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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과는 왜 하필 그렇게나 맛있어서..
게시물ID : cook_2174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ㅂㅎ한
추천 : 10
조회수 : 142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3/13 10:18:46
어제 퇴근하고 기분이 퍽 좋았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 소주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에 소주 세 병과 사과 두 알을 사서 집에 들어갔다. 


불그스름한 빛깔에서 향기가 풍기는 것 같은 사과들이었다. 과육도 퍽 단단해서 사과 한 알을 집어서 깨무니 '아삭'이라기보다는 '빠득'에 가까운 소리가 났다. 향도 빛깔도 그리고 소리까지도 맛있는 사과였다. 그래서 간만에 마신 소주가 유난히 잘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렇게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두 병을 비우고 필름이 끊어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침대에 누운 것까진 기억이 난다. 아침 7시,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알람을 끄려고 핸드폰을 찾는 동안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때부터 핸드폰을 찾는 일은 그 불안감의 원인을 탐색하는 작업이 되었다.


겨우겨우 핸드폰을 꺼내 알람을 끄고 나니 확인하지 않은 카톡 메시지가 열 건이요. 어젯밤 건 통화목록이 3건이었다. 전전 여자친구, 학부 동기, 독서토론모임 친구 이 세 사람에게 전화를 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전 여자친구에게 걸지 않은 건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전전 여자친구도 밤중에 걸려온 옛날 남자친구의 전화는 받지 않는 현명함을 보여줬다. 나는 긍정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그래도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기만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내가 안도한다고 해서 어젯밤의 일들이 무효화될리는 만무했다.


카톡을 확인해봤다. 나보다 어린 한 친구에게 꼰대질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흔적들이 보였다. 너무 부끄러웠다. 문뜩 어젯밤에 그 꼰대질을 시도하면서 '내가 이 친구를 도와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던 게 기억났다. 술 마시면 유난히 열정적으로 갖은 지적질과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조언을 쏟아내던 선배가 한 명 있었다. 내가 그 선배와 똑같은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에게 너무 미안했고 너무 부끄러웠다.


어젯밤 내 술주정으로 불쾌함과 당혹감을 느꼈을 그 친구들에게 사과하고는 출근길에 나섰다. 


출근길에 씨로 시작해서 발로 끝나는 욕설과 '내가 왜 그랬지' 하는 세상에서 가장 진부하고 덧없는 후회를 되풀이했다. 지나가던 포켓몬 박사님이 출근길에 나선 날 봤다면 아마도 시바루몬이라고 이름 지었을 거다. 


잘못한 건 나인데, 자꾸만 그 사과들이 원망스럽다. 그 사과는 왜 하필 그렇게나 맛있어서 술을 그렇게 술술 들어가게 만들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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