는 작년에 홀레쇼비체 도살장에서 나를 으슥한 구석으로 몰고 가 예리한 핀란드제 칼을 목에 들이댔던 남자인지도 몰랐다. 그때 남자는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르지차니의 아름다운 전원을 기리는 시를 읊었을 뿐이다……그런 다음에는 내게 사과를 했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읽힐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었던 거다……

-머리 위에 펼쳐진 별이 총총한 하늘을 능가하는 무언가를 생쥐의 눈 깊은 곳에서 발견한다.

-지복의 미소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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