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 줄 친 문장들 (+친구와의 토론)
게시물ID : readers_296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hinejade
추천 : 7
조회수 : 651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7/09/18 01:36:32

-앎을 찾아 평생 헤맬 용기에 대하여

-과학은 지금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강하게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과학자 하면 천재적이지만 아쉽게도 생활에는 무능력해서 세상을 향해 혀를 쑥 내밀기나 하는 아인슈타인을 떠올린다면, 그 이유는 한편으로 과학자들 자신에게 있다. 과학자는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려 한다. 과학은 객관적이고자 한다. 인간은 멀찌감치 떨어져야 한다는 식이다.

-그들 각각은 세계라는 모자이크를 이루는 조각 몇 개를 알아낸다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정했다.

-미디어는 늘 성공한 연구 소식만 전하기 때문에, 한 번의 성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실패와 실망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지 아는 일반인은 극히 드물다. 자연의 수수께끼는 미로와 같다. 모든 틀린 길 각각을 최소한 한 번씩 거치고 나야 비로소 해답이 보인다. 심지어 운이 좋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옳은 길에 접어들더라도 사소한 문제에 시달리며 몇 년, 때로는 몇십 년을 보낸 다음에야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과학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지능이 아니라 끈기다. 고집에 가까운 끈기. 후퇴와 자기회의에 굴하지 않는, 특히 경쟁에 아랑곳하지 않는 끈기 말이다.

-무엇이 과학자를 움직이느냐는 질문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대답 하나는 가장 오래된 대답이기도 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서 유래한 것인데, 그는 근대 자연과학의 아버지로서 이 책에 역사적 관점을 제공한다. 레오나르도가 보기에 앎의 욕구는 자연에 대한 사랑, 따라서 삶에 대한 사랑의 한 형태다. “사랑은 앎에서 싹트며 앎이 확실해질수록 더 깊어진다.” 우리가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게 된다. 또한 우리는 대상을 정확히 관찰함을 통해 결국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므로, 레오나르도에게는 말그대로 모든 대상이 집중적인 연구 가치가 있었다. 냇물 속 자갈을 휘감아 도는 물살도 그랬고, 천체의 운동도 그랬다.

 

*로알드 호프만(화학자 겸 시인)

-관심도 어디에선가 유래해야 할 테니까. 출발점은 늘 감각적 끌림이겠죠.

-어린 시절엔 그런 식으로 화학에 끌리더라도 나중에 화학에서 얻는 즐거움은 아주 지적인 것이죠. 반면에 그림이나 조각을 즐길 때 우리는 지적인 생각을 거의 안 하잖아요. 느낌이 단박에 오니까. 말하자면 가슴이 울리니까. 물론 나중에는 작품을 지적인 태도로 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꼭 필요한 건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가 보통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관심을 계속 사로잡을 무언가가 필요해요.

-질서나 무질서 하나만 가지고는 미적 감흥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긴장에서 나와요.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긴장, 단순함과 복잡함 사이의 긴장.

-우리는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직 남아 있을 때 아름다움을 느낀다. 또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세상에 무언가를 내놓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작품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심지어 시도 사람을 해칠 수 있어요. 이를테면 과거의 애인이 그 시를 읽는다면 말입니다.

-분자는요, 사람들을 결합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에요.

 

*마틴 리스(우주론자)

-지금은 이 직책에 딸린 의무가 사실상 없다시피 해서 죽은 사람도 맡을 수 있을 정도랍니다.

-별은 우리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지구에서 성립하는 자연법칙은 별에서도 똑같이 성립해요. 물론 별에서는 주변조건이 극단적이라는 점이 다르긴 하죠. 그렇지만 우주는 우리의 생활공간이잖아요. 또 지구에 살았던 모든 인간이 본 별과 지금 우리가 보는 별은 똑같은 모습이에요. 게다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면, 바로 우리 자신이 다름 아니라 별이 남긴 먼지예요. /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우리는 오래 전에 꺼진 천체가 남긴 찌꺼기라는 말씀이군요. / 바로 그겁니다. 모든 원소가 별의 내부에서 수소와 헬륨이 핵융합 반응을 일으킨 결과 발생했지요. 이런 표현이 조금 거슬릴지 모르지만, 인간은 별이 남긴 원자 쓰레기라고 할 수 있어요.

-혹시 인간의 뇌는 우주를 파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데, 우리는 이를 무릅쓰고 우주를 연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종교와 과학이 서로에게 할 말이 별로 없다는 생각은 들어요.

 

*한나 모니어(신경생물학자)

-비정상성이 왜 매력적인지 아세요? 왜냐하면 우리가 비정상성에서 결국 우리 자신을 보기 때문이에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은 냄새에요.

-후각이 뇌 속의 감정 시스템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주관적 경험

-발견의 환희는 소설가나 과학자나 비슷하게 체험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은 사뭇 다릅니다. 교수님이 하는 실험은 누구나 재현할 수 있어야만 해요. 교수님 개인은 그 실험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하죠. 반면에 프루스트는 철저히 개인적인 자신의 관점에서 내면의 세계를 서술하잖아요. / 맞아요. 하지만 프루스트의 서술에 주관성이 스며들어 있다 하더라도, 그가 하는 말은 우리 모두에게 타당한 진실이에요. 우리가 프루스트를 읽는 것은 그가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를 울리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기억과 전혀 다른 현실을 대면하는 일은 몹시 고통스러울 수 있어요.

-기억이라는 놈은, 심지어 어쩌면 자기 자신의 기억이 전혀 아니더라도,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놓는 것 같아요.

-연구를 통해 얻는 것?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죠. 제가 몇 달 전부터, 때로는 몇 년 전부터 기다려온 결과를 함께 연구하는 동료가 알려줄 때, 그리고 갑자기 퍼즐 맞추기에서처럼 연관성이 드러날 때, 저는 저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립니다. 잠깐 동안 시간이 멈추죠. 지금 이 일만 생각하고 다음 순간조차도 생각하지 않게 돼요. 저 자신과 세계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심오한 느낌이 밀려오고요. 그럴 때는 기억도 아무 구실을 못해요. 거의 신비 체험에 가까워요. 잠깐 동안, 오롯이 현재에 있는 경험.

 

*레오나르도 다 빈치(예술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어보겠어요? 이발소에서 일하는 면도날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면도날은 햇빛이 자신의 표면에서 찬란하게 반사되는 것을 보았어요. 한껏 자부심을 느낀 그 면도날은 이제 더는 이발소로 출근하지 않기로 결심했지요. 그리고 조용히 숨어 있을 곳을 구했어요. 두세 달이 지나 면도날이 다시 세상으로 나왔는데, 과거에 그의 표면에서 빛나던 광채가 사라져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표면이 녹으로 덮였기 때문이죠.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집니다. 사람은 정신을 끊임없이 사용해야 해요. 우리가 편안함에 빠져들면, 정신은 마치 그 면도날처럼 금세 날카로움을 잃고 추한 무지의 녹에 덮여 볼품없게 되지요.

 

*라가밴드라 가닥카(행동과학자)

-하지만 요새는 예전보다 덜 쏘여요. 왜냐하면 말벌을 다루는 일은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주로 맡거든요.

-이 사회에서는 원리적으로 어느 암컷이든지 자신의 왕국을 세울 수 있거든요. 그런데도 특별히 번식력이 뛰어난 암컷만 자기 왕국을 세웁니다.

-완벽한 사회주의 사회네요. 심지어 번식까지 집단화 된 사회.

-‘페로몬이라고 하는 그 화학물질은 다른 모든 개체의 성욕을 억누르지요. / 여왕이 통치를 위해 마약을 써서 신민들을 안정시키는 셈이군요.

-요컨대 말벌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만 여왕에게 복종하고 서로 협동합니다.

-수컷은 암컷에 의해 양육되어 한동안 유목민처럼 떠돌다가 섹스를 하고 죽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노동은 전혀 안하죠. ‘왜 그럴까하는 의문을 우리 팀이 파고 들었어요. 여러 실험에서 드러났는데, 말벌 수컷도 벌집에 있을 때만큼은 애벌레 양육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암컷이 그 일을 훨씬 더 잘 하거든요. 기본적으로 수컷은 잉여예요. / 말벌 사회뿐 아니라 실은 자연 전체에서 그렇지 않나요? / , 맞아요. 말벌뿐 아니라 꿀벌과 개미를 봐도 수컷은 잉여라는 사실을 더없이 분명하게 알 수 있어요. 이 녀석들의 사회에서는 심지어 번식을 위해서도 수컷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여왕의 아들은 수정되지 않은 알에서 태어나거든요. 여왕과 수컷들의 섹스는 오직 딸을 낳기 위해서만 필요해요. (중략) 요컨대 여왕이 아들을 낳느냐 딸을 낳느냐는 전적으로 여왕 자신이 결정합니다.(중략) / 그럼 대체 왜 암컷과 수컷이 있고 짝짓기가 있는 걸까요? / 바로 그것이 진화론의 수수께끼 중 하나입니다. 암컷만으로 이루어진 종이 있다면, 그 종은 절반의 비용으로 번식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어마어마한 장점이지요. 하지만 그런 종은 병원체에 더 취약할 거예요. 숙주들의 몸에 병원체가 기생하더라도, 양성생식을 통해 숙주들의 유전자가 계속 새롭게 섞이면, 병원체의 활동이 억제되거든요.

-1964년에 영국 진화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이 제시한 유명한 공식이 있는데, 그걸 보면 모든 것이 명약관화해요. 그 공식에서 협동할 용의는 친척관계의 긴밀도에도 좌우되지만 무엇보다도 협동의 비용과 이익에 좌우되거든요.

-중요한 것은 비용과 이익의 비율이 협동의 강도를 결정한다는 원리입니다.

-인간들이 공정하게 협동하도록 만드는 최선의 전략을 찾는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어요.

-동물은 지금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능력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동물을 끊임없이 깎아내리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동물로부터 격리시킨 것과 동전의 양면 관계에요. 현대사회에서 동물은 우리에게 아주 낯선 존재가 되었어요. 얼마나 많은 종들이 다양한 개별 분야에서 인간보다 우월한지를 우리는 잊어버렸습니다.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잃은 거죠.

-어차피 부자나라의 과학자들과 물량전을 벌여서는 우리가 질 수밖에 없거든요.

-하지만 보살핌을 받은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보답을 합니다. 반면에 말벌은 아무 보답도 하지 않아요. 그래서 말벌을 보살피면, 참된 헌신을 배우게 돼요. 이런 유이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이 자연과 친해지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에른스트 페르(경제학자)

-경제학자들은 감정이라는 단어 대신에 선호라는 단어를 써요. 예컨대 당신이 절인 양배추와 초콜릿 중에서 초콜릿을 사기로 결정할 때도, 당신은 위험을 피하거나 추구하는 선호에 따라 결정하기 마련이죠. 감정이 관여하지 않는 의사결정은 없습니다.

-경제학은 정의를 향한 선호를 체계적으로 은폐해왔습니다. 물론 이기심은 아주 강력한 동기지요. 하지만 이기심 외에 정의감과 이타심 같은 동기를 배제하는 것은 중요한 오류입니다.

-사람들이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판단에 어떻게 도달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 팀이 하는 일을 경험적 정의 연구라고 불러요. / 정의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요?

-거의 모든 사람은 그런 무임승차자의 존재를 부정의로 느낍니다.

-정의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란 우선 거래 상태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겠군요.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어느 사회든 예외 없이 사회적 규범을 갖고 있고 그것들을 지키려 애쓴다는 점이에요.

-집단선택

-유독 인간만 공정함을 바라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우리 팀의 실험에서는 덩치가 큰 아이일수록 이기심이 더 강하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또 결정권을 행사하는 경향이 강한 아이일수록 덜 나눠주고요. 반면에 일부 연구자들의 예상과 달리 외동아이는 이례적으로 많이 나눠줘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경우에는 타인이 무언가를 받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보상 시스템이 이례적으로 강하게 반응합니다. / 마치 타인을 대신해서 기뻐하는 것처럼요.

-그렇다면 이타심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추측을 충분히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거꾸로 사람이 행복하면 저절로 이타심이 일어난다는 생각도 할 수 있겠군요.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인 결과인지 우리 팀은 아직 모릅니다.

-그 지식인들은 불교의 관점에서 이타주의 문제에 접근하고요. 다름 아니라 달라이 라마는 타인을 돌보는 것은 특히 지혜로운 형태의 이기주의일 따름이라고 가르칩니다. 타인에게 좋은 일을 해주었을 때 느끼는 행복감이 자신의 돈으로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살 때 느끼는 행복감보다 더 오래 간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거의 항상 상관성뿐이에요. 참된 원인을 발견하는 경우는 훨씬 더 드물지요.

=이타심이 꼭 옳은 걸까

-특정한 행위를 정의감의 굴레에서 해방시킨 것이 시장경제의 성공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팀은 뉴기니 섬의 부족들을 연구했어요. 그 여러 부족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언가가 생기면 곧바로 나눠줘야 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들에게는 애써 일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평등의 원리는 경제 발전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보수주의적인 경제학자들이 옳아요.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달리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거죠. “한 사회 안에 너무 큰 불평등이 존재하면 언젠가는 불평등도 발전을 방해하는 멍에가 되지 않을까?”

-정반대로 거래와 교환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더 기꺼이 남들과 나눠가집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모두의 이익을 위해 따로는 무언가를 주어야 하고 또 때로는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또 시장에서 배웠기 때문에 다양한 재화의 가치를 비교할 줄도 알죠.

-우리가 일종의 정의감을 타고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정의감을 사용하는 법을 훈련해야 한다.

-정의를 추상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부적절하겠군요. 항상 특정 상황과 관련지어서 정의를 논해야 하겠고요.

-복수심이란 다름 아니라 정의감의 어두운 측면입니다. 바꿔 말해 복수란 공동체 내부의 무임승차자의 맞선 방어 행동이에요.

-“쳐먹는 것이 우선이요, 도덕은 나중이다라는 베르톨트의 말이 옳은 모양이에요.

-비용을 고려하지 않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막스 프리쉬는 인류 역사의 모든 혁명가가 행복이 아니라 정의를 약속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고 말했습니다. / 행복이 사적 재화라면, 정의는 공적 재화입니다. 당신은 개인으로서 당신의 ㅎ랭복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혁명과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지요. 반면에 정의를 얻으려 한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불평등이 실적을 통해 정당화되지요.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은 특별히 열심히 일하거나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상을 받는 것은 사회에 이롭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드러나고 있듯이, 일부 최고경영자들은 탁월한 실적 때문에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부정의는 한 사회 전체의 자기 이해를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어요. 지금 우리는 경제 위기에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도덕적 위기가 훨씬 더 심각합니다.

 

*크레이그 벤터(생화학자)

-하루도 빠짐없이 밤에는 당신의 머리 위로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낮에는 당신의 코앞에서 수십 명이 죽어나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느 순간 당신은 당신 자신이 살아있는지 여부에 거의 관심이 없어집니다.

=유전자운명

-사실 나는 우리가 인간의 유전정보를 컴퓨터로 파악했다는 것 이상의 말을 결코 하지 않았어요. 이 성과는 쿰란 유적에서 발굴된 두루마리를 연구한 성과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1950년대에 사해 연안의 쿰란 유적에서 모든 성경 필사본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두무마리가 발견되었지요. 그 두루마리는 지금 디지털화되어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그 두루마리의 내용을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비토리오 갈레세(신경과학자)

-뉴런 덕분에 우리는 모방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선생님은 왜 그런 놈을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세요?”

-시청자들은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발락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거울뉴런을 다른 동물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지요.

-가끔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시 르네 지라르라는 프랑스 종교철학자를 아나요? 그는 무대 위의 배우들이 제단 위의 제물과 같다고 주장했지요. 사회가 배우들을 상징적으로 희생시킴으로써 사회에 능 있기 마련인 폭력성을 무난한 방식으로 방출한다고요.

-왜냐하면 우리의 천성적 모방능력과 미디어에 나오는 폭력과 실제 생활에서의 폭력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한 연구가, 내가 아는 한, 1건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공포 게임과 영화가 전혀 다른 효과를 일으킨다고 봐요. 그 효과는 사람들로 하여금 잔혹한 광경에 익숙해지게 하는 것이에요. 그런 게임과 영화를 자주 보면 폭력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고 결국엔 갈등 해결을 위해 폭력을 써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겠죠. 하지만 그런 지적과 더불어 이 말도 해야 공평합니다. 지금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평화롭게 함께 살았던 적은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어요. 과거에는 비디오게임이 전혀 없었는데도 거의 모든 시대가 지금보다 훨씬 더 잔인했지요.

-우리의 소통에서 전화와 컴퓨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직접 만나는 공동체들은 점점 더 해체되는 중이고요. 그런데 여러 실험에서 드러났듯이, 공감능력은 당신이 타인을 모니터에서만 보느냐 아니면 직접 대면하느냐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연극이 영화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기는 거예요. 또 당신이 대화 상대와 이메일로만 소통하거나 많은 청소년들처럼 인터넷 채팅방에서만 만나면, 당신은 그 상대의 시각적 이미지를 완전히 잃게 됩니다. / 말하자면 우리가 교제 상대를 탈육체화하는 셈이죠. / 맞아요 그리고 그런 탈육체화는 우리의 사회적 정신적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직 우리가 모르지만요.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진화 과정에서 사회적 지성은 가상적인 만남이 아니라 직접적인 만남에 적합하게 발전했다는 점이에요.

-우리의 모든 생각과 느낌은 우리가 타인의 몸을 보는 것에서, 우리가 물체를 붙잡고 다루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운동능력이 심지어 언어능력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증거도 많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오직 물체의 세계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발터 치클겐스베르거(신경약리학자)

-통증을 느끼는 맥락, 통증문턱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확고한 정설은 머릿속의 모든 것이 확고하고 영원하게 배선되어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심지어 성인의 뇌도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습니다.

-학습된 것은 다시 탈학습될 수 있습니다.

-오페라를 정말 좋아하던 사람이 통증 환자가 되면, <트리스탄과 이졸데>관람은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역이 됩니다. 왜냐하면 두 주인공이 사랑을 위해 함께 죽는 마지막 장면이 나올 때까지, 죽을 것 같은 통증이 3번쯤 찾아오거든요. 한번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오페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각인되지요.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그너의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다시 경험하는 것밖에 없어요. 삶의 기쁨을 얼마나 많이 재발견하느냐에 따라 환자는 꼭 그만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통증에 끊임없이 신경을 쓰는 것을 멈출 수 있고요. 지나친 보호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오히려 쾌락을 즐기는 능력을 다시 키우는 편이 더 나아요. 좋은 통증 치료법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찜질 대신 탱고를!’

-인간은 이타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찹 멉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비롯한 온갖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거예요. 공감능력이 없으면 인간의 공동 생활은 아마 원활히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통증과 중독은 밀접한 관련성이 있어요. 둘 다 바람직하지 않은 학습의 결과거든요. 만성 통증의 경우에 뇌는 점점 더 강한 감각을 일으키는 법을 학습합니다. 그런 감각은 당사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말이죠. 한편, 뇌가 약물에 중독된다는 것은 점점 더 많은 약물을 공급받아야만 어느 정도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 된다는 것이에요. 양쪽 모두가 유사한 뉴런 연결망의 재구성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둘 다 진정한 병입니다.

-분자심리학

-모든 고통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고, 우리는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도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려 있으니까요. / 지속적인 고통은 무의미합니다. 고통이 사람을 고귀하게 만든다는 그 신비주의적인 생각은 되도록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아요. 그건 기독교 중에서도 케케묵은 기독교의 발상이에요. 심지어 교황도 통증 치료에 찬성한다고 입장을 밝혔어요. 통증을 참아내는 것은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아요.

-통증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신호예요. 물론 극단적인 신호이기는 하지만요. 앞으로도 늘 그럴 겁니다.

 

*세라 허디(인류학자)

-아마도 새끼의 진짜 아비를 은폐하는 것인 듯해요. 암컷이 미래에 지배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수컷과 섹스를 해두면, 그 수컷은 나중에 지배자가 되어도 그 암컷의 새끼들을 죽이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 무조건적 유대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신화예요.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공공의 비용으로 살해됩니다.”

-독일의 모든 아버지들이 가족부가 정한 육아휴직을 활용한다면, 독일 사회가 더 온화해질 수도 있겠군요.

 

*비라야누르 라마찬드란(뇌과학자)

-진화가 인간의 뇌 속에 영적인 경험을 담당하는 별도의 회로를 내장해놓았을 가능성이 있다.

-뇌의 양쪽 반구는 서로 다른 임무를 수행합니다. 좌반구는 이야기꾼이에요. 다른 여러 일과 더불어 세계에 대한 이론을 끊임없이 지어내는 일을 하지요. 이 일은 유용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정을 내려야하니까요. 그럴 때 좌반구는 아직 확보하지 못한 정보를 그냥 제쳐놓고 그럴까한 이야기를 구성합니다. 반면에 우뇌는 그 이야기를 현실과 대조하면서 검증합니다. 그런데 D부인의 경우에는 이 검증을 담당하는 우뇌 구역 몇 곳이 손상된 상태였어요. 그래서 자신이 하려는 행동과 실제로 하는 행동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바라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 셈이죠.

-우리가 자아나 그 비슷한 것을 감지한다면, 그건 아마도 착각일 거예요. 벌써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한 관념만 해도 몹시 불안정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과정의 절대다수는 좀비에 의해 전혀 무의식적으로 처리됩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자아가 아니에요. 오히려 두개골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게 뒤얽힌 과정이 우리를 움직여요.

-“자아라는 관념이 없으면 우리는 금세 마비될 것이다.” 설명ㅇ 그렇다 하더라도 자아는 여전히 상상입니다. 뇌가 만들어낸 덧없고 비극적인 구성물이에요.

-인간은 자신이 개별적인 영혼을 가졌다는 그릇된 믿음 때문에 고통을 겪지요. 이 환상을 마야라고 하고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자아라는 매혹적인 거짓을 꿰뚫어보고 자신과 우주가 하나임을 알아채는 것이에요.

-의식의 내용 중에서 개인적인 것이 차지하는 비율은 극히 낮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의 98퍼센트 이상은 우리가 우리 문화로부터 넘겨받은 것입니다. 나는 탁자가 무엇인지, 발가벗은 남자가 어떤 모습인지, 아인슈타인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도 이 모든 것을 압니다. 내 의식의 2퍼센트만이 나의 인생사, 내 딸, 내 아들에 관한 것이에요. 내가 죽으면, 2퍼센트만 소멸합니다. 나머지는 계속 살고요.

 

*제레드 다이아몬드(생리학자 겸 지리학자)

-성공의 조건이 여러 가지라는 점입니다.

=해체이론의 끝은 독재인가

 

*스티븐 와인버그(물리학자)

-그 법칙의 바탕에는 규칙성이 있거든요. 정확히 말해서 생화학의 규칙성이 있어요. 더 나아가 당신은 생화학 법칙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원자물리학 법칙을 통해서 설명하면 되거든요. 그 다음에는 입자물리학이 나오겠죠. 그러다가 결국에는 항상 궁극의 이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궁극의 이론은 무릇 ?”라고 질문이 끝나는 곳입니다.

-한 분야에 진정으로 기여하는 유일한 길은 그 분야를 초심자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우주는 점점 더 무의지해진다.”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 우리의 삶에 객관적 의미를 부여해주는 무언가를 우리는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자연법칙 속에는, 우주에서 우리의 자리를 특별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아무리 봐도 없거든요. 이건 내가 내 삶을 무의하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런 의미를 우리의 삶에 스스로 부여해야 합니다. 혹시 아실지 모르지만, 당신이 인용한 문장 다음에 한 문장이 더 나와요. “우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삶을 광대극에서 조금은 벗어나게하고, 인간의 삶에 한 가닥 비극의 품위를 불어넣는다.” / 어째서 비극이죠? / 과거에 사람들이 믿었던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비극이죠. 한때 사람들은 자신을 우주적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여겼어요. 우리가 창조되었고 죄를 지었고 구원받는다고 믿었어요. 참으로 거창한 이야기였죠. 반면에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오히려 어떤 대본도 없이 무대 위에서 어슬렁거리는 배우에 더 가깝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여기 저기에서 즉흥으로 드라마도 조금 지어내보고 코미디도 조금 지어내보고 코미디도 조금 지어내보는 것뿐임을 깨닫는 중이죠. 나는 이것이 상실이라고 느낍니다. / 거꾸로 이것을 자유의 증가로 보고 기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로서는 진심으로 축하할 따름입니다.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가 없어요. 나는 지나간 신아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어느 정도 느낍니다. 종교가 나를 키웠다고 느끼죠. 사실 종교에 대한 나의 반감은 다름 아니라 나 자신이 무언가를, 그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열망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과학과 종교가 각각 따로 한정된 영역을 차지한다면, 양쪽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어요. 과학은 측정과 증명이 가능한 것을 다루고, 종교는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생각과 가치를 다루면 되죠.

-신앙을 잃는 것은 진정한 상실입니다. 나를 가장 탁월하게 감동시키는 건축물은 고딕 성당이에요. 때때로 나는 종교를 노망난 이모에 비유하게 돼요. 거짓말을 하고, 온갖 말썽을 일으키고, 어쩌면 살날이 얼마 안남았을지 모르는 늙은 이모. 하지만 그런 이미도 한때는 아주 아름다웠어요. 그리고 이모가 없어지면, 우리는 이모를 그리워하겠죠.




제목 없음1.png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