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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개와 이야기하기
게시물ID : freeboard_16764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박진성
추천 : 2
조회수 : 16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12/12 19: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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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반려견 사랑이와 노는 시간도 부쩍 늘었다. 
  
  사랑이. 말티즈. 올해 열네 살. 
  
  이 늙은 개는 시력을 완전히 잃은 지 5년이 넘었고 요즘엔 청력도 많이 떨어져서 식구들의 기척을 잘 느끼지 못한다. 이 늙은 개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그마한 방석 위에서 웅크리며 지난다. 후각과 촉각은 아직 남아 있어서 내가 먹던 음식을 나눠주거나 쓰다듬어줄 때만 반응한다. 시각과 청각이 사라진 세계가 측은하게 느껴지다가도 시각과 청각이 거세된 세계는 어떨까, 가끔 호기심이 들기도 한다. 못된 호기심이다.
    
  이 늙은 개와 대화를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말이 대화지, 늙은 개 옆에 앉거나 누워서 나 혼자 개에게 말을 하는 게 전부다. ‘사랑아, 춥지?’, ‘사랑아, 배 안 고파?’ 등등부터 시작한 이 ‘이상한 대화’는 어느 순간부터 고해성사 비슷한 성질로 바뀌었다. 시력이 없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늙은 개에게 나는 내가 궁금한 것들을 하나씩 물어보는 것이다. 청력을 거의 잃은 개에게, 내가 잘못 지나온 시간들을 하나씩 말해보는 것이다. 
  
  사람과 개가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같이’ 지나온 시간은 어떤 물질과 같은 것이어서 과학으로도, 생물학으로도,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가령 나의 감정이 조금 격앙되어서 거의 눈물에 가까운 언어를 늙은 개에게 건네면, 어느새 개의 눈에도 같은 성질의 액체가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이 늙은 개에게는 이상한 피드백을 주는 능력이 있는데, 나의 말과 말 사이로 ‘이상한 언어’를 넣을 줄 안다는 것이다. 속울음 같은, 고통을 참는 것 같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는 것 같은, 이 기이한 언어는 나에게 이상한 안도감과 괴기스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 개에게도 나를 지칭하는 이름이 있을까?
  그런데 이 개는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알까? 
  웅크리고 있는 개 옆에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면 홀연, 아침의 빛이, 깡패처럼 찾아오는 것이다. 

  (2016. 12.)

사랑이_1.jpg


출처 http://blog.naver.com/poetone/220892798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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