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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유탄사고로 생각난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게시물ID : freeboard_16442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포포로02
추천 : 3
조회수 : 120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10/12 18: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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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철원 사격장 유탄사고와 오늘 있었던 화성시 공장 사격장 유탄사고 기사를 보고 그냥 갑자기 드는 생각이다. 

지지난주가 개구리소년의 유해가 와룡산에서 발견된지 15주기였다. 여전히 범인은 오리무중이고 시효도 지나 영구미제사건으로 남았다. 

당시에는 간첩설, 유괴설, UFO증발설, 동사설 등의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했었고, 그중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추측이 바로 인근 부대인 50사단의 사격장의 유탄설이었다. 

시신도 못찾는 상황에서는 부검도 할 수 없었고 인근 50사단은 실종당일에는 사격훈련이 없었다는 훈련일지를 제시해 사격장 유탄설은 사그라 들었었다.

그러다 2002년 사건발생 11년만에 실종되었던 다섯 아이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헌데 그 발견된 경위가 흥미롭다. 

아래는 지난 9월 27일자 사건 15주기를 조명한 동아일보의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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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가 등산객에 의해 발견되기 하루 전인 9월 25일 오후 6시쯤 한 신문사에 4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대구 와룡산에 가면 개구리소년 5명의 유해가 묻혀 있다. 큰 무덤 같은 흔적을 파보면 5명의 유해가 그대로 다 나올 것”이라는 내용의 제보전화가 걸려왔다는 점도 의문점이다.

가장 특이한 점은 개구리 소년의 유골 근처에서 10여 개의 탄두(彈頭)가 발견된 것이다. 인근에는 군부대 사격장이 있었다. 이에 소년들이 도롱뇽을 잡으러 간 게 아니라 탄두를 주우러 갔을 가능성과 함께 총기 오발사고에 대한 의심도 흘러나왔다. 그러자 군부대는 유탄과 피탄이 실종 사건 이전 부터 수십 년간 쌓인 것이며 실종당일 사격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미군이 사격 훈련을 진행했을 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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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보면 한 신문사에 40대 중반의 남자가 유해가 묻혀있다는 제보를 한다. 해당 신문사는 국민일보사다. 당시 2002년 9월 30일자의 기사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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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소년 사망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30일 “소년들이 총으로 살해됐다”는 제보를 접수하고 총기에 의한 피살 가능성에 대해 본격 수사를 벌이고 있다.

이 사건 수사본부(본부장 조선호 대구경찰청 차장)는 구두닦이 일을 했던 한모씨(43·대구 달서구)가 지난 28일 대구경찰청에 “지난 7월에 30∼35세의 남자 1명이 구두를 닦으면서 ‘군생활 당시 어린이 5명을 총으로 쏴 죽였다’는 말을 했다”는 제보를 해왔다고 30일 밝혔다.

경찰은 한씨가 “이 남자가 사격 중 5명의 소년이 갑자기 나타나 2명이 총에 맞아 이중 1명이 숨지고 1명은 다쳤으며,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5명 모두를 다른 곳으로 옮겨 목을 조르고 총을 난사해 죽인 뒤 매장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전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12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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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제보에 대해 군부대 측은 사격도 실시되지 않았으며 사격훈련은 여러 간부와 10~20명의 병사들이 단체로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아무도 모르게 은폐할 수 있겠냐고 항변한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수많은 군 의문사가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본다면 해당 군부대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해당 사격장은 사건이 발생한 1991년을 넘긴 직후 폐쇄된다.  

뇌피셜인 내생각은 이렇다. 

5명의 아이들이 도룡룡알을 찾으러 나간다고 했지만 인근 사격장의 사격소리를 듣고 구경하기 위해 사격장 근처에 접근했다.

당시 사격장은 50사단 예하부대의 사격, 또는 미군의 사격훈련도 빈번히 이루어졌다.

50사단 예하부대든 미군이든 사격훈련 시 발생한 도비탄 또는 유탄으로 사격훈련을 단순 호기심에 구경하기 위해 접근했던 아이들 중 한 명이 피격된다. 

이를 훈련부대 책임자가 인지하고 해서는 안될 판단을 한다. 바로 입막음이다.

누군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아이들을 희생시킨다. 

너무 과한 판단이라고 생각되지만 미군이든 우리군이든 피격사건이 발생할 경우 그 후폭풍은 어마어마하다. 폐쇄적인 군부대라면 입단속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 누구도 관리자로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공범이기 때문이다. 진급이 막히거나 부대가 폭파되거나 감옥에 가거나하는 눈앞의 피해를 회피할 수 있다면 순간적인 판단으로 충분히 하고도 남을 수 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초등 6학년까지 충분히 활동력이 있는 아이들을 사이코패스를 자처하는 성인 한명이 몰살시키고 큰 구덩이를 파서 유기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말끔하게 유해를 처리하기도 쉽지 않다. 시체가 쉽게 발견되지 않도록 깊은 구덩이 속에 아이들이 넣고 그 아이들위에 큰 돌덩이까지 포개어 놓고 다시 흙을 덮어둘 만큼 주도면밀하다. 

큰 돌덩이가 아이들 위에 포개어져 있으니 유해를 찾는 경찰이나 군병력이 운좋게 삽으로 해당 부분을 탐지하더라고 돌덩이가 걸리니 암반지면으로 인지하고 수색대상에서 제외한다. 

때문에 큰 돌덩이는 중요한 사건의 포인트다. 일반적인 수준의 암매장이라면 굳이 큰 돌덩이를 중간에 끼워둘 필요성을 인지하기도 쉽지 않고 번거로울뿐이기에 실행하지도 않는다. 충분히 깊은 구덩이를 파는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통사람의 사고수준이다. 

하지만 산간에서의 암매장 수색의 프로세스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깊이 묻고 단단히 다져도 한 번 파내서 다시 메운 흙은 연하다. 근시일 내에 수색이 이루어진다면 수색용 삽이나 탐지봉이 쑥쑥 들어갈 수 밖에 없다. 해결책은 중간에 배리어를 만드는 것이고 그 역할이 유해 발굴 당시 나왔던 시체 위에 있는 돌덩이다. 어떻게 수색이 이루어지는 지 아는 사람이라는 설명이 되고, 그런 수색을 실행하고 방식을 인지하고 있는 것은 군인과 경찰이다.

참고로 당시 발생 직후 이루어진 대대적인 와룡산 일대 수색에는 해당 50사단의 군부대 인원이 대량 투입되어 실행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유해는 물론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해당 부대가 수색에 참여했으니 암매장 지역을 수색에서 제외시키거나 등의 행위를 통해 고의적으로 누락시킬 수 있는 개연성도 충분한 셈이다.   

결론은 이렇다. 

20년이 넘도록 입소문 하나 나지 않을 만큼의 기밀유지를 위한 폐쇄성, 5명에 이르는 성장한 어린이를 한 번에 제압하고, 여러 사람의 작업으로 유추되는 깊은 구덩이로의 암재장과 사체위에 발견을 늦추고 감축기 위한 돌덩이를 배치하는 전문성까지 유추할 수 있는 범인의 유형은 군조직으로 귀결된다.

당시에는 유탄과 도비탄의 가능성은 다수 제기되었지만 사격장의 지형과 훈련일지 등을 근거로 사건 초반 철저하게 배제된다. 철원 총기사건도 발생초기 그 누구도 사격장의 지형구조상 유탄의 가능성을 높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 실험으로 단 2도의 각도 상승으로 피격될 수 있음이 확인되었고, 이 사건은 그동안 내 머리속에 잠자고 있던 25년전 사건을 끄집어 내고 말았다.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냥 철원 유탄과 오늘 또 화성시 공장으로 날아든 탄두 기사를 보고 생각이 나서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일기처럼 여기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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