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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의 소년
게시물ID : humordata_175396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흙향기
추천 : 1
조회수 : 118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5/29 19: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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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며칠 후 사부 연희가 낑낑거리며 자루에 무언가 무거운 것을 들고 들어왔다. 들고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녀의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공주와 태자가 달려가 자루를 열어보니 빛나는 두 개의 묘안석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큰 것은 사람의 머리통 만하여 붉고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보다 조금 작은 것은 노란 색 광채를 찬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태자가 사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것 꺼내도 좋소?”

그러자 연희가 입가에 익살스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꺼내주시고 잠시 들고 계시죠. 태자마마는 임금이 되실 분이니까 큰 붉은 것을 들어주시고 공주마마는 조금 작은 노란 것을 들고 계세요.”

 

먼저 태자가 붉은 묘안석을 들자 묵직한 느낌이 팔에 전해오면서 팔이 조금씩 떨려왔다. 공주도 역시 노란 묘안석을 들고 있으니 무거워 팔이 아파왔다. 그때 연희가 모든 창문의 휘장을 내리며 말했다. “이제 일식이 되어 세상이 어둠에 잠겼습니다. 미래의 태양으로 떠오르실 태자께서 붉은 묘안석을 들고 가 서 계시고 공주께서 그 옆으로 줄을 맞춰 노란 묘안석을 들고 가세요. 두 분 모두 저와 나란히 서 계셔야 하옵니다.”

 

태자와 공주가 무거운 묘안석을 들고 있으려니 팔다리가 후들거리며 땀이 뻘뻘 흘러나왔다. 그때 연희가 둘을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태자께서 들고 있는 태양이 공주께서 들고 있는 달에 가려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소신과 같은 사람들이 태양을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일식이옵니다.”

들고 있으려니 몸이 떨리고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으니 빨리 일식강의를 끝내주시오.”

힘드시면 이제 내리셔도 좋습니다.”

태자가 묘안석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거 우리의 수업태도가 불량하다고 하여 벌을 주려는 속셈이 아니오?”

아니옵니다. 이렇게 조금 고생하셔야 그 기억이 오래갑니다.”

이렇게 힘들 바에는 숫제 일식을 안 배우는 것이 났겠소.”

그래도 일식을 배워두시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사부에게 속는 셈치고 한번 믿어볼까? 헌데 일식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요?”

 

. 하늘에 있는 태양은 임금을 상징하고 있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신하를 나타내며, 이 세상을 따라다니는 달은 백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사옵니다. 그래서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은 백성이 군왕을 누르는 가장 큰 하극상이라고도 볼 수 있사옵니다.”

이제 보니 일식은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것이군.”

그래서 사회질서가 급격히 무너지고 더 큰 불안과 혼란으로 이어져 나라가 결코 안정될 수 없사옵니다.”

허면 혜성처럼 재난은 생기지 않는가?”

당연히 생기게 되옵니다. 일식도 해와 달과 이 세상이 일직선으로 되어 해와 달이 이 세상을 끌어당기는 힘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역시 혜성처럼 가뭄과 홍수, 지진과 전쟁이 발생하여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집니다.”

 

연희가 말하는 것들은 거의 다 모르는 것이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실습으로 하다 보니 어렵지 않고 오히려 신선하게 와 닿았다. 삐딱한 태도로 연희를 놀려보려던 태자의 계획이 계속 수포로 돌아가고 두 사람은 차츰 진지한 태도로 공부에 임하게 되었다. 그들은 별들로 이루어진 우주의 오묘한 원리에서 임금과 백성의 도리를 깨닫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 서먹서먹한 사제관계도 자연스러운 형제처럼 친밀해졌다.

 

어느 날 연희가 수업을 마치고 망해궁의 별실 문을 나왔을 때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연희가 색동저고리를 입고 붉은 색 굴레를 눌러 쓴 동생을 반기며 말했다. “연모 너, 여기 어쩐 일이니?” 그러자 연모가 호수같이 맑고 그윽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한참 기다렸어. 이제야 수업을 마친 거야.”

아참! 같이 화방에 가기로 한 약속을 잊었구나. 그래 가자.”

그것을 창에서 바라보던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저 아이가 대체 누구야?”

사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동생 같은데.”

사라져가고 있는 사내아이의 뒷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공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 아이는 왜 멀리 사라져가는 거지?”

아주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어쩌면 우리 눈앞에 다시 나타날 수도 있잖아.”

당장 내 앞에 데려와 줘. 부탁이야.”

내가 다음번에 사부에게 부탁해 볼게.”

 

사비성 경내의 화방은 운동장처럼 넓고 아름다웠다. 널찍한 너덧 개의 화실에다 주변에 아기자기한 정원과 연못을 꾸미고 주변 냇물을 끌어들여 바위틈으로 폭포수처럼 물이 떨어지게 해 연못으로 흘러들어가게 해놓았다. 게다가 드넓은 화실의 벽에는 갖가지 형상의 조각물로 치장되었고, 사방 구석구석엔 별의별 그림이 그려진 병풍들이 산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벽에 달린 오색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영롱한 무지개 색을 만들며 실내에 전시되어 있는 수많은 그림들에 신비롭게 얼비치고 있다. 바닥에도 기묘한 무늬를 수놓은 벽돌을 깔아 놓아 화방 전체가 온통 그림의 낙원 같아 보였다.

 

그곳에 온 연모와 연희. 그곳에서 그림을 감상하던 많은 시선들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모아졌다. “~~~. 이런 이 좁은 백제에 굉장한 미인과 미남이다. 저들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사람들이 가까이서 웅성거렸지만 그들은 자기들한테 집중되는 뜨거운 시선을 외면하고 묵묵히 그림을 둘러보았다. 얌전하고 내성적인 연모와는 달리 오히려 연희는 화방에 온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에 몰려들어 환호하는 것을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다. 가끔씩 사내들이 추파를 던지며 말을 붙여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화방에 들어온 연모가 별 그림만 골라 감상하는 누나를 보고 어린아이처럼 칭얼댔다. “누나는 여기에 오면 맨날 별 그림만 쳐다보고 그것만 사가는 거야.”

그건 내 자유지. 나는 태어날 때부터 별이 그렇게 좋더라.”

그럴 것 같으면 아예 별나라에 태어나질 그랬어.”

누가 내 맘대로 여기 왔나, 보내서 왔지.”

대체 누가 우리 별나라 공주를 백제의 연씨 가문에 보낸 거야?”

별들의 모임에서 상의해서 나를 내려 보냈겠지.”

삼신할미도 아니고 별들의 모임?”

그래. 누구나 하늘에 자기별이 있다고 하지 않아? 지나온 과거에 의해 정해진 운명에 알맞은 시간과 공간으로 보내는 거야.”

 

마침 저쪽에서 화려한 옷차림의 임금이 화방에 들어오는 것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임금을 발견한 사람들이 당황한 나머지 허둥대며 화실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것을 본 연희가 연모에게 눈짓을 하며 나직이 말했다. “그냥 모르는 척해. 임금이 잠시 슬쩍 둘러보고 바로 나갈 수도 있잖아.”

하지만 여기저기 그림을 둘러보던 임금이 연희를 보자 반가운 표정을 뿌리면서 큰 목소리로 불렀다. “천문박사! 여긴 어쩐 일이오.”

 

그러자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화방 바닥에 바싹 엎드려 절을 하였다. “저희 두 사람 대왕마마를 화방에서 뵈옵니다.” 그녀의 몸에 못이 박힌 듯 연희만 바라보고 있던 임금의 눈에 기쁜 빛이 감돌며 그의 입에서 칭찬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천문박사는 하늘만 잘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도 즐기는구려. 정말 재주가 많소.”

소신, 별들을 관찰하는 일에 항상 충실하고 있사옵니다. 잠시 짬을 내어 화방에 들러 단지 별에 관한 그림을 찾고 있었사옵니다.”

자나 깨나 별에 묻힌 박사의 집념은 정말 대단하오. 별에 대한 그 뜨거운 열정이 우리 백제를 반짝반짝 빛내줄 것이오.”

성은이 망극합니다.”

이왕 온 김에 내 박사하고 옆의 정원에 나가 경치를 감상하며 한 잔 하고 싶소.”

 

임금의 명인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어찌 거절할 수 있으랴. 연희는 연모더러 잠시 기다리라고 한 다음 임금과 함께 밖에 나갔다. 정원에는 온갖 꽃들과 기암괴석, 분재 등이 사방에서 팔을 벌리고 그들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연못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정자 주변에는 억새풀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특히 억새꽃이 새하얗게 피어나는 가을에는 더욱 운치가 있었다. 가끔씩 비올 때 연못가에서 정자로 이어지는 돌다리에 무지개가 자주 걸려 있을 때에는 마치 무릉도원의 별천지에 온 듯하다.

 

둘이 정자에 올라가니 번쩍거리는 금은으로 된 화려한 그릇들과 품위 있고 우아한 도자기로 된 술병과 술잔이 멋지게 진열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릇에 담긴 감미롭고 기름진 음식이 두 사람의 눈과 코를 자극하는 가운데 연못 주변에서는 악공들이 각가지 악기를 흥겹게 연주한다. 임금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우연히도 박사를 만나 너무나 즐겁소. 그래서 이곳에서 박사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한 것이오. 화방 주인더러 술과 고기와 과일을 더 가져오라 하겠으니 실컷 먹고 돌아가시오.”

 

그 말에 임금을 묵묵히 바라보던 연희의 머릿속에 비웃던 연씨 가문 신하들의 말이 생각났다. “아무 때나 음식에 둘러싸여 있고, 사탕을 먹으며 조회를 하다가도 내키는 대로 중지하고 나서 취미 즐기고 개밥을 주는 등 제 마음대로이고 자유분방한 자가 무슨 왕이냐, 대비만 아니었으면 당장 작살냈을 건데.” 웅진에 있을 때 선왕의 독살을 알게 되어 커다란 충격을 받아 방황을 할 때의 임금 이야기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왜 나를 그렇게 빤히 쳐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소? 화실에 다녀와서 내 얼굴에 물감이라도 묻었나?”

, 아니옵니다. 용안에 찬란한 별들이 아름답게 비추는 듯 아주 훤하여 소신도 모르게 매혹되었사옵니다.”

백제 최고의 미인이 나에게 매혹되었다? 거짓말이라도 싫은 말은 아니군.”

절대 거짓말이 아니옵니다. 대왕의 신수는 원래 빼어나지 않사옵니까? 오늘은 더 그렇사옵니다.”

하하하! 이렇게 칭찬을 하여 주니 내가 몸 둘 바를 모르겠소.”

 

임금이 은근한 눈길로 연희를 지그시 바라보며 음식을 권한다. “경도 과인보다 평소 연구에 몰두하느라 이런 별미를 맛본 적이 많지 않을 것이오. 마침 이번이 좋은 기회인만큼 마음껏 먹고 즐기시오. 여기에 깊은 산의 향기가 가득 밴 송이갈비구이와 어린 돼지의 부드러운 살맛을 느낄 수 있는 연저육찜이 있소.”

황공하오나 대왕전하의 명이신 만큼 마음껏 들겠사옵니다.”하면서 연희가 넉살 좋고 뱃심 좋게 왕성한 식욕을 보이며 잘도 먹는다. 그것을 지켜본 임금이 흐뭇한 눈길로 술병을 들었다. “술도 한 잔 내가 따라 주겠네. 궁중에서만 마시는 그 유명한 계룡백일주일세.” 연희가 잔을 받더니 기분 좋게 잘도 마신다. 그러더니 연산에게 잔을 내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황공하옵니다. 전하께도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러자 임금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그 불타는 눈에서 절절한 눈빛이 뿜어 나온다. 마음대로라면 얼른 연희가 마신 술잔을 받아 백번이라도 마시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체면이 더 중요하다.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하여 기분이 좋아서 한없이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예전 웅진성에서처럼 추태를 부리면 자기의 공들인 노력이 다 날아가 버린다. 지금은 연씨네, 특히 연희를 다독여 자기편을 늘리고 연씨와 사씨 두 가문의 갈등을 줄여나가야 한다.

아니, 나는 사양하겠네.” “대왕께선 평소 술을 아주 좋아하시는 줄로 알고 있사온데 뜻밖이옵니다.” 그 말에 옛날 방황하던 시절이 다시 떠오른 임금이 뜨끔하여 말했다. “과인은 아름다운 그림과 여인을 음미하려고 술을 찾을 뿐 결코 술 자체에 빠져버린 일은 없었소. 대신 경에게 한 잔 더 따라주겠으니 어서 받으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임금이 새하얀 물살을 반짝이게 하며 연못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한다. “경이 볼 때, 임금들이 하는 일이라곤 신하들과 함께 꽃같이 아름다운 기생들을 옆에 끼고 풍악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화를 감상하거나, 바람처럼 빠른 말을 신나게 타고 산과 들을 누비며 짐승들을 잡아 구수하게 구워 먹으면서 웃고 덕담이나 하는 것이지 않는가.”

연희가 터져 나오는 트림을 손바닥으로 살며시 가리면서 대답한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임금은 그렇게 풍류나 일삼고 사냥이나 즐기는 한량처럼 지내지 말아야 하고, 잠시 쉴 틈도 없이 서책, 특히 천문에 관한 것을 가까이하여 하늘의 계시를 바로보시고 신하들과 함께 열심히 나랏일을 토론하며 부지런히 백성들을 살펴야 하옵니다.”

 

임금은 그 말을 들은 둥 말은 둥 하고 연못가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만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연다. “과인이 솔직히 말해 우리가 지금까지는 서로 적이 아니었던가. 왕실과 팽팽히 대립한 연씨 가문. 그런 입장의 두 사람이 이렇게 술잔과 술잔을 맞대고, 마음과 마음으로 마주 보고 정말 신기하지 않소? 술자리에서는 적들도 친구가 된다 하니 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감미로운 전쟁이 아니겠소. 하하하!”

 

전하. 그러하옵니다. 그건 단지 술자리만 아니라 음악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음악은 우리의 감정을 고양시켜 세상에 대한 많은 경험을 아름답게 느끼게 하여 주옵니다. 하여 음악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듣는 사람들의 감성을 울릴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라면 충분히 경계하고 남을 사람들이 같은 음악을 즐긴다는 이유만으로 다정하게 느끼기도 하옵니다.”

경도 예술의 아름다움을 어지간히 알고 있구려.”

조금 취미가 있사옵니다.”

연희는 자신을 향해 칭찬을 하는 임금을 향해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시커먼 너구리 굴 같은 임금이라는 사내의 꿍꿍이속을 알지 못해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상대방에게 무슨 목적이 없다면 이처럼 자신을 높이 추켜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임금과 신하의 오붓한 만남은 이렇게 우연히 이루어졌고 연희는 결국 임금이 평소 자신을 눈여겨보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다. 임금은 계속해서 연희의 마음을 떠보면서 자신의 실체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사씨와 연씨가 서로 으르렁거리는 지금처럼 조정이 심상치 않은 위기에 빠져 있을 때에는 임금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등을 돌리는 배신자가 아닌, 끝까지 곁에서 지조를 지키는 충신이 임금에게는 절대로 필요하였다.

 

과인은 그동안 자신을 위해 치부한 적이 전혀 없소. 임금이든 신하든 공적인 자리를 이용하여 재물을 긁어모으면 나라꼴이 엉망이 되오. 과인은 대신 내탕금을 써서 그대와 같이 충직한 신하들에게 상을 내릴 때 품계를 높여주는 것은 물론 귀중한 하사품도 아끼지 않소.”

끄어~. 너무 잘 먹었사옵니다. 전하. 허면 이 좋은 음식들이 바로 하사품이란 말씀이옵니까? 황공하오나 전하께서도 공치사를 잘 하시옵니다.”

저 자는 상당히 아름답고 재주가 있기는 하나 그 고운 입에서 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침까지 튀기며 임금 앞에서까지 바른 말을 해대는군. 내가 술을 괜히 많이 주었나?’

하고 임금은 속으로 생각하더니 비위가 뒤집히는 것을 꾹 참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경이 좀 취했나보오. 과인이 공치사를 했다면 미안하오. 트림이 나오고 속이 더부룩한 것 같으니 후식으로 달콤한 산사정과와 시원한 배수정과를 마셔 보게나.”

그것을 맛 본 연희가 감탄한 얼굴로 말한다. “맛이 너무 감미롭사옵니다. 전하.”

 

잠시 후 임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속삭이듯 입을 연다. “궁중 음식이 그대 마음에 드는가. 어떤가. 내 곁에 가까이 있으면 이런 귀한 음식들을 먹을 기회가 많을 터인데, 그렇게 하겠는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과인이 생각하는 충신은 바로 사사로움을 돌보지 않고 임금과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인데 경이 바로 그런 사람이오. 하여 오늘부터 그대를 內官(내관)인 전내부의 내솔로 임명하겠소. 경도 기쁘지 않소?”

그렇기는 하오만은......”하고 연희는 썩 내키지 않는 말투로 대답하고 난 다음 묻는다. “전하! 소신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드셨사옵니까?”

거침없이 자신의 허물과 자랑을 그대로 내 보이는 솔직함이 그대의 매력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연희의 목소리는 전보다 단호한 어조로 바뀌고 있었지만 아직도 망설임이 남아 있는 듯했다. 임금과 같은 처지의 공감대를 충분히 느끼고서도 조정의 신하들을 의식하여 몸을 사리는 두려움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목소리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녀는 연산과 함께 시국과 예술에 대해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천문과 예술만큼 정치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연희는 임금의 얼굴에서 번뇌와 고독의 꿈틀거림을 보았고, 그의 말 속에서 연희를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강한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임금이 뜨거운 눈으로 연희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열변을 토한다. “백제는 원래 나라 이름대로 백성을 위해 백성의 도움과 지지를 받아 세워진 나라라고 생각되오. 백은 백성을 뜻하고 제는 구제하다와 돕다의 뜻이 있지를 않소? 하지만 그동안 나라의 운영이 귀족과 왕실을 중심으로 되어져 왔소.”

그렇사옵니다. 이제라도 임금께서 아래로 고개를 돌리고 백성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어야만 이 나라를 지탱할 수가 있는 것이옵니다.”

옳은 말이오. 조정 신하들도 과인을 따라 이렇게 낮은 데로 임한다면 모든 백성들이 함께 잘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 같소.”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연희. 오뚝한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강직함이 엿보였고, 바라보는 눈길에서는 차분한 기운이 물씬 풍긴다. 성실한 사림으로 성깔은 조금 있으나 너무나 순박하고 소탈한 이 사람은 자기의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래도 그렇게 반갑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미소를 짓지 않은 때는 별로 없었다. 그녀는 비록 세속의 일상에 밝지 못해 기를 펴지 못한 처지이지만 그 감출 수 없는 재주는 충분히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연희는 처음에 부친 연수의 부탁을 받은 연씨 좌평의 추천으로 천문박사의 벼슬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조정의 모든 논의에 참가하여 바른 말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다른 연씨 귀족들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이것을 눈여겨 본 임금은 그녀의 재주와 의기를 대단하게 여겨 그녀에게 전내부의 높은 벼슬을 내려 자신의 곁에 가까이 두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예와 시화를 갈구하는 사람은 성왕 앞에서 그의 꼭두각시가 되고 그것을 조종하는 임금은 힘들이지 않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예술의 마왕은 절대로 자기 노예들을 한곳에 머물게 하지를 않는다. 백성들을 돌보는 업무처리 중에 틈틈이 시에서 그림으로, 그림에서 음악과 춤으로, 다시 향기로 주제와 소재를 바꿔가면서 시선을 환기시켜 준다. 정체되면 금방 싫증이 나서 심정적으로 자기 곁에서 멀어져 믿음직한 신하들을 제대로 기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금은 그들을 확보한 이후에도 서로 분야별로 최고의 예인을 지향하여 경쟁을 시켜나가는 것이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임금이 헛기침을 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서자 연희가 곧바로 따라 일어났다. 정자에서 나온 두 사람은 다시 화실에 들어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곁으로 다가갔다. 임금이 연희를 바라보며 지그시 말했다. “잘 둘러보고 오시오.” 그 말에 연희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 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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