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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에 빠진 임금
게시물ID : humordata_17473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흙향기
추천 : 0
조회수 : 160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4/13 1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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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은 이후 성왕은 매우 무기력해졌다. 정사도 팽개치고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꿈속의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자고 또 잠들었다. 가끔씩 꿈속에서 그녀를 보기도 했다. 그의 마음을 완전히 앗아가 버린 그녀는 이제 그의 존재의 이유가 된 것이다.

 

이 가을밤 달빛처럼 아름다운 여신을 탐하면 언젠가는 선왕이 알게 될 것이야.” 하지만 전에 본 그녀의 황홀한 모습을 그의 가슴에서 도저히 지울 수는 없다. 마음속 깊이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이러다가 선왕께서 나를 저주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잠시, 그는 감미로운 노래에 잠이 들고 허공에 둥실 뜬 듯 몽롱해졌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만 환상이 사라져 줄 것인가.

 

사랑에 눈이 먼 젊은 성왕. 그는 궁 밖을 나와 말이 가는 대로 나아갔다. 그는 들판과 산과 계곡을 오랫동안 달렸다. 여전히 꿈속을 헤매면서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비단으로 된 관에 있던 꽃모양의 임금의 관식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자줏빛 두루마기와 푸른 바지도 비에 젖고 먼지에 더렵혀진다.

 

여기는 아름답고 웅장한 광채가 눈부신 봄날 밤의 대왕별자리. 아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무령왕은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그가 옆의 큰곰자리를 바라보자 눈에서 아주 밝은 섬광이 나와 그곳을 살며시 두드린다. 그러자 은은하고 그윽한 울림과 함께 상긋한 목련향기를 풍기며 별 위에 나타난 황홀한 여신.

대왕, 무슨 일이신가요?”

내 오늘 여신께 간곡하게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전번에도 혜량이 사나운 고양이를 시켜 후왕에게 달려들게 할 때도 제가 막아주었는데 대왕께 또 무슨 걱정거리가 생기셨나 보군요.”

내가 보기에도 나라의 미래가 정말 불안해 보입니다. 내 아들을 위하여, 아니 백제국을 위하여 후왕에게 반지를 주시오. 아예 위험에 처하지 않게 가까이에서 돌보아주세요.”

안됩니다. 반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드리는 것입니다. 반지를 끼운다는 것은 저와의 사랑이 결합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반지는 영원히 여신이 가지고 계셔야 합니까?”

 

무령왕이 볼 멘 소리로 묻자 여신이 단호히 대답한다. “저는 되돌려 받은 반지를 고이 간직하였다가 백제국의 번창을 이룰 수 있는 사람에게 전해줄 수밖에 없어요.”

우리 아들이 백제의 중흥을 이룰 수 없다는 말씀이오?”

그건 어렵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대왕의 말씀대로 이곳 웅진에 도읍을 계속 하고 있으면 다음 대에 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면 후왕더러 반지를 끼게 하지는 않고 잘 보관하게 하여 여신께서 그를 이끌어주셨으면 하오.”

알겠습니다, 대왕.”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달이 너무 밝아 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뒤척하는 성왕. 바로 그 앞에 천상의 꽃처럼 아름다운 여신이 눈부시게 화려한 옷을 입고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며 나타났다. 그것을 본 임금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

왜 이렇게 놀라세요?”

, 혹시 그대는 여신으로 변신한 혜량이 아닌가?”

그럼 저는 서운하답니다. 혜량이 다시는 후왕 근처에 얼씬하지 못하도록 마법을 걸었어요.”

정말 고맙소. 여신! 진실한 내 사랑!”

여신이 방긋 웃으며 발끝이 보이지 않게 붕 떠서 미끄러지듯이 문밖으로 나간다. “여신! 여신!” 성왕이 안타깝게 외치며 뒤쫓아 달려갔다. 계속 따라가다 보니 그녀는 화려한 임류각에 이르러 조용히 그림처럼 후왕을 기다리고 있다.

여신!”

성왕이 꼭 껴안으려하자 살짝 비키며 부드럽게 입을 연다.

 

후왕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요?”

물론 여신의 사랑을 얻는 것이지요.”

후왕께서는 백제국이 천하를 호령하게 하고 싶은 야심이 없으신가요?”

여신과 함께 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한번 해보고 싶소.”

후왕께서 그토록 원하신다면 백제중흥의 기반을 닦아드리겠습니다.”

고맙소.”

후왕, 이 반지를 가지고 계세요. 끼우지는 마시고요.”

이 반지는 어쩐 일로?”

이 반지는 저와 후왕을 이어주는 저의 분신이니 항상 가까이 두세요.”

성왕이 머뭇거리자 여신이 힘주어 말한다. “불길한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고맙소.”

앞으로도 여기 호젓하고 경치 좋은 임류각에서 대왕을 뵈었으면 합니다. 저는 이만.”

여신은 임류각 지붕 위를 새처럼 사뿐히 날아 넘어 어디론가 연기처럼 사라진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계룡산 천황봉. 임류각에서 날아온 여신이 두 팔을 크게 벌린 채 안개와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아함 크롬 호르 아함 크롬 호르! 자비로우신 부처님께 바라노니 제가 인간의 육신으로 살아갈 백제국에 당신의 공덕과 세상의 아름다움이 넘치게 하소서.” 여신의 주문이 산 아래로 크게 울려 퍼지고 그녀의 손에선 연보라 빛줄기가 나와 온 하늘을 아름답게 뒤덮었다.

잠시 후 동쪽하늘에 붉은 빛이 감돌더니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처음에 솟았던 붉은 빛이 점점 커지더니 온 세상을 빨갛게 뒤덮어 나갔다. 이제 태양이 찬란한 빛을 받은 계곡에서는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리고 그 사이로 솟아나는 연푸른 신록이 피어날 것이다. 녹음이 조금씩 짙어지기 시작하면 저 건너 관음봉에는 철쭉꽃이 화사하게 피어나 온 산을 연분홍으로 곱게 색칠하게 된다.

 

비몽사몽간에 침소에 돌아온 성왕은 반지를 가지고 와서 침소의 경대(거울)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그동안 해 오던 일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 뒤로 며칠이 지나 왕비가 태기가 있더니 열 달 후에 아주 귀여운 딸아이가 태어났다. 궁궐 지붕에는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걸쳤는데 아기의 눈빛이 초롱초롱 샛별 같고 아주 총명하고 예뻐서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공주의 모습이 여신을 너무나 닮았다. 성왕은 속으로 크게 놀랐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사비성으로의 천도, 신라와 힘을 합하여 고구려를 쳐 한강하류의 영토를 회복하는 일이 성왕에겐 전혀 의미가 없게 보였다. 그 대신 불교와 기예가 그의 눈에 부쩍 들어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궁궐에 출입하는 높은 장군들이 성왕에게는 부처님의 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으면 멋있는 창과 칼, 활을 가지고 한껏 멋 부리는 사람들로 생각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부처님을 위하여 진기한 장식과 가구, 그리고 우아한 그릇과 화려한 옷을 만들거나 맛있고 감미로운 음식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또한 성왕은 그림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스스로 난과 대나무를 그리기도 하고, 그림에 제시를 쓰기도 하였다. 성왕은 시를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글씨 또한 매우 잘 썼다. 성왕이 어제시를 어필로 써서 하사한 경우는 주로 시흥을 주체하지 못할 때였다. 또한 궁궐에 소장된 명화를 내어 신하들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거나 제를 쓰게 하는 일도 두드러졌다.

 

어느 날 정전에 있던 성왕이 옆의 내관에게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당장 달려가서 화공들에게 일러 물감과 종이와 붓을 가지고 오라고 일러라.” “, 마마.” 내관이 복명하고 나간 지 얼마 안 있어 내관이 그림도구들을 받쳐 든 화공들을 거느리고 들어와 성왕 앞에 엎드린다. 모두들 준비된 것 같자 성왕이 근엄한 태도로 말한다. “화공들은 들으시오. 이제 과인이 평소 그대들의 그림솜씨를 살펴보려고 하오. 그대들 마음속에 제각기 고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있지 않겠소. 이 자리에서는 솜씨의 우열을 가려야 하는 만큼 지금처럼 그림을 그리는 시공간이 똑같이 주어지는 상황에서 화공들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과 느낌으로 그림을 만들어 보시오.”

어떤 것을 그려야 하옵니까?”

그대들이 궁궐 밖에 나가 백성들 속에 있었을 때를 회상하여 본보기가 될 만한 훌륭한 그림을 그려보시오.”

임금은 그림이라는 화려한 또 하나의 거울을 통해 백성들의 민심을 읽고, 그림의 거울 속에 들어가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는 도량형(저울)이 되어 더 멋진 그림의 현실을 이룩하고 싶은 것이다.

 

성왕의 명에 따라 화공들은 하얀 종이나 오색 비단 위에 학이 춤을 추듯 정성껏 멋있게 그림을 그렸다. 잠시 후 다 완성된 그림들이 내관의 손을 통해 한 장씩 임금에게 보여 진다. 하나하나 둘러보던 중 한 그림이 성왕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림 속에는 그늘진 산의 등허리에 솟아있는 기이하고 험준한 바위들이 마치 호랑이가 벌떡 일어나 울부짖는 것처럼 하늘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다. 반면 산의 다른 편에는 여인의 포근한 젖무덤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운 흙이 쌓여 있는 양지바른 언덕에 수목이 빽빽이 우거져 있었다. 비단의 바탕색으로 된 출렁이는 푸른 물결은 만발한 붉은 꽃무리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바닷가 암벽을 거세게 올려붙이며 바로 발밑에까지 밀려오는 듯 사방을 에워싸고 끊임없이 시원하게 이어진다.

 

이것은 평범한 궁궐 화공의 필치가 아니다. 어느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고 마음껏 자유롭게 그려진 이 예인의 그림. 그의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마음과 격렬하게 불타오르는 자유혼을 잘 반영하여 선과 색이 전혀 막힘이 없고 거침이 없어 시원시원하구나.’

성왕은 속으로 탄복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의아하게 생각되는 점이 있었다. “이 그림은 누가 그렸소? 그린 화공을 대령하게 하시오.”

 

한 젊은 화공이 성왕 앞에 나와 엎드린다. “이름이 무엇인가?” “사연이라고 하옵니다.” “정말로 잘 그렸다. 겉보기에는 한 폭의 전통적인 풍경화 같지만 그림에서 풍기는 모습은 백성들 속에서 널리 보이는 민화로 보이기도 하는구나. 허나 어쨌든 이 그림에는 백성들의 생활모습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고 있다. 그 이유를 말해 보아라.”

대왕. 소신도 화공으로서 그림을 그릴 때 주로 사물의 모양을 그대로 베끼는 모사로 그리지만, 가끔씩 상징으로도 그리옵니다.” “그러면 이 그림도 백성들의 생활상이나 표본이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대왕 보시다시피 이 그림에는 풍수지리가 잘 나타나 있사옵니다. 음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산악의 기세는 백성들의 행복하고 조화로운 삶을 염원하는 것입니다.”

헌데 이것은 결국 민화가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민화는 자유분방하고 투박하지만 숱한 고난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평안과 복락을 원하는 염원이 절절이 어린 그림이옵니다.”

경의 말이 옳소. 틀을 벗어난 곳에 길이 있는 것이오. 민화야말로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정신의 표현이며 민심을 파악할 수 있는 지름길일 것이오.”

 

성왕은 감탄하는 눈길로 그림을 한참동안 더 들여다보더니 말을 잇는다. “그림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오?” 그러자 사연이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꿈을 꾸는 것이옵니다. 모든 사물은 화공의 눈을 거치게 되면 그것에 화공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져 다시 새롭게 피어나게 됩니다. 화공의 꿈은 종이 위에 그려지고 그림은 다시 꿈을 꾸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화공들의 혼이 서린 진정한 그림입니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소. 그림이 예인들의 심미안이라는 체에 걸러져 그들 현실의 잣대로 평가되고 그린 사람의 또 다른 내면을 놓칠 수도 있는 것이오.”

대왕. 그림이 현실이요, 현실이 곧 그림이옵니다. 그림은 화공과 사물이 물아일체가 되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옵니다.”

과인이 생각하는 그림은 조금 다르오. 가령 종이 위에 선을 그어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이 선이 바로 정치인 셈이오. 선으로 종이를 나누어 세상이 한 폭의 그림에 그려지듯이 정치로 현실의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곧 정치와 마찬가지로 물아일체가 되기 전에 화공의 의지가 가미되는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하지만 화공의 의지로도 물아일체를 이룰 수 있사옵니다.”

 

궁궐의 화공들끼리는 본인의 과거나 출신배경 같이 술자리에서 사람들의 도마 위에 재미있는 술안주로 오를 수 있는 민감한 것을 그만두더라도 대화로 삼을 화제는 무궁무진하였다. 그들이 각자 그리는 선과 색의 드러난 다양한 특색과 그 내면적인 의도나 새로운 그림의 구상과 작업에 대한 공동 관심사는 충분히 개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서로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소재이다.

그러나 조정 내에 신하들이 여러 가문으로 갈려 있듯이 궁궐의 화공들도 대부분 연줄과 취향에 따라 소속한 파벌이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거나 대궐 내의 중요한 정보를 파벌에 제공해 주기도 한다. 더구나 화공들은 붓으로 화폭을 가로질러 선을 하나 긋거나 색의 밝기와 농도를 우아하게 조절하여, 화공이 마음만 다르게 먹으면 그림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거나 반대로 괴롭힐 수도 있는 것이다.

사연과 같이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주를 지닌 화공을 고리타분한 격식에 얽매인 궁궐에 그대로 묶어 두어야 할 것인가. 성왕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궁궐을 벗어난 화공은 존재할 수 없다. 임금이 부리기 위해서는 명을 받드는 조정신하가 화공을 적시적소에 데려와야 하는데 도저히 그렇게는 하지 못한다. 그저 화려하게 꾸민 새장에 갇힌 풀이 죽은 새처럼 지내야 할 것이다.

이 그림에 그런 깊은 뜻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소. 훌륭하오. 정말 훌륭하오. 앞으로 그대를 과인 곁에 두겠으니 그대는 과인을 항상 따르면서 그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렇게 하여 사연은 성왕 곁에서 항상 시중을 드는 최측근 화공이 되었다. 그의 가슴에 뿌듯한 성취감이 느껴진다. 앞으론 더 자주, 더 가까이 왕비를 볼 수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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