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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판혁명 01> "유령의 미행"
게시물ID : panic_984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빛나는길
추천 : 11
조회수 : 1188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8/05/08 11:2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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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령의 미행
 

누군가 유령처럼 나를 따라왔다.
지하철을 타면서부터 미행하는 낌새를 느꼈다. 미행자가 눈치 채지 못하게 평소 행동처럼 나는 지하철 안, 신문 판매원한테서 스포츠 신문 한 장을 샀다. 1면에 큰 글씨로 인쇄된 <1982년 프로야구 코리안 시리즈 우승팀은?> 헤드라인을 보는 척하면서 주위에 촉각을 세웠다. 그러나 형사로 예상되는 미행자는 보이지 않았다.
종로 3가역에서 내렸다. 지금 내 가방 안에는 볼온 서적으로 분류되는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의 책 무엇을 할 것인가?’영문판도 있었다. ‘광주학살 원흉 전두환 정권 타도하자불법시위 주동혐의로 현재 나는 수배 중이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걸어가면서 미행자를 따돌릴 곳을 찾는데 세운상가 건물이 보였다. 건물 평당, 서울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는 저 곳은 미행자를 따돌리기 적합한 곳이었다.
건물 양쪽 외부에 설치되어 있는 시멘트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구름다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2층끼리 연결한 공중보도를 구름다리라고 불렀는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일단, 내 예상이 맞아 다행이었다. 거기서 불법복제음반인 빽판을 고르고 있는 중고등 학생들 틈에 나도 끼어들었다.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내게 그 순간이 다가왔다. 대형 중고 냉장고를 리어카로 운반하는 인부들이 지나가며 내 몸을 가릴 때 나는 전광석처럼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다음은 전자제품 박스를 쌓아놓은 비상구 쪽으로 빠져나갔다. 곧 바로 건물 구석에 설치되어있는 대형 변압기 뒤쪽에 몸을 숨겼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얼마동안 이러고 있는 지도 몰랐다. 나가도 될까? 생각하는데 변압기에 붙어있는 사원모집 공고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걸 왜 여기 붙여 놨을까? 하는 의구심이 팝송상식 겸비자 우대라는 문구에 사라졌다. 선명한 가을 날씨에도 저 멀리 남산타워가 흐릿하게 보였다.
수배상황에서 어찌 보면 얼떨결에 나는 세운상가에 숨어들게 되었다. 세운상가는 천국이었다. 정부의 검열로 발매금지된 도색잡지 , 포르노 비디오, 게임기 그리고 불법복제 음반인 빽판까지 여기서 구하지 못하는 게 없었다. 한편 불법천국이 내게는 추억어린 장소였다. 고등학교 시절 팝송에 심취했던 나는 주말마다 빽판을 사러 세운상가에 왔었다. 그래서 미행자를 따돌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이곳의 특별한 건물구조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운상가 1층부터 3층까지는 전자제품 판매점이 빽빽이 들어서있고 4층부터 8층까지 는 초창기엔 아파트였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내가 근무하는 세운상가 나열 702호에는 월드뮤직이라는 아크릴판 회사명이 걸려있었다. 불법 레코드판 제조공장 월드뮤직은 음반 도매상으로 위장한 업체였다. 어제 첫 월급을 받았으니 여기서 일한지 1개월이 됐다.
10월초 가을 날씨 치고는 제법 서늘했지만 가내수공업 방식의 10평 남짓한 공장 안은 선풍기를 틀어놓고 있었다. 빽판의 원료인 지름 30cm 플라스틱 검정판을 만들기 위해 PVC와 카본 등을 섞은 후 보일러로 가열하고 있었다.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환풍기 팬에는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빽판 제작에 쓰이는 약품 냄새를 잘 배출하고 있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나의 업무는 프레스 기계로 빽판을 찍어내고 팝송 제목 라벨을 만들어 부착하는 거였다. 빽판의 모태가 되는 금형 니켈판을 떠내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업은 유일한 동료인 박씨 아저씨 몫이었다.
년 말을 앞두고 캐럴 음반 특수에 덩달아 빽판 캐럴 주문이 숨돌릴 틈도 없었다. 오늘은 아침 8시부터 점심까지 팻분(Pat Boone)의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 1천장을 프레스로 찍어냈다. 나와 박씨 아저씨가 체력의 고갈을 절감하고 있을 즈음, 사무실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여보세요? ! 사장님
박씨 아저씨가 네 알겠습니다로 전화통화를 끝내고 내게 다가왔다.
빽판 하나가 노났는데 물량을 더 뽑자고 사장이 원판 갖고 밤에 오신데네
초대형 히트를 쳤다는 세운상가 은어인 노났다는 빽판을 갖고 오겠다는 사장은 소매점 유통배달까지 직접 한다고 했다. 워낙 바쁜 몸이라 여기엔 한 달에 한번 정도 온다고 했는데 오늘이 그날인 셈이다.
미스터 킴은 사장님 얼굴 본적 없지?”
~ 여기 입사할 때도 아저씨가 면접을 봤잖아요
그러네, 나는 점심 먹을 겸 해서 장모님 입원해 있는 병원에 좀 갔다 올게
아들 뻘인 나한테 호칭을 미스터 킴이라고 불러주는 마음씨 좋은 박씨 아저씨가 사무실을 나갔다. 후덥지근한 보일러 열기에 약품 냄새가 버무려져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다.
일단 보일러 스위치를 내렸다. 살 거 같았다. 세상이 조용해졌다. 공장 한쪽 벽면은 도서관처럼 빽판 수만장이 책꽂이에 채워져 있었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레드 제플린의 노래 Stairway to Heaven(천국으로 가는 계단) 레코드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익숙한 영어 가사를 나지막하게 따라 불렀다. 창문을 통해 종로3가 빈민가 주택 지붕 위에 폐타이어들이 난잡하게 얹혀져있는 게 보였다. 혹시라도 불어 닥칠 거센 바람에 빈약한 지붕이 날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인데 그 모습에 내가 늘 공감했다. 상가 바로근처 전봇대들을 등나무 줄기처럼 휘감고 있는 전기 줄은 좁은 골목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얽혀 있었다. 내 마음처럼 불길했다.
공장에서 숙박을 해결하는 나는, 박씨 아저씨가 퇴근하면 레닌의 책을 번역했다. 번역책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레닌의 저서 무엇을 할 것인가?’인데 대기업에 근무하는 선배가 일본 출장을 갔다가 은밀하게 구입해온 것이었다. 한 달 동안 매일 밤 레닌 책 번역에 매달려온 나는 꿈에서 레닌을 만나 책 내용을 잠꼬대처럼 주고받을 정도로 몰두했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할 때는 여기 있는 레코드판을 들었다. 마침내 무엇을 할 것인가한글번역을 완료했고 타이핑할 일만 남았다.
환기를 위해 늘 열어놓는 출입문을 닫고 문의 손잡이 버튼을 꾸욱 눌러 잠궜다. 타자기에 A4용지 한 장을 걸었다. 드르륵하며 경쾌한 소리로 하얀 종이 한 장이 첫 타이핑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내가 한부를 완성한 후 그걸로 복사본 30부를 만들어 전국 대학교에 배포한다. 그러면 각 대학에서 필요한 만큼 또 복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제목을 곧이곧대로 타이핑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 책자를 갖고 있다가 경찰 검문에 걸리면 이적표현물 소지죄로 처벌받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책 내용 중에 불순한 단어는 아예 바꿔버렸다. 러시아는 미국으로, 사회주의 혁명은 회사주의 개발로 무장봉기는 무봉 등으로 그렇지만 운동권 학생들은 대충 감안해서 읽을 수 있었다.
, 그러면 레닌은 누구로 바꿀까? 언뜻 떠오르는 유명인물이 없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영국그룹 롤링 스톤즈의 ‘Sympathy For The Devil' 앨범 그림이 눈에 띄었다. 롤링 스톤즈의 보컬인 믹 재거가 혀를 길게 내민 사진이 레닌 이름 변경에 결정적 도움을 줬다. 기자들 앞에서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고 사진촬영 포즈를 취하던 아인슈타인을 연상케 해 준 것이다. 아인슈타인 빙고! 이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로 위장이 시작되었다.
제목을 타자기로 피아노 건반 치듯 타닥타닥 타이핑 했다. 먹줄도 새 걸로 간지 얼마 되지 않아 선명한 글씨가 또박또박 찍혀 나왔다. 이때 사무실문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온 것이다. 일순 긴장했다. 레닌 책자 번역본을 앨범재킷 안에 부랴부랴 넣었다.
누구세요?”
내 물음에 사장이라는 단어가 문 밖에서 짧게 들려왔다. 저녁 쯤 온다고 했는데 너무 일찍 왔다. 문을 열자마자 사장이 성큼 들어왔다. 덩치는 작지만 눈매가 매서운 50대 중반의 전형적인 세운상가 장사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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