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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자기 한 몸 부끄러워져도 梨花 지킨 그녀.. 돌 던질 수 있나
게시물ID : sisa_10298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esert_Fox
추천 : 13
조회수 : 3105회
댓글수 : 17개
등록시간 : 2018/03/10 13:40:55

http://v.media.daum.net/v/20180310030332504


김활란의 조상은 평안북도 의주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인천으로 이주해 사업을 시작한 까닭으로 김활란은 인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곱 살에 어머니 박도라 여사와 함께 인천 내리교회에서 어느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선교사가 본디 두 여성에게 주기로 작정했던 세례명을 실수로 바꿔 부른 탓에 마땅히 박헬렌이 돼야 할 그의 어머니는 '박도라'라는 세례명을 받게 됐고, 그는 어머니가 받아야 할 세례명 헬렌을 받게 돼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닥터 헬렌 킴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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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는 미국과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한 것을 빌미로 전국에 미국 선교사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해 부득불 김활란은 이화여전의 교장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이화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에 직면했다. 전시 체제를 구축해 나가던 총독부 입장에서는 이화여전도, 김활란도 안중에 없었다. 김활란은 이화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학생들을 인솔하고 조선 신궁에 참배해야 했고, 시키는 대로 강연도 다녀야 했고, 글도 써야 했다. 1941년 진주만을 폭격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 군국주의 일본은 미국 선교사들이 창설한 이화여전을 폐교하려 했지만 김활란이 이화를 지키기 위해 자기 한 몸을 불사른 것이다.

그에게 있어 그 시기야말로 암울하기 짝이 없는 세월이었다. 내 한 몸을 살리기 위해 이화를 희생의 제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내 한 몸이 어떤 부끄러움을 당하더라도 이화를 끝까지 지킬 것인가 그는 기로에 서 있었고 이화의 책임자로서 이화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눈물로 기도하면서 그 어두운 세월을 이겨낸 것이다. 김활란과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알고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일반 조선인도 알고 있었다. 김활란의 심중(心中)이 어떠했겠는가. 그는 그 시대 우리 모두의 존경 대상이었다.

드디어 해방이 됐고 해외에서 활약하던 독립투사들이 다 함께 조국에 돌아왔다. 그들은 이 모든 시련을 극복한 오척 단신의 여걸을 향해 '일본인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나요'라며 악수를 청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를 위해 장례식은 하지 말고 나를 하늘나라에 보내는 환송 예배를 해다오." 역사가의 임무는 과거에 일어난 일들과 이미 살고 간 사람들을 보다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화여대 캠퍼스에 서 있는 김활란의 동상이 그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젊은이들에 의해 페인트로 더럽혀지고 모욕으로 매도될 수는 없다. 역사의 미래에 어느 날 김활란의 신앙과 애국심은 공정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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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曰 - 김활란 박사는 한국최초 여성박사1호이시고 여성운동의 선구자. 이화여대를 설립한 위인이시다. 친일반민족행적? 당시 학교를 지키기 위해선 어쩔수없었어. 학교를 지키기위해 정신대,위안부 독려운동할수밖에 없었어. 그거 안하면 학교는 조선총독부에의해 폐교될 수밖에 없었어.  그런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야될거아니겠어? 학교가 폐교되는 순간,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인들이 교육을 배울 기회가 사라지는것이라고!  조선인들이 교육을받아 사회에서 당당히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실력을 양성하기위해 학교를 지킨 김활란 박사님께 오히려 감사를 표해야지. 학교를 지키기위해 김활란 박사의 고뇌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아야지. 단순 사소한 실수 하나 잡아 싸잡아 전체를 매도해선안된다! 

사소한 실수, 과거는 덮어라! 미래발전 지향적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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