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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첫사랑
게시물ID : wedlock_113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허니순살치킨
추천 : 5
조회수 : 211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11/29 03:47:04
주말에 남편과 애니 초속5센티를 보게되었다.(주의 : 스포있음)

애니의 완성도와는 전혀 별개로 우리 부부는 원래 폭풍수다를 떨면서 영화를 감상하곤 하는데
처음에는 벚꽃이 떨어지는 스피드가 초속5센티라고 해서 정말 그럴까 실험해보자고 결심했고
기차를 타고 아카리를 만나러 가는, 아마도 생애 첫 여행의 긴장감을 그린 부분에서 홀로 한 첫 여행이 언제인가 따위의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이 악의를 갖고 느리게 가는 장면에서는 너무 늦게 가서 아카리가 혹시 시체로 발견되는건 아닐까 싶어 불안해했다.

그리고 2편, 이어지는 3편. 아아 나쁜 아카리! 애니가 끝날때까지 우리는 신나게 아카리를 까고 있었다.
아카리 이 나쁜x! 벚꽃이 떨어지는 스피드 따위로 남자를 낚아서 아주 폐인을 만들어 놨구나. 잠수 이별이라니!
그리고 우리 부부는 함께 벚꽃이 떨어지는 스피드를 재보겠다고 줄자를 설치하고 벚꽃잎만한 종이 조각을 거실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결과 초속5센티조차 검증되지 않은 데이터였다. 1초라는 시간은 너무 길고, 5센티는 너무 짧다.

아카리 이 사기꾼!이라고 내가 외친 순간,
남편이 말했다. 
"어쩌겠어. 첫사랑인데"

흥. 
첫사랑만이 오롯이 특별하게 용서받을 수 있는 걸까.
날카로운 첫키스가 너무 날카로워서 어디 깊은 흔적이라도 남겨서?

애니메이션의 끝부분에 나오는 찾을리 없는 곳에서도 아직 널 찾고 있다는 내용의 노래를 틀어놓고 나는 그 특별하다는 남편의 첫사랑이 궁금해졌다.
난 애석하게도 첫사랑의 이름 석자만 기억날 뿐, 만나고 헤어진 것 외에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를 대라고 해도 한참 고민해야 할 정도로 하얗게 기억을 날려버렸는데 남편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마치 그곳은 성역이라는 듯이 남편의 입에서 <어쩌겠어. 첫사랑인데> 같은 대사가 나오고,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아마도)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남편의 옆얼굴이 무지막지 미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고문타임.
왜 첫사랑을 그리 애틋하게 기억하는지 파헤쳐 볼 시간이다.

"몇살때야?"
"스물한살인가?"
"첫사랑이 아니라 첫연애네"
"응 그렇지"
"아직 기억해?"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오래가는 것은 사실이야. 그래도 워낙 오래전이라 많이 드문드문하지"
"혹시 각인 같은건가? 알에서 깬 새들이 제일 처음에 본 존재를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남자가 되어 처음에 한 사랑의 상대를 잊지 못하는?"
"그럴수도 있지"
"사랑했던 나 자신, 그러니까 이제 막 남자가 된 나의 감정을 기억하는거야? 미숙했던 나 자신에 대한 애틋함 같은? 아니면 그때의 역시나 미숙했던 상대를 기억하는거야?"
"둘 다. 엄밀히 말하면 후회 같은 게 섞여서 아닐까? 왜 그거밖에 못했지.. 좀 더 사랑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내가 잘못해서 상처를 주고 말았구나..뭐 그런"
"사랑이 뭔지도,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사랑 운운하는 것이 스무살이지. 뒤돌아보니 그래도 사랑이었어?"
"응 그랬던 것 같아"
"그래도 말야... 왜 그게 상대방에 묶이지? 보통은 다음에는 그러지 말자만 기억하고 상대에 대해선 잊혀지지 않아?"
"그땐 다음을 생각하지 못했을걸. 마치 그게 끝인 것 같았어"

노래는 오래전에 끝났고 나는 소위 짜게 식었다.
눈치없는 남편은 조금 귀여움을 떨다가 잠이 들었고 나는 그토록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사실이 신경쓰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난 지배하고 싶은 것이다.
남편의 머리속까지 완전히. 내 허락을 받지 않은 생각을 아예 하지 않도록.
나는 모르는 남편의 스무살 시절을 함께한 남편의 아카리에 대한 생각을.. 아직도 가끔씩 나몰래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더니 기분이 나빠진 것이다.
첫사랑이라서가 아니라. 그 어떤 것이라도.
남편이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분리된 두 사람이라는 사실이, 남편이 내가 아닌 것이 불안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결국 내 마음만 다스리면 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너무 가까워서 내가 남편인지 남편이 나인지 구분하지 않고 지내게 될 때가 있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같은 장난을 치고 때론 어떤 상황에서 같은 문장을 내뱉기도 한다. 같은 사안에 대해 같은 판단을 하고 같은 사건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한다. 그렇게 익숙해져 있다가 갑자기 첫사랑 같은 주제로 남편과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면 불안해진다.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데 괜히 발버둥을 쳐보는 것이다. 자, 남의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다가 기분이 나빠졌으니 남의 마음을 다스리려는 내 마음만 포기시키면 내 기분은 나아질 것이다.

자고 일어나니 거짓말처럼 다음날은 남편의 첫사랑에 대한 생각이나 부글거리는 기분 나쁨 같은 것들이 사라져있었다.
남편이 퇴근하고 들어오면서 나를 아카리라고 부르기 전까지.

"내가 당신 첫사랑이 아닌데 왜 나한테 아카리라고 해?"
"눈은 안오지만 날씨는 초속 5센티처럼 춥고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바라보고 있자니 당신이 그리워서"

나는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그리워하는 남편이 사랑스러워졌다.
아니, 내가 없는 곳에서 첫사랑을 그리워했더라도 내게 와서 내가 그리웠다고 말해주는 남편이 사랑스러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다. 

"라이넨모 이쇼우니 사쿠라 미레루토 이이네(내년에도 같이 벚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난 영화속 아카리의 대사를 따라하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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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여전히 미스테리는 남았다.
왜 첫사랑은 특별한걸까. 그리고 내 첫사랑은 왜 특별하게 기억되지 않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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