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자작/단편] 빛의 모서리
게시물ID : readers_304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께소
추천 : 6
조회수 : 42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12/05 03:56:43
옵션
  • 창작글
  • 외부펌금지
빛의 모서리

     새벽 네 시에 눈은 떴을 때 수사나가 본 것은 페드로의 벌거벗은 등이었다. 수사나는 시야의 한 귀퉁이, 그의 오른쪽 날개뼈 아래에 모인 예닐곱 개의 점을 응시했다. 아직 흐릿한 눈으로 본 점들은 하나가 될 듯 움직이더니 끝내 흩어지고 말았다. 그동안 몇 개의 단어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문장이 될 듯 순서를 찾다 다시 어질러졌다. 귀를 틀어막고 있는 이어폰에서 한 여자의 여리고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젯밤 잠이 오지 않아 오디오북을 들었고 그 상태로 몇 시간을 깨어있다가 겨우 잠든 것이었다. 귀가 아파 수사나는 이어폰을 빼고 휴대폰에서도 플러그를 뽑아버리고선 침대 옆 좁은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탁자엔 검은 커버의 손뼘 만한 노트 한 권과 뚜껑이 없어진 검은색 볼펜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페드로는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터였다. 차차 맑아지는 정신에 숨을 불어넣으려는 듯 수사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는 페드로에게 다시 눈길을 돌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맨몸이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던 것들을 상상하게 했다. 글이 쓰고 싶었다.
     수사나는 샤워를 마치고 침실 옆 서재에 들어가 글을 썼다. 아직 끝내지 못한 장편과 모아둔 자료는 책상 한쪽에 밀어두고 새로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 문장이 완성되기도 전에 바로 다음 문장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따금 자신이 만들어낸 이 연인들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를 거란 생각에 타자를 치는 손가락을 멈추기도 했다. 
     페드로가 샤워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전 열 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물소리가 멈추자 수사나는 노트북을 닫고 주방으로 향했다.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리고 재작년 신혼여행지였던 프라하에서 구입한 똑같은 디자인의 머그잔 두 개를 꺼내 하나엔 자신이 좋아하는 인스턴트커피를, 다른 하나엔 얼그레이 찻잎을 넣었다. 찻잎을 퍼담는 작은 수저를 쥔 손가락은 프라하에서 본 어느 마리오네트의 손과 닮아 있었다. 한 모양으로 조각돼 움직일 수 없는 손이 웃고 있는 인형의 얼굴과 왠지 모르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그녀는 했었다.
     거실로 나온 페드로는 셔츠 소매의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
     “잘 잤어?” 수사나가 활짝 미소짓는 얼굴로 머그잔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토요일인데 벌써 나가려고?”
     “응. 일 때문에.” 페드로가 옷매무새를 확인하며 답했다. 수사나는 더 질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커피를 마시지도 않은 채 침실에 들어갔다. 옷장에서 옷을 골라 입고—붉은색의 원피스에 속이 비치는 얇은 크림색 카디건을 걸쳤다—간단한 화장을 했다. 단정히 묶은 머리를 만지며 다시 거실에 나오자 휴대폰을 보고 있던 페드로가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머그잔은 비어 있었고 수사나의 커피는 이미 꽤 식어 있었다.
     “약속 있어?” 페드로가 수사나의 차림새를 보더니 물었다.
     “실비아를 만나기로 했어. 어때?” 자신의 모습에 관심을 보이는 페드로 앞에서 수사나는 입고 있는 원피스의 결을 쓸어내렸다.  
     “예쁘네. 어디에서 만나기로 한 거야?” 짧은 감상을 내놓고 페드로가 다시 물었다.
     “실비아 집에서. 내가 그쪽으로 갈 거야.” 수사나가 원피스를 쓰다듬던 걸 멈추고 뒷짐을 지며 답했다.
     “몇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한 시에 보기로 했으니까, 열두 시 십 분 즈음에 출발하면 될 것 같아.”
     “그래.”
     “당신은?”
     “지금 나가봐야 해.”
     “일이면, 회사?”
     “그렇지.”
     “저녁 전에 올 거지?”
     “글쎄. 아마 그럴 거야.“
     “응, 알았어.”
     페드로는 현관 앞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더 흘끗 확인한 다음, 열쇠를 챙기고 나갔다. 창문 너머로 그의 흰색 SUV가 지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수사나는 잠시 후 머그잔을 치우고 침실 탁자 위의 노트와 펜을 숄더백에 담아 마찬가지로 집을 나섰다. 그녀는 자신의 푸른 쿠페를 지나 큰길까지 걸어가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가 향한 곳은 고등학교 동창인 실비아의 집이 아닌 남편 페드로의 근무지였다. 수사나는 근처에 자리 잡은 카페에 들어가 밖이 내다보이는 커다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그녀는 아침에 마치지 못한 이야기의 끝부분을 노트에 적었다. 문장을 하나 적고 창밖 길 건너의 매끄러운 건물 입구를 한 번 보고, 다시 문장을 하나 적고 다시 건물 입구를 한 번 보기를 반복했다. 레몬 버터 소스를 곁들인 흰 생선구이와 샐러드가 나오고 나서는 그런 반복의 과정에 음식을 씹어 먹는 일이 추가되었다. 입에 넣고 꼭꼭 씹으며 문장을 완성하고는 길 건너 건물 입구를 바라봤다가 입안의 음식이 없어지면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였다. 
     몇 번째일지 모를 생선 조각을 씹어 넘겼을 때 목구멍이 간질거렸고 이어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사나는 펜을 놓고 접시 왼편에 있던 컵을 집어 들려 했지만, 컵엔 물이 없었다. 금방 멈출 줄 알았던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수사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여러 번 창밖과 물이 없는 컵 사이에서 방황하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엔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남편을 봤다. 그는 길 건너에서 한 여자와 함께 서 있었다. 짧은 치마가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여자가 매끄러운 건물에 들어가려 하자 남편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고는 그녀가 메고 있던 숄더백을 끌어내려 자신의 손목에 걸쳤다. 그의 다른 손엔 아침엔 보지 못한 분홍색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여자가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남편은 건물 입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수사나는 터져 나오는 기침을 막지 못하며 눈물을 흘렸다.

     페드로는 저녁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왔다.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수사나는 저녁에 먹을 닭고기 수프를 만들었다.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남편의 얼굴엔 줄곧 미소가 번져 있었지만, 저녁 식탁에 앉은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수프를 떠먹을 뿐이었다. 남편이 그릇을 다 비워갈 즈음에야 수사나가 입을 열었다.
     “방금 단편 하나를 다 썼어. 읽어볼래?”
     “이따 자기 전에 읽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될까?”
     “길지 않아. 금방 읽을 수 있을 거야.” 
     수사나는 인쇄해둔 소설을 페드로에게 건넸다. 그가 글을 읽는 동안 그녀는 남은 수프를 천천히 먹었다. 남편의 얼굴은 부러 보지 않았다. 얼마 뒤 페드로가 자신의 빈 그릇 옆에 다 읽은 종이를 내려뒀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수사나를 쳐다봤다.
     “여기에 나오는 남자, 전혀 이해가 안 돼.”
     “왜?” 수사나는 페드로의 눈을 그제야 마주치며 물었다.
     “사랑하는 여자하고 그렇게 됐는데, 조금도 슬퍼하는 것 같지 않잖아.”
     “슬퍼했다고 생각해.”
     “당신이 말하는 그 슬픔이 어디에 있는데?” 페드로의 목소리엔 글 너머 다른 먼 곳에서 끄집어낸 듯한 답답함과 짜증이 담겨 있었다.
     “그럼 어떻게 써야 했다는 거야?” 수사나가 물었다. 그녀의 눈이 기침을 참는 사람처럼 붉어졌고 페드로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알아? 내가 보기에 당신은 단 한 번도 진짜 슬퍼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저녁 식탁에서 나눈 남편과의 대화가 끝났을 때, 수사나는 그릇들과 함께 자신의 글을 치웠다. 홀로 설거지를 하는 동안 옆에 둔 종이에는 물이 튀어 잉크가 번졌다. 설거지를 끝낸 후엔 젖은 손으로 종이를 쥐어 들고 서재에 들어갔다. 누군가의 숨통을 조르듯 힘이 잔뜩 실려 있던 손을 겨우 놓자 종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책상 위에 안착했다. 수사나는 책상 앞에 앉아 뭉개진 종이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펼치고선 그곳에 쓰인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하지만 전처럼 문장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페드로의 말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자신은 진정한 슬픔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에 여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온 남편에게 내가 무엇을 봤고 어떤 심정으로 기침을 토해내는 입을 틀어막았는지 말하는 대신 소설 하나를 건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지금 이렇게 아무도 보지 못할 눈물을 기어이 터뜨리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읽는 이로부터 너는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란 소리를 듣는 보잘것없는 글을 쓰는 게 아닐까.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수사나는 계속 잠들지 못했다. 그녀가 침실에 들어왔을 때 페드로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어둠에 시야가 익숙해진 건지 커튼 사이로 들어오기 시작한 빛 때문인지 방의 형태와 색이 눈앞에서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수사나는 침대에 눕지 않고 창가 옆 일인용 소파에 앉은 채 방 안 곳곳을 들여다봤다. 그녀의 빈자리를 향해 등을 보이고 누운 남편과 그를 떠받고 있는 침대를, 언젠가 토성이라 이름 붙인 남편의 등에 난 점들을, 아직도 벗지 못한 원피스와 옷장 속 남편의 셔츠를, 귓가를 맴도는 한 여자의 목소리를, 모르는 사이에 또 엉켜 버린 이어폰을, 쓰지 않은 종이가 제법 남아 있는 노트와 잃어버린 볼펜의 뚜껑과 그런데도 마르지 않는 검은 볼펜의 촉을, 끝내 문장이 되지 못하는 머릿속 단어들을, 자신의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도 어쩌면 이 세상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닐 글을 쓰는 그녀 자신을. 수사나는 알았다. 어디에도, 슬픔이 없는 곳은 없었다.
     수사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커튼을 하나하나 걷고선 창문마저 활짝 열었다. 쏟아지는 따스한 빛과 찬 공기에 페드로가 뒤척였다. 뭐야? 지금 몇 시인데 그래? 페드로가 외쳤다. 수사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나머지 창을 전부 열었다. 페드로는 한 손으로 이불을 끌어당기고 다른 손으로 빛을 가리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수사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수사나? 왜 이러는 거야? 계속해서 소리치던 그가 이내 조용해졌다.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방은 밝았다. 수사나는 그 속에서 숨을 가득 들이마시고 다시 비워냈다.
     “이제야 보이는 것 같아.” 
     그녀의 모든 슬픔을 향해 수사나가 말했다.



00. 

자보려 했는데, 도무지 눈만 무겁고 잠은 안 와서. 얼마 전에 쓴 글을 올려봅니다. 이미 알아채신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빛 혹은 그림자 공모전에 낸 글이에요. 떨어졌지만요. ㅎㅎ 흔하디흔한 소재를 가져다 글을 쓰긴 했어요. 그런데 이런 게 제가 쓰고 싶은 글이라서.


01. 

며칠 전 '눈 내려!'라는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는데, 눈을 보진 못했어요. 아직 제 이번 첫눈은 오지 않은 걸로...


02. 

오늘은 제 17년 지기 친구이자 6년간 제 과외선생님을 맡아주신 누구누구의 생일이에요. 생일, 하니까 이미 지난 제 생일이 떠오르네요. 원래 생일이면 책게에 글을 올리곤 했는데, 약속을 못 지켰어요. ㅠㅠ 내년엔 제때 올릴 수 있길!


03. 

혹시 이 세상에 나와 이 사람 단둘만 남으면 좋겠다는 생각 해보신 적 있으세요? 제가 방금 그랬거든요.


04.

이제 자러 갈게요!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