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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줄친 문장들
게시물ID : readers_298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hinejade
추천 : 1
조회수 : 38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10/03 12:36:43

-사랑의 기술에 대한 편리한 지침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실망할 것이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문제로 생각한다.

-사실상, 우리 문화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경우, 그 의미는 본질적으로는 인기와 성적매력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낭만적 사랑’, 곧 다음에는 결혼으로 이어지게 될 사랑의 개인적 경험을 추구하고 있다. 사랑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새로운 자유 개념은 능력의 중요성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대상의 중요성을 몹시 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또는 그녀는)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본다. 남자에게 매력 있는 여자 그리고 여자에게는 매력 잇는 남자는 탐나는 경품이다. ‘매력은 보통 인기 있고 퍼스낼리티 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는 품질 좋고 멋진 포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친숙해질수록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권태가 생겨나며 최초의 흥분의 잔재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그들은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껐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수십년간의 잉꼬부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러한 태도, 즉 사랑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는 태도는 반대의 경우에 대한 압도적 증거에도 아랑곳 없이 사랑에 대한 일반적 관념으로서 지속되고 있다.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이것이 다른 활동의 경우라면 사람들은 열심히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려 하고 개선법을 찾아내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이 활동을 포기할 것이다. 사랑의 경우, 포기는 불가능하므로,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 것 같다.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자연과 결별하면 인간은 자연으로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일단 낙원-자연과의 본래의 합일 상태-에서 쫓겨나면, 다시 돌아가려고 노력해도, 불타는 칼을 가진 케루빔 천사가 길을 가로막는다. 인간은 철저하게 상실한 전인간적 조화 대신에, 이성을 발달시키고 새로운 조화, 곧 인간적 조화를 찾아내면서 오직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총체성?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개인으로서든 인류로서든 결정되어 잇는, 본능처럼 결정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 쫓겨난다. 확실한 것은 과거뿐이고 미래에 확실한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인간에게는 이성이 부여되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동포를,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분리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짦으며,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 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의 인식, 자신의 고독과 자신의 분리에 대한 인식,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 이러한 모든 인식은 인간의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 감옥으로부터 풀려나서 밖으로 나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과, 또한 외부 세계와 결합하지 않는 한 미쳐버릴 것이다. 분리 경험은 불안을 일으킨다. 분리는 정녕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인간적 힘을 사용할 능력을 상실한 채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무력하다는 것, 세계-사물과 사람들-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나의 반응 능력 이상으로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다. 게다가 분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으킨다. 분리 상태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수치심 경험은 성서에 아담과 이브 이야기로 표현되어 있다.

-인간이 분리된 채 사랑에 의해 다시 결함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 이것이 수치심의 원천이다. 동시에 이것은 죄책감과 불안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불완전함 보다는 고독

-인간-모든 시대, 모든 문화의-은 동일한 문제, 곧 어떻게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개체적 생명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내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문제는 동일하다. 이 문제는 동일한 근원, 곧 인간의 상황, 인간읫 lfwhs 조건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도취적 합일의 모든 형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강렬하고 심지어 난폭하다는 것, 둘째는 퍼스낼리티 전체에, 몸과 마음에 일어난다는 것, 둘째는 퍼스낼리티 전체에, 몸과 마음에 일어난다는 것, 셋째는 일시적이고 주기적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것이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해결책으로 채택하고 있는 합일의 형태, 곧 집단-그 관습, 관례, 신앙-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당한 발전을 볼 수 있다.

=그럼 종교에 독실한 사람들은 성관계를 하지 않는가?

-현대 서양 사회에서도 집단과의 합일은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아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 목적이 군중에 소속되어 있는 합일이다.

-평등은 인간이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만인은 각기 목적이고, 목적인 항에서만 동등하며, 서로 수단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정신에는 성이 없다

=여성적인 생각, 남성적인 생각?

-현대사회는 인간에게 대집단 속에서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하도록 서로 동일한 원자적 인간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모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량 생산이 상품의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이러한 표준화를 평등이라고 한다. 일치에 의한 합일은 강렬하지도 않고 난폭하지도 않다. 이러한 합일은 냉장하고 관례에 따라 지시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때로는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진정시키기에 불충분하다. 현대 서양 사회의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강박적인 성애 중시, 자살 등의 사례는 군중과의 일치에 상대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다. 게다가 일치에 의한 합일은 주로 정신에만 관계되고 육체에는 관계되지 않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도취적 해결책과 비교하면 결함이 있다. 군중과의 일치에는 단 한 가지 이점이 있을 분이다. 곧 이것은 발작적이지 않고 지속적이다. 개인은 서너 살 때 일치의 유형으로 유도되고 따라서 군중과의 접촉이 끊이지 않는다. 개인의 장례식조차도-개인은 그의 마지막 사회적 대사건으로서 장례식을 기대하고 있다-이러한 유형과 엄밀하게 일치되어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월요일부터 다음 월요일까지, 아침부터 바까지 모든 활동은 일정하고 기성품화되어 있다. 이러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은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며,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 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것인가?

=인간의 해소될 수 없는 근원적 고통

-노동자는 끝없는 벨트 위에 놓여 있고 노동의 결합적 성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보람과 애착이 없는 노동

-생산적 작업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은 대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도취적 융합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은 일시적이다. 일치에 의해 달성된 합일은 사이비 합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합일은 실존의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한 해답은 대인간적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류보완계획

-실존의 문제에 대한 신중한 해답으로서 사랑

=정신적인 사항

-공서적 합일

=육체적인 사항

-성숙한 사랑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잇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활동에 대한 한 가지 개념, 곧 근대적 개념은 외부적 목적 달성을 위한 에너지 사용을 가리킨다. 그러나 활동에 대한 또 하나의 개념은 외부적 변화가 일어났든, 일어나지 않았든 인간의 타고난 힘을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활동에 대한 후자의 개념을 가장 명백하게 정식화했다. 그는 감정을 능동적 감정과 수동적 감정, 행동격정으로 구별한다. 능동적 감정을 나타낼 때 인간은 자유롭고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수동적 감정을 나타낼 때 인간은 쫓기고 자기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동기에 움직여지는 대상이 된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준다고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역에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그러나 그는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생명에 무엇인가 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생명에 야기된 것은 그에게 되돌아온다. 참으로 줄 때, 그는 그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는 행위에서는 무엇인가 탄생하고 이와 관련된 두 사람은 그들 두 사람을 위해 태어난 생명에 대해 감사한다.

-자아도취적 전능

-사랑의 능동적 성격은, 준다고 하는 요소 외에도, 언제나 모든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어떤 기본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사람은 자신의 노동의 대상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일하기 마련이다.

-오늘날은 책임이 흔히 의무, 곧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책임은, 그 참된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동이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의 요구-표현되었든, 표현되지 않았든-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수 있고, ‘응답할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준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은 아니다. 존경은 이 말의 어원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와같이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 독립을 성취할 때에만, 다시 말하면 목발없이, 곧 남을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않아도 서서 걸을 수 있을 때에만 존경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프랑스의 옛 노래처럼 사랑은 자유의 소산이며 결코 지배의 소산이 아니다.

-인간의 비밀을 아는 한 가지 방법, 절망적인 방법이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는 힘으로부터, 다시 말하면 그로 하여금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느끼게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게 해서 그를 사물, 우리의 사물, 우리의 소유물로 바꿔놓는 힘으로부터 생기는 방법이다.

=그래도 내가 잘 갔네. 그런데 이 정도는 솔직히 다 예상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흔히 우리는 어린이에게서 지식에 이르는 이 길을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어린이는 어떤 것을 알기 위해 분해하고 해체한다. 또는 동물을 해부하기도 한다. 나비를 알기 위해, 나비의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 잔인하게 날개를 잡아 뜯는다. 이러한 잔인성의 동기는 더욱 깊은 것, 곧 사물과 생명의 비밀을 알려고 하는 소망에 있다. 비밀을 알게 해주는 또 하나의 길은 사랑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이러한 침투를 통해 알려고 하는 나의 욕망은 합일에 의해 만족을 얻는다. 융합하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고 나 자신을 알고 모든 사람을 안다-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알지못한다. 나는 오직 한 가지 방법에 의해서만 인간에 대한 살아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사고가 제시하는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일의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우리의 동료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수수께끼인 것처럼, 우리는 자신에 대해 언제나 수수께끼다.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의 행위에 있다. 이 행위는 사상을 초월하고 언어를 초월한다. 사랑의 행위는 대담하게 합일의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를 통한 지식, 곧 심리학적 지식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 충분한 지식을 얻기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다. 다른 사람의 실상을 보려면, 즉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 곧 불합리하게 일그러진 상을 극복하려면, 나는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인간을 객관적으로 알게 될 때에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궁극적 본질을 알 수 있다.

-남녀라는 양극성은 대인 관계에서 창조의 기초이기도 하다. 이 점은 생물학적으로는 정자와 난자의 결합이 어린아이 탄생의 기초라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나 순수하게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남녀 사이의 사랑을 통해 남겨는 각기 재탄생하는 것이다. (동성애적 일탈은 이 양극화된 결합의 성취에 실패한 것이고 따라서 동성애자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분리, 곧 이러한 실패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는 사랑할 줄 모르는 이성애자에게도 공통된다.)

=생물학적 합일이 발생하지 않으므로?

-‘성적 기능과 마찬가지로 성격에도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있다. 남성적 성격은 침투, 지도, 활동, 훈련, 모험이라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정의된다. 여성적 성격은 생산적인 수용성, 보호, 현실주의, 인내력, 어머니다움으로 정의된다. (각 개인에게는 두 성격이 혼합되어 있으나 남성또는 여성의 성과 관련된 것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빠져나가기 위한 밑밥인 것인가

-여덞 살 반부터 열 살 이전의 대부분의 아동들에게는 문제는 거의 예외 없이 사랑받는’-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문제이다. 이 연령까지의 아동은 아직 사랑할 줄 모른다. 사랑받는 경우 기쁘고 즐겁게 반응할 뿐이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른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조건적 사랑은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 가운데 하나다. 한편 어떤 장점 때문에, 다시 말하면 사랑 받을 만해서 사랑받는 경우, 언제나 의심이 남는다. 내가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언제나 남아 있다. 언제나 사랑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상으로 주어지는사랑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상대를 즐겁게 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분석해보면 사랑받는 게 아니라 이용당하고 있다는 쓰라린 감정을 쉽게 일으킨다.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믿고 있다. 사실상 그들은 심지어 그들의 사랑을 받는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사랑의 강렬함을 입증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동일한 오류다.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지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는 것만이 필요하며, 그렇게 되면 그 밖의 일은 모두 저절로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태도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면서도 기술은 배우지 않고, 올바른 대상만을 고르면서 대상만 찾아내면 아름답게 그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태도에 비유할 수 있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라나는 어린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곧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은 아마도 가장 달성하기 어려운 사랑의 형태일 것이며

-형제애는 동등한 자들 사이의 사랑이고 모성애는 무력한 자에 대한 사랑이다.

-성애는 완전한 융합, 곧 다른 한 사람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성애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며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성애는 아마도 현존하는 사랑의 형태 중 가장 기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성적매력은 순간적으로 합일의 환상을 일으키지만 사랑이 없는 한, 이러한 합일은 낯선 사람들을 이전과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져 있게 한다. 때로는 이러한 합일은 서로 부끄러워하게 하거나 심지어 서로 미워하게 만든다. 환상이 사라질 때 그들은 이전보다도 더욱 뚜렷하게 격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성애에는, 형제애와 모성에에는 없는 독점욕이 있다. 성애의 이러한 배타적 성격은 좀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흔히 성애의 독점욕은 소유적 애착으로 오해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서로 사랑하고있는 두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사랑은 사실은 두 사람 사이의 이기주의다. 그들은 서로를 동일시하는 두 사람이고 그들은 단일한 개인을 둘로 확대함으로써 분리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들은 고독의 극복을 경험하지만, 그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는 분리되어 있으므로 여전히 서로 분리된 채로 있고 그들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나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인간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나 자신을 제외하는 이론은 그 자체에 본질적인 모순이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에 표현된 사상은 자기 자신의 통합성과 특이성에 대한 존경이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이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자신의 자아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칸트

-순수한 사랑은 누군가에 의해 야기된다는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의 성장과 행복에 대한 능동적 갈망이며, 이 갈망은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근원이 있다.

-이기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배려의 결여-이것은 그의 생산성의 결여에 대한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를 공허하게 만들고 좌절시킨다. 그는 필연적으로 불행하며 생활에서 만족을 얻기 위해 초조해하지만 스스로 이 만족의 달성을 가로막고 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진정한 자아를 돌보는 데 실패한 것을 은폐하고 보상을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분석적 연구에 따르면, 그의 비이기주의는 그의 다른 증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가운데 하나이며 사실은 가장 중요한 증상일 때가 흔하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능력이나 즐기는 능력이 마비되어 있고, 그는 삶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비이기주의라는 표면 뒤에는 미묘하지만 매우 강렬한 자기 본위가 숨어 있다. 그의 비이기주의가 다른 증상과 함께 증상으로 해석되어서 그의 비이기주의와 다른 고통의 근원인 생산성의 결여가 고쳐질 때에만 이 사람은 치유될 수 있다.

-아이들은 덕이라는 가면 아래서 삶에 대한 혐오를 배운다.

=뭐든지 골고루가 좋은건가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좇같은 꼰대-객관적으로 사람을 비교하는 방법

-분리의 체험과, 여기서 생기는 분리 상태의 불안을 합일의 경험에 의해 극복하려는 욕구가 사랑에 대한 우리의 욕구의 기반

-인간이 더는 자연의 선물-인간이 찾아낸 과일과 인간이 죽인 동물-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었을 때, 인간은 손수 만들어낸 것을 신으로 바꿔놓는다. 이것은 점토, , 은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단계이다.

-부계 사회는 사유재산의 발달과 병행한다.

=모게사상을 짓밟은 게 아니고?

-신은 이름을 가질 수 없다. 이름은 언제나 한 사물 또는 한 사람, 요컨대 유한한 것을 나타낸다. 신이 사람이 아니고 사물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름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만일 그가 일신론적 관념의 본질에 따른다면, 어떠한 일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고 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어린아이가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듯, 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는 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어서 겸손하다. 그에게 신은 인간 진화의 초기 단계에서 인간이 갈망하던 모든 것, 곧 정신세계의 영역을 나타내는 상징이고 사랑과 진리와 정의의 상징이다. 그는 이 대표하고 있는 원리를 믿는다. 그는 진리를 생각하고, 사랑과 정의에 따라 살고, 그의 인간적 힘-중요한 유일한 실재로서의 궁극적 관심의 유일한 대상으로서의 힘-을 더욱 충분하게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에만, 그의 전 생애는 보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그는 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그의 이름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을 사랑하는 것은, 만일 그가 계속 해서 이 말을 사용해야 한다면, 사랑할 줄 아는 충분한 능력의 획득, 신이 스스로 그의 편이 되어주는 일의 실현을 갈망하는 것이리라.

-올바른 사고가 궁극적 진리도, 구제에 이르는 길도 아니라면, 사고를 통해 다른 공식에 도달한 다른 사람들과 싸울 까닭은 없다. 이러한 관용은 어둠 속에서 코끼리에 대해 말하라는 요구를 받은 몇 사람의 이야기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한사람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보고 이 짐승은 수도관 같다고 말했다. 또 한 사람은 코끼리의 귀를 만져보고 이 짐승은 부채같다고 말했다. 세 번째 사람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져보고 이 짐승은 기둥 같다고 설명했다.

-인격과 기술은 현재의 시장 조건에서 수요가 없으면 교환 가치를 갖기 못한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사서 그의 자본이 가장 유익한 투자가 되게끔 일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 노동자는 굶어죽지 않으려면 현재의 시장 조건에 따라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이런 경제적 구조는 가치의 위계질서에 반영된다. 자본은 노동력을 지배한다. 생명이 없는 축적된 물품이 살아 있는 인간의 힘, 곧 노동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는 것이다.

-주도권은 좋든 나쁘든 자본의 분야에서나 노동의 분야에서나 개인으로부터 조직으로 옮겨졌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독립성을 잃고 거대한 경제적 제국의 관리자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본의 집중화로부터 생기는 또 하나의 결정적 형태,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은 노동의 조직화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방법에 있다. 노동이 철저하게 분업화되고 광범하게 집중화된 기업에서 노동은 조직화되고 개인은 개성을 잃고 소모적인 기계의 톱니바퀴가 된다. 근대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근대 자본주의는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위나 원리, 또는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즐거이 명령에 따르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마찰 없이 사회 기구에 순응하는 사람들, 폭력 없이 관리되고 지도자 없이 인도되고 목적 없이-좋은 것을 만들어내고 계속 움직이고 기능을 다하고 곧바로 나간다는 목적 이외에는-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현재인은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상품으로 변하고 현재의 시장 조건 아래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투자로써 자신의 생명력을 경험한다. 인간 관계는 근본적으로 소외된 자동 기계같은 관계가 되고, 각자는 군중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따라서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에서 각자의 차이가 없다. 모든 사람이 되도록 타인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아주 고독하며, 분리 상태가 극복되지 못했을 때 필연적 결과로 생기는 깊은 확실성과 불안, 죄책감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 문화는 사람들이 이러한 고독을 의식하고 깨닫지 않게끔 도와주는 여러 가지 완화제를 제공한다. 우선 제도화된 기계적 작업의 엄밀한 규격화,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곧 초월과 합일에 대한 갈망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노동의 규격화만으로는 이러한 일에 성공하지 못하므로, 인간은 오락의 규격화에 의해, 곧 오락산업에 의해 제공되는 음향이나 구경거리를 수동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더 나아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사고 이것을 곧 다른 것과 교환하는 데 만족함으로써 자신의 의식되지 않는 절망을 극복한다. 현대인은 사실상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그려놓은 상에 가깝다. 곧 잘먹고 잘 입고 성적으로도 만족하지만 자아가 없고 가장 피상적인 접촉을 제외하고는 동료들과 어떠한 접촉도 없는, 헉슬리가 다음과 같은 말로 간결하게 표현한 슬로건에 의해 지도되고 있다. “개인이 감정을 가질 때, 공동체는 비틀거린다.” 또는 오늘 즐길 수 있는 일을 내일로 연기하지 말라.” 또는 절정에 달한 선언이지만 오늘날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기는 데있다. 즐긴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소비를 말하고 상품, 구경거리, 음식, , 담배, 사람들, 강의, , 영화 등을 입수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소비되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세계는 우리의 식욕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대상으로서 커다란 사과, 커다란 병, 커다란 유방이 된다. 우리는 젖을 빠는 자이고, 영원히 기대하는 자이고, 희망에 가득찬 자이다-그리고 영원히 실망하는 자이다. 우리의 성격은 교환하고 받아들이고 싸게 팔아버리고 소비하는 데 적합하다. 모든 것은,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된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러한 개념에서 중요한 강조점은 참아낼 수 없는 고독감으로부터 피난처를 찾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에서 마침내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안식처를 찾아낸다. 사람들은 세계에 대항하는 두 사람 사이의 동맹을 형성하고, ‘두 사람만의이기주의는 사랑과 친밀감으로 오해된다.

-여자의 불감증과 남자의 다소간 심각한 심인성 불능증

=불감과 불능의 거리감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상호 성적 만족으로서의 사랑과, ‘팀워크로서 고독으로부터 피난처로서의 사랑은 현대 서양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 사회적으로 유형화된 사랑의 병리학의 두 가지 표준적형태다.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근본적인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에센스 차원에서 경험하는 것이요, 각자가 자신들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 합일되는 것이다.

-사실상 중세 문화와 같은 종교적 문화에서는 평범한 사람은 역시 신을, 도움을 주는 아버지요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 생활의 최고 목표를 신의 원칙에 따라 사는 것으로, ‘구원을 다른 모든 활동이 종속하는 최고의 관심으로 삼았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그는 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날 이러한 노력은 전혀 없다. 매일의 생활은 어떤 종교적 가치에서도 엄격하게 단절되어 있다. 매일의 생활은 물질적 안락에 대한 갈망, 퍼스낼리티 시장에서 성골하려는 갈망에 바쳐지고 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퍼스낼리티 시장에서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고려하여 최고의 이익을 올려야 할 투자로서 경험하고 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동료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현대인의 주요 목표는 자신의 기술, 지식 그리고 자기 자신, 인격의 패키지 상품을 다른 사람-역시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과 공정하고 유익하게 교환하는 것이다. 인생에는 다른 게 없다. 오직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표, 공정한 교환이라는 원칙, 소비한다는 만족만 있을 뿐이다.

-훈련 : 우리는 가장 훈련된 방식으로 엄격하게 규격화된 일을 하면서 하루에 여덟시간씩 보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 현대인은 일을 떠나서는 자기훈련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은 일하지 않을 때에는 게을리 지내거나 빈둥거리고 싶어하며, 더 좋은 말을 쓴다면 긴장을 풀고싶어한다. 게으름을 피우려는 이러한 소망은 주로 생활의 규격화에 대한 반발이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목적을 위해, 자기 나름의 것이 아니라 일의 리듬에 의해 그에게 지시된 방식으로 어쩔 수 없이 하루에 여덟 시간씩 자기의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반항하며, 그의 반항은 유아적 자기방종의 형태를 위한다. 덧붙여서 권위주의에 맞서는 싸움에서 현대인은 모든 훈련을-스스로 부과한 합리적 훈련과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권위에 강요된 훈련도-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이 없으면, 생활은 파괴되고 혼란을 일으키고 중심을 잃게 된다.

-정신집중

-인내

-최고의 관심

-사랑의 기술에 대해서 이 말은, 이 기술 분야에서 명장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삶의 모든 국면을 통해 훈련, 정신집중, 인내를 실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설된 상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 객관적이라는 것, 곧 자신의 이성읋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었을 때, 어린아이로서 꿈꾸고 있던 전지전능의 꿈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사랑의 능력은 성장하는, 곧 세계와 자신에 대한 관계에서 생산적인 지향을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탈피, 탄생, 각성의 이러한 과정은 필수적 조건으로서 한가지 성질, 신앙을 요구한다.

-사고와 판단은 합리적 신앙이 나타나는 유일한 경험 영역은 아니다. 인간관계의 영역에서도 신앙은 의의 있는 우정이나 사랑에 불가결한 성질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그의 기본적 태도의 불변성, 그의 퍼스낼리티 핵심의 불변성, 그가 가진 사랑의 불변성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어떤 사람이 의견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본적 동기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그의 상명과 인간의 존엄성 존중은 자기 자신의 일부로서 변화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신앙을 갖고 있다. 우리는 변화할 수 없고 여러 가지 환경에도 불구하고, 또한 의견과 감정의 변화와 관계없이 생애를 통해서 지속하는 자아, 곧 우리의 퍼스낼리티의 핵심의 존재를 알고 있다. ‘라는 말의 배후에 있는 실재는 바로 이러한 핵심이며 우리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확신은 이러한 실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아의 지속성에 대해 신앙을 갖지 못하면 동일성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위협받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며, 이때에는 다른 사람의 찬성이 동일성에 대한 우리 감정의 기초가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만이 미래에도 오늘과 같을 것이며, 따라서 그는 지금 기대하는 바와 같이 느끼고 행동할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의 조건이고, 니체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에 의해 규정될 수 있으므로, 신앙은 인간 실존의 한 조건이다. 사랑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 곧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능력과 그 신뢰성에 대한 신앙이다.

=신앙믿음

-교육은 아동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도와준다.

=신앙

-신앙을 가지려면, ‘용기’, 곧 위험을 무릎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조차도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 생활의 일차적 조건으로서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는 자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격리와 소유를 자신의 안전책으로 삼는 방어 기구에 칩거하는 자는 누구든 자기 자신을 죄수로 만들게 된다. 사랑받고 사랑하려면 용기, 곧 어떤 가치를 궁극적 관심으로 판단하는-그리고 이러한 가치로 도약하고 이러한 가치에 모든 것을 거는 용기가 필요하다.

-활동 : 활동은 사랑의 실천에 대해 기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활동이라는 말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활동, 곧 자신의 힘의 생산적 이용을 나타낸다고 말하였다.

-사랑과 정상적생활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대답은 추상적 의미에서만 올바르다고 나는 확신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 원칙과 사랑의 원칙은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본 현대 사회는 복잡한 현상이다.

-따라서 사랑을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 대답으로 보고, 사랑에 진지한 관심을 tkwrh 있는 사람들은 사랑을 매우 개인주의적인 주변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구조에 중요하고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변화의 방향은, 이 책의 범위 내에서는, 오직 암시될 수 있을 뿐이다.

=, 존나 개소리. 뭐 끝이 이따구야.

=그래도 현대에서는 억압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다. 라는 쓸쓸한 결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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