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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딸 할 수 있는 진지한 팁
게시물ID : freeboard_16539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진심정도
추천 : 0
조회수 : 132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10/30 19: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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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요약: 상상하지 마시라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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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가지되 그 욕망에 대한 사념은 가지지 마라.

욕망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이고 절대로 없앨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없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에 대한 사념을 가질 때 우리는 욕망 자체가 되어버린다.

감정에 상상력을 발휘할 때 우리는 감정 자체로서의 행위자가 되어버린다.


악마는 우리들의 사념속, 상상속에 살아간다.

감정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어떠한 사념도,

어떠한 상상도 가지지 않을 때 우리는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사념은 상상이며, 상상은 허상이며, 허상은 거짓이다.

사념은 본질을 왜곡시킨다.


여기에 가장 간단한 예를 들자면 단순히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성욕과 죽음이다.

누구나 성욕과 죽음에 대한 사념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성욕과 죽음에 대한 환상을 가진다.


그러나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성욕과 죽음에 대한 사념과 상상이

성욕과 죽음의 본질은 아니다.


자위하는 사람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과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상황 속에 자신을 함몰시킨다. 상상함으로써 본질을 왜곡시키고 존재하지 않는 환상속에서 작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욕의 본질이 아니다.

생명력으로 충만하여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성스러운 신비의 불꽃, 진실함으로 하나되어 사랑과 애정으로 조화되려는 순결한 의지, 원천적인 조화에 대한 갈망으로 고귀한 새 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위대한 에너지의 피어오름, 이것이 바로 성욕의 본질이다.


그러나 그는 사념과 상상속에 빠져 성욕의 본질을 왜곡시킨다.

그럼으로써 변태가 되어간다. 자위로 단련된 상상력은 실제의 파트너와 진실로 합일되는 것을 방해한다. 처음 자위할 때 상상속의 파트너는 그 또는 그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파트너와 원만한 합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상상속의 대상을 파트너에게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파트너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본질이 왜곡된 것은 거짓이다. 

진실하지 못한 것은 반드시 부숴진다.



죽음, 죽음도 또한 성욕의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대의 사념이고 상상이다.

누구나 죽음에 대한 환상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이 죽음의 본질은 아니다.

기독교인은 천국을, 불교인은 극락왕생을, 무신론자는 완전한 종말을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죽음의 본질인가?

아니다. 죽음의 결과가 그렇게 다 다르다면 우리는 죽어서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끝내 불행해진다.


죽음은 본질 그 이외의 것이 아니다.

삶의 본질이 곧 죽음이다. 존재의 형태는 별개의 문제일 뿐, 존재함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사념을 가질 때 죽음의 본질은 왜곡되고 자신의 존재형태는 자의적으로 결정지어진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고 무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한다. 환상한다. 종교라는 사업이 번창한다. 그럼으로써 죽음의 본질은 더욱 굳건하게 왜곡된다. 


본질이 왜곡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으므로 죽음에 대한 대단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죽음에 대한한 모두 변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본질은 변하거나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아무런 사념도, 아무런 상상도 가지지 마라. 



<유식으로 읽는 반야심경>의 저자인 -요코야마 코이츠-는 '마음속에 미운 감정이 없으면 미운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역설하지만 나는 '그 미운 감정이 실제 그 사람의 본질이 될 수 있는가'를 묻고 싶다.

미운 감정은 어쨋거나 없앨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의 본질이 될 수 있는가? 


나의 원수는 누군가의 은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이다.

본질은 변하거나 인위적인 조작이 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곧 진리이며, 진리의 세계에서는 '나'라던가 '원수'라던가 '누군가'라던가 '은인'이라는 것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나'와 '원수', '누군가'와 '은인'은 따로 분리되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이며 그것이 진리이다.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초월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서 어떠한 일도 용서할 수 있는 강력한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우리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용서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는 깨달은 자이고 초월자이며 살아있는 성자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우리의 부모들에게서 쉽게 보곤한다. 극단적인 예는 자신을 죽이려고한 자식을 감싸는 부모의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천륜이라는 울타리를 초월하는 것이다.

본질에 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에 무지하고

그것을 왜곡함으로써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


욕망과 감정에 대하여 사념을 갖지 마라. 상상하지 마라. 오로지 본질을 현현시켜 현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라. 그것이 바로 초월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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