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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육지의 방향
게시물ID : panic_960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묻어가자
추천 : 11
조회수 : 1774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7/11/02 05:5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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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력을 너무 믿은 탓인가. 육지가 보이지 않는다.
 
 
 
 분명 멀리 나오지는 않았는데 정말 이상하다. 육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말도 안 돼.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그렇게 멍하게 되뇌었다. 해수욕장의 경계를 살짝 넘었을 뿐이다. 내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걸까? 어째서... 어째서... 혹시라도 내가 의식을 잃고 표류한 게 아닐까. 지금은 해가 머리 위에 떠있는 정오다. 바다에 들어온 시간도 분명 정오였다. 그렇다면 의식을 잃은 건 아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육지가 없다. 육지가 없어. 말도 안 돼. 무섭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바닷물은 차다. 몸이 급격히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손발이 떨려서 떠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게 수영 국가대표 선수의 꼴이라니. 자기 경멸적인 감정이 일었으나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움직여야 하나? 아니면 가만히 있을까? 파도는 어디로 향하지? 가만히 있으면 육지 쪽으로 가지 않을까? 아니, 아니야. 만약 그랬다면 육지에서 멀어지지 않았겠지.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육지가 어느 방향인지 모르겠어. 육지가 어느 방향인지 모르겠다고. 어디, 어디, 어디로…….
 잠깐만. 난 지금 너무 당황하고 있어. 침착하자 침착해. 침착하면 분명히 살 수 있어. 지금 나는 혼란에 빠진 것뿐이야. 시간은 별로 지나지 않았어. 육지는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해양구조대가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몰라. 침착해. 지금은 침착해야 할 때야. 일단 육지의 방향을 모르니까 조금만 가만히 있어보자. 괜히 먼 곳으로 헤엄을 쳤다가는 진짜 좆되고 말 거야. 좆 되고 말 거라고. 아니, 좋은 단어를 쓰자. 좋은 단어... 좋은 단어... 구출. 구원. 회생. 수영 국가대표 선수 구조되다. 애인과 함께 해수욕장에 놀러왔다가 그만 방향감각을 상실한 게 원인... 이런 뉴스가 나오겠지. 뉴스 댓글에는 비웃음이 달릴 거고 말야. 아, 맙소사. 안 돼. 좋은 생각을 하자. 난 지금 너무 부정적이야. 난 국가대표 선수야. 난 최고라고. 나는 1500m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어.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그래. 난 구출될 거야. 육지로 돌아가고 말 거라고. 모든 게 잘 풀릴 거야. 지금은 정신적으로 힘든 게 가장 큰 문제야. 이대로 가다간 내가 나를 죽이고 말 거야. 힘을 빼고 파도에 몸을 맡기자. 요람처럼 내 몸이 흔들리고 있어. 잠깐만 생각을 하지 말자. 후... 정오의 햇볕이 따뜻하다. 그래, 다 잘 될 거야. 여긴 따뜻한 곳이야. 이 바다는 따뜻해. 나를 다시 육지로 돌려보내줄 거야. 조금만 이렇게 있자. 조금만...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태양은 아까보다 약간 기울어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으려나. 아무도 날 찾고 있지 않는 것일까. 지금쯤 난리가 났을 텐데. 구조대가 벌써 근처를 수색해야 하는데 어찌된 일이지? 난 국가대표라고. 이상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아, 망할. 꺼내 줘. 여기서 꺼내 달라고!! 씨발. 씨발. ……흐. 흐흑... 살려줘... 살려주세요... 흑... 흐흐흑... 눈물이 난다. 맙소사, 맙소사. 아 나는 망했어.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고. 난 죽게 될 거야. 죽기 싫어. 죽기 싫단 말이야. 크흐... 흑흑... 죽기 싫어... 이렇게 죽기는 싫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내가 최고라는 걸 증명하려고 그렇게 수영만 하고 살아왔는데. 이렇게 바다에 빠져 죽는다고? 이제 인생을 즐기려는데? 싫어. 난 안 죽어. 절대 안 죽어. 난 살아 남을 거야. 잠깐. 지금 해가 어디로 기울었지?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 그렇다면 해가 넘어가는 방향이 서쪽이야. 그리고 이 해수욕장은 동해안에 있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육지는 서쪽에 있는 거야! 나는 지금 동해안의 어디에서 표류하고 있는 거고. 그러니까 서쪽으로 헤엄을 치자. 해가 지는 방향으로 가자. 그럼 육지가 나올 거야. 육지. 육지!! 이제 방향을 알아. 어디로 가야 할지 안다고. 좋아 살 수 있어. 나는 산다. 산다. 산다. 산다. 산다. 산다. 산다. 헤엄을 치자. 꾸준하게 헤엄을 치자.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말이야. 수없이 연습한 동작대로 움직이자. 숨을 쉬자. 몸을 움직이자. 그러지 않으면 난 가라앉고 말아. 숨을 쉬자. 숨을, 숨을.
 
 그렇게 난 계속 움직였다. 해를 따라서, 해를 따라가면 육지가 나오리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계속 헤엄쳤다. 해는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아, 석양이다. 석양이 보일 정도면 최소한 4시간은 헤엄을 쳤다는 얘기인데 아직도 육지에 닿지 않았다고? 아무리 못해도 십 킬로미터 이상을 헤엄쳤을 텐데? 이상해. 육지가 안 보여. 망할. 망할... 망할... 또 울음이 나오려고 한다. 안 돼. 아직 울지 마. 무너지지 마. 육지가 나올 거야. 육지의 방향은 여기가 맞아. 해는 서쪽으로 진다고. 희영이가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난 돌아간다. 살아서 간다. 내가 살아 돌아가면 대서 특필이 되겠지. 수영 국가대표 선수 6시간 넘게 수영을 해서 살아돌아오다. CNN에도 나오지 않을까. 이런 일이 잘 없잖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거라고. 안전장비를 동원해서 장시간 수영을 한 사람은 있지만 나는 진짜 조난을 당한 거잖아. 유명해질 거야. 돌아가기만 하면. 육지로 가기만 하면. 그러면 난 더 유명해지는 거라고. 헤엄치자. 날 믿자. 믿자.
 
 난 아무 생각 없이 헤엄을 쳤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해가 진다. 망할. 망할................ 어두워진다. 하늘이 붉은 색에서 검은 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바다가 차가워진다. 춥다. 계속 헤엄쳐서 숨이 가쁘다. 물이 마시고 싶다. 이렇게 물이 많은데 마실 물이 없다니. 조금만 마실까? 소금이 조금 있긴 하지만 약간 정도는 마실 수 있잖아. 어차피 음식에도 소금이 들어가고 말야. 조금만 마셔보자. 조금만... 아니야 참자. 아냐 못 참겠어. 아니 참자. 젠장. 여기는 온통 물이잖아. 여기는 바다라고. 바다인데 물을 못 마신다는 게 말이 돼? 말이 안 되잖아. 여긴 바다야. 바다라고... 아 맙소사. 조금만 참자. 참을 수 있어. 정말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그때 바닷물을 마시자. 지금은 헤엄을 치자. 아직은 움직일 수 있어. 근데 이 방향이 맞는 건가?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여. 어떻게 하지. 파도 소리만 들려. 빛은 한 점 없고 소리만 가득하다고. 입 안은 바짝 마르는데 마실 물은 없어. 죽게 되는 건가. 희영아. 아, 희영아. 희영아. 희영아. 희영아 살려줘. 나 좀 살려줘. 거기 있으면 소리 좀 쳐줘. 육지가 어디있는지 좀 알려줘. 젠장 왜 이렇게 된 거지? 일이 어째서 이렇게 된 거야? 해수욕장으로 오지 말걸. 아니 수영선수가 되지 말걸. 그랬으면 멀리 나가지도 않았을 텐데.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차라리 희영이를 만나지 말걸. 국가대표가 돼서 성공한다고, 그래서 널 지켜준다고, 괜히 그런 말을 해버려서, 동기 부여가 돼버려서……. 아, 난 틀려먹었어. 무너졌다. 이제 죽는다. 물이나 마시자. 물... 물... 나는 바닷물을 마셨다. 짜다. 젠장 죽는 마당에 무슨 상관이야. 마시자. 짠맛이지만 갈증은 좀 가시는 것 같다. 그래 됐어. 포기하자. 나는 헤엄치기를 멈췄다. 그러고는 바다에 누웠다. 온 몸에 힘이 없다. 이대로 죽겠지. 편하게 있자. 편하게 죽는 거야. 나는 그렇게 한동안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빨리 죽지는 않았다. 근데 갑자기 갈증이 몰려왔다. 극심한 갈증이었다. 아까 바닷물을 마시지 말걸. 이런 거였나. 이래서 바닷물을 마시면 안 되는 거구나. 너무 목이 마르다. 또 바닷물을 마시고 싶다. 하지만 마시면 안 돼. 더 목이 마를 거야. 더 괴로울 거야. 아냐. 어차피 죽을 운명인데 무슨 상관이야. 마시자. 너무 목이 마르다. 나는 거의 무의식 상태로 바닷물을 꿀꺽거리며 마셨다. 조금 낫다. 이제 잠시 후면 또 갈증이 몰려오겠지. 그 전에 죽을 수 있을까. 젠장 무슨 상관이야. 이젠 생각하는 것도 힘이 빠진다. 생각도 하지 말자.
 
 ……. 나는 목이 마를 때마다 바닷물을 마셨다. 배가 부르다. 배가 볼록하다. 이제는 물을 더 마시지도 못할 것 같다. 근데도 목이 마르다. 속이 안 좋다. 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토할 것만 같다. 결국 나는 토했다. 위산과 함께 바닷물이 쏟아져 나왔다. 속은 조금 괜찮아졌다. 하지만 갈증이 너무 심했다. 괴롭다. 이게 다 잘못된 방향으로 헤엄쳐 온 탓인가. 육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혹시 육지가 사라진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난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고 있는 거잖아. 그래 육지가 사라진 거야. 그래서 육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어버린 거야. 나만 살아 남은 거지. 그냥 갑자기 그렇게 돼버린 거야. 희영이도 죽었을까? 아마. 아마 죽었겠지. 육지로 가는 방향따위는 사라진 거야. 없어. 어디에도 없어. 이 우주 어디에도 육지로 가는 방향은 없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는 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것은 끝없는 절망이었다. 절망. 절망. 절망은 방향의 상실. 절망은 육지의 상실. 절망. 아! 그러나 그때였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 헬기 소리. 구조대인가? 구조대다. 헬기에서 불빛을 비추며 수색을 하고 있다. 여기요!! 여기 있어요!! 나는 다급히 헬기 쪽으로 수영을 했다. 그러나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잠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공포가 밀려왔다. 숨 쉬어. 몸을 움직여. 움직이기만 하면 돼. 그냥 움직이기만 하면, 그러면 난 살 수 있어. 헬기가 근처로 다가오고 있다. 살려! 살려줘!! 사람 살려!!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가라앉았다. 더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끝이다. 이제 파도소리는 없고 웅웅거리는 해저의 소리만 들린다. 나는 가라앉으면서 수면을 바라보았다. 헬기의 라이트가 이곳을 비추고 있다. 나를 발견한 걸까. 나는 의식을 잃었다.
 
 
 
 
 
 
 
 
 
 
 
 
 나는 잠에서 깨었다. 파도 소리가 들린다. 창문 너머에 해수욕장이 보인다. 여기는 하얀 침대가 있는 호텔방이다. 나는 잠깐 멍하니 있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찾아서 벌써 한 달이나 된 문자를 또 꺼내 봤다. "김희영 - 이제 그만하자. 앞으로 연락하지 마." 아침 7시였다. 전국 체전에 참가하려면 지금 준비해서 나가야 한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일단 씻고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러고는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사이 감독님에게 문자가 왔다. "일어났니? 너라면 오늘 충분히 1등을 할 수 있을 거야. 그 다음은 국가대표고 그리고 너가 꿈꾸던 아시아 신기록도 멀지 않아. 그런 여자애는 잊어라. 너라면 훨씬 좋은 여자도 만날 수 있어. 기운 좀 내고. 같이 파이팅하자." 나는 무표정하게 문자를 읽었다. 그러고는 땅이 꺼질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호텔을 나왔다. 경기장으로 출발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경기장이 아니라 해수욕장으로 걸어갔다. 바다에 가면. 바다를 헤엄치면. 그러면 육지의 방향을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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